서유럽 여행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 황금 지붕

opal* 2010. 6. 23. 05:43

 

  2010-06-23(수)

 

800년 역사를 가진 티롤지방의 주도이자 제 9회 동계올림픽의 개최도시인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시내관광.

♣세계적으로 유명한 크리스탈 브랜드 스와로브스키 본사에 들려 감상.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황금지붕 』등 시내관광.

 

파일:Austria map kr.PNG

 

인스브루크 (Innsbruck) 는 오스트리아 티롤 의 주도이다. 알프스 산맥 동부의 질 강 어귀에 인 강을 끼고 있다.

풍경과 경치가 맑고 아름다운 곳으로, 서유럽에서 가장 인기있는 관광지이자 겨울 스포츠 중심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64년 동계 올림픽과 1976년 동계 올림픽을 두 번씩이나 개최했다. ‘인스브루크’는 ‘인(Inn) 강의 다리’라는 뜻이다.

원래는 인 강에 놓인 다리가 이 교역로 역할을 했고, 도시의 이름과 기장(記章)이 이 다리에서 유래되었다.

 

1180년 안덱스의 바이에른 백작가에 속한 작은 시장 도시로 처음 기록에 나타났으며, 이탈리아에서 브레너 고개를 경유하여

 독일로 이어지고 또 스위스에서 서부 유럽으로 연결되는 주요무역로의 교차점이라는 전략적인 위치에 있어 급속히 발달했다.

 

1239년 인스브루크는 자치시로 인가를 받았고, 1363년 합스부르크가(家)에 넘어갔다가, 1420년의 이른바 '빈 주머니의' 공작인

프리드리히 공작의 지배 아래서 티롤의 주도이자 공작 주거지가 되었다. 1806년에 나폴레옹은 이 도시를 바이에른 왕국에 넘겨주었다.

 옛 도시에 있는 좁은 가로들의 양옆에는 중세 주택들과 상가들이 늘어서 있다. 많은 건물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반짝이는 구리 지붕이 있는 퓌르스텐부르크인데, 이 건물은 프리드리히 공작이 처음 건설한 것으로 여겨지며 1500년경에 황제 막시밀리안이 개조했다. 그밖의 유명한 건축물로는 호프부르크(1754~70)와 프란체스코 수도회 교회가 있다. 1677년 황제 레오폴트 1세가 이곳에 대학교를 설립했고,

 이 대학교의 대규모 도서관은 1745년 왕비 마리아 테레지아가 기증한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독어 Maria Theresia1717.5.13.~1780.11. 29.)는 신성 로마 제국의 프란츠 1세황후(1745~1765)이자,

오스트리아의 여대공(재위 1740~1780)이며, 헝가리크로아티아의 여왕(재위 1741~1780) 겸 보헤미아의 여왕(재위 1743.~1780.)이면서,

파르마 여공(재위 1740.~1748.)이었으며, 이외에도 수 많은 작위를 지녔었다.

일반적으로 ‘여제’라고 불리며 실제로도 여제나 다름없었지만, 공식적으로는 신성 로마제국군주가 아닌 황후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당시 사람들에게 사실상 여제시 되고 있었다. 정식으로는 황후에 지나지 않는 그녀가 이처럼 다루어지는 이유는 

남편인 황제가 프랑스 국경 주변의 로트링겐 공국(현 프랑스 로렌) 출신의 양자 출신이며, 실제 권한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던 것.

제위는 남편의 소유가 되었지만, 합스부르크 왕가 당주권은 그녀에게 있다는 것. 즉, 실질적으로 군소국가의 독립체제로서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했던 신성로마제국보다는, 법적으로는 국가가 아닌 오스트리아 및 합스부르크가 관할 구역 쪽이

사실상의 정체(합스부르크 군주국)로 간주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프란츠는 부군으로서의 이미지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제적 이미지(실제로는 황후이며 여왕)로

세간에 널리 퍼졌다고 말할 수 있다. 그녀가 생전에 사용했던 칭호는 Königin(여왕)과 Kaiserin(황후)의 머릿글자를 딴 ‘K.K’이다.

 

 

 

시내 관광에 앞서 상점 문 닫을 시간에 임박하여 도착하는 바람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크리스탈 브랜드 스와로브스키 본사에 들려 

감상 후 쇼핑부터 하였다. 며느리와 딸 선물로 악새사리 소품 몇 점을 구입했다.

 

인스브르크의 랜드마크 '황금지붕'이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 - 합스부르크 가문의 계몽군주 마리아 테레지아의 이름에서 따온 이름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는 광장 거리라 불리울 정도로 넓다란 길에 좋은 경치를 가지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머무는 곳이다.

개선문에서 구시가를 향해 북쪽으로 뻗은 거리로 인스부르크에서 번화한 곳이며, 이곳에서는 바위산 Nordkette(해발 2,334m)의

만년설을 볼 수 있다. 계곡을 따라 밑으로 내려 가면 Spitalkirche(스피탈 교회)와 종루의 둥근 탑들이 있다.

또한 광장 거리에는 오래된 상점들이 이어지며 중앙에는 황토색 배경에 하얀 색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안나 기념탑은

스페인 계승 전쟁 동안 침입자들을 격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706년에 세워진 것이다. 13m 높이로 세워진 탑 꼭대기에는 성모상이 있다.
한적하면서도 깨끗한 거리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곳으로 아름다운 풍경과 어우러진 예전의 건축양식이 그대로 남아있어 관광객이 모여든다.

 

 

프리드리히 거리의 막다른 골목에 있는 황금지붕

1420년 티롤 군주의 성으로 지어진 이 건물에 1497년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지시로 발코니를 만들었고 그 위에 황금지붕을 만들었다.

막시밀리안 1세가 건물 앞 광장에서 열리는 행사를 관람하기 위해 만든 발코니에

막시밀리안 1세와 두 아내들, 재상, 광대, 모레스크 무희들의 모습과 문장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지붕은 2,657장이나 되는 금박을 씌운 장식이 있는 고딕 양식으로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았으며,

2층 난간에는 각 지방의 문장들이 섬세한 띠 모양으로 새겨져 있으며, 3층에는 풍부하게 장식된 로지아(거실용 발코니)가 있다.

이 건물의 내부는 동계 올림픽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곳에는 올림픽 경기의 우표도 수집되어 있다.

오늘 날에 와서는 2003년 초부터 국제 알프스 협약 상설 사무국으로 사용되고 있다.

 

인스부르크의 랜드마크인 황금지붕,

막시밀리안 I세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그의 두번째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금도금이 된 동판을 사용하여 황금지붕을 씌워 개축하였다고 한다.

 

 

 

 

15세기 대표적인 고딕양식인 로코코양식의 헬블링 하우스

 

 

 

 

 

성 야콥 사원 (Dom zu St. Jacob)
 황금지붕 옆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1720년 경에 세워진 성당이 있다.

바로크 양식의 내부장식이 눈부실 만큼 화려하며, '구원의 성모'가 그려진 제단과 설교단, 천장화가 볼 만하다는데

시간이 부족하여 외관을 보며 안내 멘트만 듣고 돌아섰다. 

 

 

 

 

 

 

 

 

 

 

 

 

 

 

 

 

6월인데도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 눈 쌓인 산이 보이고, 맑은 강물이 흐른다. 

 

 

 

 

 

 

함스부르크家의 문양.

인스브루크 구시가지에는 `'황금 지붕' 못지않은 명소가 또 있다. 괴테의 글에도 자주 등장할 뿐만 아니라 괴테 자신이 직접 묵기도 했던 `황금 독수리 호텔` 이다. 600여 년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이 호텔 입구에는 그동안 이곳에 묵었던 유명 인사들의 이름을 동판으로 새겨 놓았다. 호텔 근처에는 모차르트가 열 세살 때 아버지 레오폴드 모차르트와 들른 인연으로 유명해진 조그만 식당도 하나 자리 잡고 있다.

 

 

 이 소년은 뭘보고 있는 걸까?

 

아주 오래 전에 지어진 호텔 건물에 객실(윗 부분)을 더 지었다.

 

 

 

 대학가 거리의 광장.

 

 자국의 축구시합이 있는 모양인데 열광하는 팬들이 우리나라와 비교가 안될 정도로 숫자가 적다.

 

 

 

 

 

 

 

 

 

 

 

 

 

 

호텔내에서 저녁식사.

 

 

 

 

호텔에서 보이는 풍경들.

 

호텔의 다른 건 다 좋은데 욕실 샤워부스가 좁아 혼자 간신히... 그나마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정도.

 

Maria theresia van Oostenrijk II.jpg

본명- 마리아 테레지아 발부르가 아말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 시절

1717년 5월 13일,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와 황후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장녀로 에서 태어났다.

1722년 빈에 유학하러 온 프란츠 슈테판 폰 로트링겐과 사랑에 빠져 1736년 2월 12일에 두 사람은 혼례를 올렸다.

연애 결혼이기도 했지만 당시 로트링겐(로렌) 공령을 둘러싸고 프랑스와의 이해관계에 의한 정치적 결합이기도 하였다.

 

합스부르크 가의 왕위 계승 방식살리카 법에 근거하여 남자계 상속으로 지정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오빠가 요절한 이후,

카를 6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살리카 법에 의해 여성이 제위에 오를 수는 없었기 때문에 신성 로마제국 황제 자리에는 사위인 로트링겐 공 프란츠 슈테판이 오르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카를 6세는 아들의 탄생을 기대하여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가정적인 교육만 베풀 뿐, 정치가로서의 교육은 베풀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

카를 6세가 죽자 주변 나라들이 그녀의 합스부르크 가의 모든 영토에 대한 상속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결국 합스부르크 가와 혈연 관계를 맺고 있던 나라들이 서로 자신이야말로 합스부르크 가의 상속권을 물려받아야 한다며

영토를 분할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로 쳐들어 갔다. 이것이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이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처음으로 전쟁 공포도 없이 합스부르크 가 영토인 슐레지엔을 공격하였다.

이에 대해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을 결사 방어하겠다는 결의를 분명히 하여, 제1차 슐레지엔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녀는 당시 23살이었던 데다가 네 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지만, 1741년 3월 13일 마침내 고대하던 아들 요제프를 무사히 낳아,

국내 사기가 치솟아 올랐다. 1741년 6월 25일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우선 헝가리 여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그 후,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 마저 오스트리아의 적으로 돌아섰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바이에른과 전쟁을 치르기로 결의했지만, 오스트리아는 거듭되는 전쟁 때문에 전비가 갈수록 줄어든 데다가

원군도 없고, 궁정의 중신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했다.

그러자 그녀는 1741년에 헝가리로 가서 9월 11일 헝가리 의회에서 연설을 하여 군자금과 병력을 얻었다.

그리고 군사력 증가 및 강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후 전황은 대역전을 거듭하며, 한때는 황제 자리도 카를 알브레히트(카를 7세)에게 빼앗기지만,

카를 사후에 탈환하여 1745년 10월 4일에 남편 프란츠 슈테판을 다시 제위에 앉히는 데에 성공한다.

하지만 프로이센에게는 군대의 질 등의 격차로 인해 연패를 거듭하여 1745년 드리스덴 조약을 맺어 슐레지엔의 프로이센 영유를 승인하였고, 프랑스와의 전쟁은 한동안 더 계속되다가 프랑스와 대립하던 영국과 손을 잡아, 최종적으로 1748년 아헨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종결되어

프라그마티셰 장크치온, 즉 국본조칙(國本詔勅)에 대한 각국의 승인을 얻어내는 데 성공한다

 

정치적으로 능력이 별로 뛰어나지 못했던 남편을 대신하여 정치적 국면에서 비상한 재능을 발휘하였던 마리아 테레지아가 모든 국정을 총괄하였다. 그녀는 슐레지엔을 탈환하려는 목적으로, 하우크비트를 등용한 내정 개혁과 다운에 의한 군개혁을 실시하면서도,

외교면에서는 카우니츠를 등용하여 프랑스에 접근하였다. 막시밀리안 1세 이래 오랫동안 합스부르크 가와 적대해 온 프랑스는

당시 영국과도 대립 상태였는지라 프로이센이 영국과 동맹을 체결한 것에 자극받아 오스트리아와 화해하고 동맹을 맺게 된다.

이것을 외교 혁명이라고 한다.

 

또, 프랑스의 루이 15세의 애첩으로서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퐁파두르 후작 부인러시아의 옐리자베타,

그리고 마리아 테레지아 이 세 명의 여성들이 반(反)프로이센 포위망을 결성한 것을 빗대어 ‘3자매의 패티코트 작전’이라는 호칭이 붙었다.

 

175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에 전쟁이 다시 발발하였다. 훗날 7년 전쟁이라고 불리게 되는 이 전쟁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때와는 달리 프랑스 및 러시아와의 동맹을 맺은 오스트리아가 초반에 우세하였지만,

프로이센의 끈질기게 버팀에 따라 재정적 부담이 계속 커져갔다. 1762년, 러시아에서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추진해 온 옐리자베타가 서거하고 그녀의 이질이자 프리드리히 2세의 신봉자인 표트르 3세가 즉위한 결과, 러시아가 종반에 전쟁에서 이탈하였고,

그 후 오스트리아가 패전함으로써,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 탈환을 단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해서 1763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강화하여, 프로이센의 슐레지엔 영유가 최종 확정되었다.

 

7년 전쟁이 종식되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의 선진국화를 위해 여러 가지 내정 개혁을 실행에 옮겨 큰 성과를 거두었다.

우선 그녀는 다른 나라보다 먼저 전국에 초등학교를 신설하여 의무 교육을 확립시켰다.

이에 따라 같은 내용의 교과서가 전국적으로 배포되어 각 지역마다 각각의 언어로 어린이들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국민들의 지적 수준이 크게 상승했다.

 

또한 그녀는 군사 행정 위원을 설치하여 군세 징수 등에 관한 외부의 개입을 배제시켰다.

1762년에는 군사 기구가 궁정의 군사청 아래로 통괄되어 궁정 군사청이 최고 결정 기관이 되었다. 또, 일반 징병제가 채용되었다.

이 징병제는 전국민의 무차별적인 병역을 의무화하고 있어(실제로는 신분 차별이 있지만), 농민 출신이라도 급료를 받을 수 있게 됨으로써,

병사들의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어 오스트리아의 군사력은 현격히 급증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계몽주의적인 관료의 기세가 드세져, 그녀의 개혁 정책도 점차 계몽주의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의복의 자유화(1766년)나 예수회 탄압(1773년) 등이 대표적이지만, 그녀 자신은 점차 보수화해 갔다.

1765년 서거한 남편 프란츠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아들 요제프 2세의 급진주의적 개혁 성향에 자주 대립하여 견제하였다.

 

말년에는 그녀의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걱정해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으나 딸은 이를 거절하였다.

1780년 서거하였으며, 시신은 가장 사랑했던 남편 프란츠와 함께 합스부르크 가의 묘소인 카푸치나 예배당에 매장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첫사랑인 프란츠 슈테판과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었던 연애 결혼에 성공하였으며

(비록 남편이 이 결혼을 위해 자신의 영지 로트링겐 공국을 포기해야 했지만), 금실이 좋아 부부 생활은 매우 원만했다.

결혼하기 4일 전에 프란츠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둔 것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데, 미래의 남편에 대해 그녀가 얼만큼의 정열을 쏟았는가를 알 수 있다. 이 편지는 라틴어프랑스어 등 여러가지 언어로 쓰여있어 그녀의 교양의 깊이도 엿볼 수 있다.

프란츠는 때때로 다른 여성과 염문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정치가로서 탁월했던 그녀는 그것들을 모두 눈치채고 있음에도 눈감아 주었다.

또 남편이 죽은 후 자신이 뒤따라 죽을 때까지 15년간 상복을 벗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란츠 1세와의 사이에서 5남 11녀(총 16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프로이센을 타도하기 위해서는 막시밀리안 1세 이후 200년간의 숙적이었던 프랑스와 화해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한 이유로 자녀들의 대부분을 프랑스, 에스파냐, 이탈리아부르봉 가 일족과 정략 결혼을 맺게 하였지만,

이는 나중에 독일 제후로서 합스부르크 가의 몰락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19세기 이후의 독일 정세를 보았을 때, 이러한 결혼 정책은 성공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녀는 아이들 각자에 대한 편애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4녀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가장 사랑했으며

그녀에게만은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아들 알베르트와의 연애 결혼을 1766년에 승낙해 주었다.

이 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가 죽은 후, 이 부부는 요제프 2세로부터 푸대접을 받게 된다.

또 몸이 불편하여 정략 결혼에 사용할 수 없었던 마리아 안나에게는 차갑게 대하는 등 이상적인 어머니상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또한 그녀는 죽기 직전 프랑스 왕비가 된 11녀 마리 앙투아네트를 항상 염려하였다.

그녀는 활발하여 유달리 노는 것을 좋아하는 딸에게 프랑스 혁명의 발생을 경고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또, 츠바이브뤼켄 공자 카를과의 연애 결혼을 인정받지 못하고 파르마 공 페르디난도의 아내가 된 6녀 마리아 아말리에는

시집간 후 방약무인한 행동을 일삼았기 때문에 그녀의 귀국을 금지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수 많은 작위를 지녔다. 대표적인 작위로는,

신성로마제국 황후(프란츠 1세 사후 황태후),  오스트리아 여대공,  헝가리 왕(King),  보헤미아 여왕,  토스카나 대공작 부인.

그녀는 대관식 때 헝가리의 왕(King of Hungary)이 되었지만, 헝가리의 여왕(Queen of Hungary)라고도 불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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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든 현악 4중주 62번 황제 String Quartet No 62 in C Major Op.76-3 Ho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