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여행

3일째, 오스트리아 빈(Wien/Vienna)

opal* 2012. 5. 31. 22:00

 

(5월 31일 목요일)

잘츠캄머굿 → 비엔나

 

 

독일 도착한 첫날 호텔에 늦게 도착하더니 잘츠컴머굿에 도착한 어제도 마찬가지, 아침에 일어나 방충망을 통해  밖을 보니 주변이 한적하다. 

아침 식사 메뉴는 빵, 치즈, 햄, 그리고 씨리얼(Cereal) 정도.계란이나 야채, 과일 등은 아예없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 아침도 본인 휴대폰에 입력한 모닝콜 소리에 잠을 깨긴했지만, 우리가 자고 일어난 호텔방엔 전화기 조차  없다.

도시가 멋지고, 전원 풍경이 아름다워 다시오고 싶듯 호텔도 다시와서 자고 싶은 곳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여행사와 예약할 당시 일정표 중 포함내역엔 분명히  "★전일정 1급 + 2급 호텔 혼용 투숙" 한다고 했었다.

 

오스트리아 잘츠 컴머굿에서 비엔나로 이동. 빈에서 현지가이드 박 창ㅎ씨를 만나 빈에 대한 설명, 창 밖으로 보이는 건물 등에 대해 설명을 하는데, 뉘집 따님인지 똑부러지게 설명은 잘하는데  차의 이동 속도 만큼이나 말이 빨라 알아듣기 힘드니 메모는 더더욱 못하겠다.   암튼,

세계에서 가장 살기좋은 도시 중 5위 안에 든다는데 이맇게 아름다운 도시를 여러날 동안 걸어다니며 골고루 보고 느끼면 얼마나 좋을까...

일정 빡빡한 패키지 여행의 서러움이여~ 그래도 13시간씩 비행기를 타고와 매일 끄덕없이 다닐 수 있는 건강함에 행복해하며.  

 

 

빈에 와 제일 먼저 찾은 곳이 훈데르트바서 하우스(Hundertwasser Haus)

부르기 쉽고 알아듣기 쉽게 '시영 아파트'라고 설명하는 현지 가이드 박 ㅊㅎ씨.

 

시영 아파트 입구에서.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1928. 12. 15~2000. 2. 19 ) - 오스트리아의 화가, 건축가, 환경운동가.

본명은 프리드리히 스토바서(Friedrich Stowasser). 192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다.  1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대인인 어머니와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히틀러의 유대인 탄압으로 외가 친척 69명이 몰살당했으며,

그와 그의 어머니는 유대인 거주지구(게토)로 강제 이주되었다.  이때의 경험은 그의 전 생애에 깊은 트라우마(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 남아 평화에 대한 강한 의지와 신념을 갖도록 했다.  그 스스로 개명한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라는 이름은

평화롭고 풍요로운 곳에 흐르는 백 개의 강”이라는 뜻으로 그의 삶과 예술에 흐르는 정신을 일깨워준다.

  
훈데르트바서는 자연보호, 산림운동, 반핵운동 등 예술 밖에서도 활발한 운동을 실천한 환경 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는 생태주의 복음을 설파하며 캠페인 포스터를 제작하고 시위에 참여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철학을 피력했다.

 일생을 환경보호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한 그는 2000년 태평양을 항해하던 엘리자베스 2호 갑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71세),

그는 유언에 따라 뉴질랜드에 있는 그의 땅 ‘행복한 죽음의 정원’ 안에 있는 튤립나무 아래 자연과 어우러져 영원히 잠들었다.

 
주요 작품에는 《대성당 1 Cathedral 1》(1951), 《노란 집들-질투 Yellow Houses-Jealousy》(1966), 《작은 길 The Small Way》(1991) 등의 회화 작품과 《쿤데르트바서 하우스 Hundertwasserhaus》(1983~1986, 오스트리아 빈), 《쿤스트하우스 빈KunstHausWien, 오스트리아 빈》(1991), 《블루마우 온천마을 Blumau》(1993~1997, 오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주) 등의 건축물이 있다

 

 

내부엔 시민들이 살고 있어 들어갈 볼 수는 없고 외관만 둘러 보며 훈데르바써 님의 작물을 감상한다.

1983년 훈데르트바서는 빈의 시의회가 의뢰한 공공주택 리모델링 작업에 착수했다. ‘건축은 네모다’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탄생한

 '훈데르트바서 하우스'에는 건축을 통해 지상낙원을 실현하려는 그의 꿈이 녹아 있다.

 그는 ‘자연에는 직선이 없으며, 인간은 이 땅의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살아가야 한다’는 신념을 건축 안에 쏟아 부었다.

 빈의 가장 유명한 건축물 가운데 하나인 《쿤스트하우스 빈》 역시 그의 이러한 철학이 그대로 투영되었다.

 그는 도시의 메마른 건축들에 생명을 불어넣어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하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건축 치료사’라는 이름을 얻었다.

 

훈데르트바서는 일찍이 색채와 형태에 대한 남다른 감각을 지녀 미술에 두각을 나타냈다.

 전쟁 후 빈 미술아카데미에서 3개월 동안 공부했으며, 이후에는 유럽 전 지역을 여행하면서 견문을 넓히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그는 작업실을 따로 두지 않고 집과 야외, 레스토랑, 기차나 비행기 등

 자신이 머무르는 곳은 어디에서든 그림을 그렸다. 또한 이젤을 사용하는 대신 캔버스나 종이를 펼쳐놓고 작업했다.

 하나의 작품에 수채 물감, 유화 물감, 유성 펜, 아크릴, 템페라, 오일, 금속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했으며, 종이와 캔버스는 물론 프린트지,

 포장지, 나무판, 천 조각, 버려진 종이 등 다양한 곳에 그림을 그렸다. 물감의 대부분도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세계 각처에서 모여든 관광객으로 좁은 길이 북적대니 살고 있는 주민은 매일 시끄럽지나 않을런지...

 

같은 건물인데도 같은 모양을 한 창문을 찾기가 쉽지 않고 다양한 색들이 배치되어 있다. 

 

훈데르트바서의 그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나선’의 형태이다. 그에게 나선은 생명과 죽음을 상징한다고 한다.

 그리고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지 않고 끝없이 돌고 있는 나선이야말로 우리의 삶과 가장 많이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색채의 마술사’라고 불릴 정도로 색을 조합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는 전통적인 색의 조합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대담한 컬러를

 사용했다. 그의 특유의 색감은 회화에서 주제를 드러내는데 주조적인 역할을 했으며, 생명의 다양함과 무한함을 색채를 통해 표현했다.

훈데르트바서의 철학은 자연은 모두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의 언덕이나, 어떤 곳을 보더라도 인간에 의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들은 모두 곡선이기 때문에 건축물도 곡선으로 가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건물 아래 기둥도 곡선, 가로수가 심겨진 훈데르트바서 하우스 앞의 길 바닥도 언덕처럼 솟아 곡선 모양을 하고 있다.

 

차도 못다니는 좁은 길에서 높은 건물을 배경으로 찍으려니 길 폭이 좁아 세로로 찍어도 건물 높이가 다 안나온다. 

 

높은 아파트 건물을 받치고 있는 아름다운 곡선모양의 기둥.

 

밖에서 2층으로 오르는 나선형 계단에서.

 

좀 작아 그럴까? 어찌보면 너무 조잡스러워 보이는 분수. 그래도 여름에 왔으니 흐르는 물을 볼수 있어 다행이다.

또 한 무리의 외국 관광객이 와 설명을 듣고 있다.

 

훈데르트바서 하우스(Hundertwasser Haus)  

건축가인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 도심에 지은 집합주택.

이상적인 주거건물을 지어보자는 빈 시당국의 건의로, 미술가·건축가이자 생태주의자인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1928~2000)가

 1985년 10월 건설하였다. 빈 시에서 운영하는 집합주택으로, 빈 시내 헤츠가세역() 근처에 있다.

 대지면적은 1,543㎡이고, 벽돌구조로 되어 있으며 층수는 3층부터 9층까지 다양하다. 총 주택수는 52호이고 상점은 5호이며,

 각 주택의 규모는 30~150㎡이다. 공공 공간으로 어린이놀이터 2곳과 윈터가든(winter garden), 카페가 있다.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는 삭막하고 특징이나 국적 없는 현대주택을 지양하고, 현대인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주거건축물을 목표로 하여 과거 왕이 살던 위엄 있는 왕궁과 같은 대중의 집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특히 강렬한 색채와 서로 다른 모양의 창틀, 둥근 탑, 곡선으로 이루어진 복도 등이 조화를 이루며, 스카이라인이 신과 사람을 맺는 다리 역할을 한다는 생각 아래 중요시하였다.
세부적으로 보면, 입구 통로는 큰 회색 아치로 구성하였으며, 몇 개의 작은 창문이 아치의 안쪽에 자리잡고 있다.

 

아치 위에는 어린이를 위한 놀이방인 어드벤처 룸이 있는데, 어린이들이 편안한 분위기에서 신나게 놀 수 있고

 방의 바닥이 곡선이어서 미끄럼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그밖에 계단식으로 디자인된 지붕정원(tree tenants),

 대화 장소나 개인적인 파티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윈터가든이 눈에 띈다.

프리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는 1973년부터 건축에 큰 관심을 보여 왔으며, 스피틀라우 지역에 있는

 둥근 돔 형태의 쓰레기소각장을 디자인하고, 화려한 개인화랑인 쿤스트하우스 빈(Kunst Haus Wien) 등 위대한 작품을 남겼다.

 

훈더르트바서 하우스 근처엔 다양한 기념품들을 팔고 있는데 훈더르트바서와 관련된 상품들보다 클림트나 모짜르트와 관련된 기념품들이 더 많이 보인다. 버스 올 때를 기다리는 동안 이것 저것 구경하니 팀장님."우리 다른 곳에 가면 더 싸게 살 수 있으니 여기서 사지 마세요" 

다시 차에 올라 빈 시가지를 도는데 도로망이 링(반지)으로 되어있어 왔던 곳을 다시 지나며 한 방향으로 진행한다.

링이라는 것은 예전에 빈을 둘러싸던 성곽을 19세기에 허물어 버리고 그  자리에 구도심을 에워쌓은 환상도로를 건설한 것을 뜻한다.

 

빈 시내에서 차를 타고 구경 할 수 있는 것은 링 외곽으로는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 국회의사당, 시청사, 빈 대학교, 시립공원이 있고,

 내부로는 왕궁정원, 시민정원, 국립오페라하우스, 골든홀 등이 있다.

 

(Wien/Vienna)
오스트리아의 수도이자 도시 자체가 하나의 주 단위로 분류되어 있다. 오스트리아의 북동쪽, 도나우(Donau)강 변에 위치한다.

영어로는 비엔나(Vienna), 체코어로는 비덴(Videň), 헝가리어로는 베치(Becs)라고도 한다.

도나우강() 상류 우안에 있는 유럽의 고도()로, 지금도 중부 유럽에서 경제·문화·교통의 중심지를 이룬다.

수백년 동안 대제국의 수도였으며 지리적 이점 때문에 정치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중부 유럽을 동서 방향으로 달리면서

민족·기후·식생 등의 경계를 이루는 알프스·카르파티아 산맥을 관류하고 있는 도나우 강변에 자리잡고 있다. 
 

BC500년에 켈트 족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도시로 1440년 합스부르크(Habsburg)왕가가 들어오면서 정치, 문화, 예술, 과학과

음악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사실상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로 자리매김했다. 1805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세계 2차 대전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 소련의 신탁통치를 받으며 수도로써의 기능을 독일 베를린에 넘겨주었다가 1954년 독립하면서

다시 수도가 되었다. 베토벤(Beethoven)과 모차르트(Mozart) 등 유명한 음악가들을 배출한 음악의 도시로 알려져 있다.

석유 수출국 기구(OPEC)와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ZE), 국제 원자력 기구(IAEA)등과 같은 중요한 국제 기구들의 본부가 이곳에 있다. 

 

 

빈 국립 오페라 극장(Staatsoper Wien)- (달리는 차 안에서 찍어 선명치 못하다.)

 

파리 오페라극장,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과 함께  유럽 3대 오페라극장으로 평가받는 오스트리아의 오페라극장이다.

빈 국립 오페라극장의 전신은 1869년 세워진 '궁정 오페라극장'이다. 1918년부터 지금의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으로 건물 대부분이 파손됐으나 ‘모차르트의 도시’ 빈의 자존심을 되찾아야 한다는 시민들의 성원과 후원금을 바탕으로

약 10년 동안의 대대적인 보수 작업을 거쳐 옛 모습을 되찾았다. 이 때문에 건물 외형은 19세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만

내부 시설은 현대식으로 갖춰져 있다.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빈 필하모닉이 이 극장에 소속돼 있다.

또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97~1907),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1956~1964),

로린 마젤(Lorin Maazel, 1982~1984) 등 거장들이 이곳의 음악 감독을 역임했다.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오스트리아 정치 일번지인 빈 링 안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에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동상.

그는 1740년에 왕위에 올라 근대 국가의 기틀을 견고히 했던 왕으로 1888년 경에 세운 이 동상엔 합스부륵의 여제답게

 충성을 다짐했던 4명의 장관 기마상과 귀족들의 조각상 가운데 서있다.

 

위 사진 중 上,左 - 마리아테레지아 뒤의 검은지붕인 건물은 박물관(Museums Quartier)이다.

2001년 6월 합스부륵왕가의 마굿간을 개조하여 만든 미술관단지로 미술의 다양한 장르가 망라된 복합 문화관이다.

레오폴드미술관, 현대 미술관, 담배미술숙관 같은 정서 위주의 공간과 건축 전시 및 공연 이벤트 공간, 건축센터, 무용이벤트 공간인

탄츠콰르티에, 어린이 전용극장, 디자인 숍, 카페테리아등 10여개의 독립적인 공간이 단지를 이룬 곳이다.

 

오스트리아 국회의사당

그리스 신전양식을 모델로 1883년에 건립되었으며 합스부르크 왕국이 사라진뒤 지금까지 오스트리아 의회의 본거지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 앞에 있는 아테네브룬넨(Athenebrunnen) 분수는 1902년 카를군트만이 디자인한 것으로, 분수 한가운데에는 지혜의 여신 아테네가 서있다.

 

시청사흰 대리석으로 외벽을 장식한 고딕 양식으로 빈에서 오페라하우스와 더불어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다.

건축가 프리드리히 폰 슈미트가 1883년에 벨기에 브뤼셀 시청사를 모델로 지은 건물로  

5개의 탑이 솟아 있으며 중앙의 탑은 104m나 되는 높은 탑이다. 이 건물엔 많은 인물이 조각되어 있다. 

 

고딕 건축양식인 쌍둥이 첩탑이 인상적인 포티프 교회(Votivkiche, 봉헌 교회). 프란프 요셉 황제의 암살 미수 사건을 감사하여 그 동생 멕시코 황제 페르디난도 막시밀리안이 세운 교회로 1879년에 봉헌된 이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네오-고딕 건축물 중 하나이다. 

 

빈의 중심에 위치한 슈테판성당(Stephansdom)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양식 건물로서, 1147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설을 시작하였고,

1258년 빈을 휩쓸었던 대화재로 전소되었다가 1263년 보헤미아 왕에 의해 재건되었다.

1359년에 합스부르크 왕가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을 헐어버리고 고딕 양식으로 개축하였고,

1683년에는 터키군, 1945년에는 독일군에 의해 많이 파괴되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복구를 시작하여 대부분 옛 모습을 찾았다.

성당 이름은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된 성인() 슈테판에서 딴 것이다.

 

옛 건물이 가득 들어찬 구시가지의 중심부에 있다. ‘빈의 혼()’이라고 부를 정도로 빈의 상징으로 꼽힌다.

공사기간이 65년이나 걸렸으며 건물의 길이가 107m, 천정 높이가 39m에 이르는 거대한 사원이다. 높이 137m에 달하는 첨탑과

25만 개의 청색과 금색 벽돌로 만든 화려한 모자이크 지붕이 눈에 띈다. 보헤미아 왕이 세웠던 '거인의 문'과 '이교도의 탑'도 남아 있다.

  모차르트의 결혼식(1782)과 장례식(1791)이 치러진 곳이며, 빈 시민들은 매년 12월 31일 슈테판대성당 광장에 모여 새해를 맞는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된 성당 정문은 '거인의 문(리젠토, Riesentor)'으로 불리나 규모는 크지 않다. 

성당앞 거리엔 관광객들이 북적대고, 건물이 크고 높아 멀리서 찍지 않으면 한 컷에  다 담기가 힘들다.

 

슈테판 성당 내부. 조명을 사용하여 색이 짙게 나왔다.

건물 내부에는 16세기의 조각가 안톤 필그람이 만든 석조 부조의 설교대와 15세기 말에 만들어진 프리드리히 3세의 대리석 석관이 있다.

그밖에 마리아와 예수상이 있고,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이 매우 아름답다. 지하에는 1450년에 만든 지하유골 안치소 카타콤이 있는데,

페스트로 죽은 사람의 유골 약 2,000구와 합스부르크 왕가 황제들의 유해 가운데 심장 등의 내장을 담은 항아리 및 백골이 쌓여 있다.

 

2차대전 중에도 스테인 글라스를 보호하기 위해 유리창을 떼어 지하 카타콤(지하묘지)에 숨겨두었기에

지금도 중세 건축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조명을 사용하지 않았을 때와 조명을 터트렸을 때의 차이가 크다.

 

구시가지 중심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고딕 양식의 건축물로 꼽히는 빈의 랜드마크 슈테판 성당(Stephansdom).  전체적으로 어둡게 보인다.

 

 

  일부는 가림막에 가려져 공사 중인 곳도 있다.

 

탑의 길이가 길어 위 아래로 나누어 찍어 보았다.

슈테판 성당의 자랑은 하늘 높이 치솟은 137m의 남탑, 시내 어느 방향에서나 볼 수가 있어 애칭으로 '슈테플(Steffl-Old Steve)'라고 부른다.  

 

슈테판 성당의 모자이크 타일 지붕이 인상적이다.

 

 

슈테판 성당 탑에서 내려다본 구시가지 모습으로, 우리는 탑에 올라가지를 않아 타인作을 빌렸다.

 

슈테판 성당 관람을 끝내고 면세점으로 가 물건 구입.

 

 

면세점을 나와 다른 곳으로 이동.

 

 

링가도를 따라 이동하는 트램(전기버스).

 

버스는 성당 앞까지 접근할 수 없어 다른 곳에서 대기하다 태우러 온다.

 

시영아파트에 색체로 리모델링한 훈데르트바서 作, 도심 안에 있는 아름다운 쓰레기 소각장. 우리나라 같으면 감히 어디 도심 안에?

 

오스트리아 빈 부자들이 많이 산다는 19번가를 돌아 점심식사 하러 그린칭(Grinzing) 마을로. 빈에서 약 30분 정도 외곽에 있다.

그린칭마을은 지금은 호이리게(Heurige)로 유명하지만 베토벤이 살았던 곳으로 더 유명세가 있었다고 한다.

 

 원래 호이리게(Heurige)의 어원은 호이어(This Year)로 그 해에 수확한 포도로 만드는 햇포도주와, 그런 포도주를 파는 음식점이란다. 

우리가 찾은 집은 바흐 헹겔(Bach Hengl), 대문 옆에 소나무 가지를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

이 집은 1137년부터 오랜 전통을 자랑하고 한 번에 1400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며 

걸어놓은 소나무가지는 Ausg' Steckt라고 하는데 이는 소나무의 또 다른 뜻이 기다린다에 근거해

술이 만들어지기를 기다린다는 뚯이며, 소나무를 거꾸로 매단 것은 왕이 허가한 식당임을 나타낸다고 한다. 뭐가 이리 복잡하담?

 

대부분의 호이리게(Heurige)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한다. 우기가 찾은 이 집도 섀계각국에서  유명인사들이 많이 찾아왔다며

많은이들의 사진을 걸어 놓았다.  스웨덴 국왕, 소피아로렌, 미국의 클링턴 대통령, 리즈 테일러, 나나무스쿠리의 사진도 보인다.   

 

신선한 샐러드와 화이트 와인, 고기와 햄, 비엔나소시지와 감자구이 등을 각자 접시에 담고, 와인을 마셔가며 먹었데 맛은 대체적으로 짜다.

추석에 햇 곡식으로 지은 음식을 조상님 제사상에 올리듯, 우리나라도 햇 음식으로 관광상품을 만들 수는 없을까?ㅎㅎㅎ

 

점심 식사 후 버스타고  쉔브룬 궁전을 향하여 이동.

 

쉔브룬 궁전 앞 도착.

 

합스부르크(Habsburg)왕가의 여름 별궁으로 사용되었던 쇤부른 궁전(Schloss Schonbrunn)정문 양쪽에 세워진 오벨리스크,

황금 독수리상은 오스트리아 제국의 상징이다.

 

쉔부른 궁전 앞 거리에 펄럭이는 홍보물인 씨씨와 마리아테레지아상.

Sisi는 프란츠 요셉 1세(Franz Joseph 1)와 결혼한 엘리자베스(Elisabeth) 황후의 애칭,

이모의 아들인 사촌 요셉 1세와 결혼한 후 엄격한 시모와의 불화, 남편의 외도, 자식들의 사고사, 자살 등으로 불행하게 살다

스위스 여행 중 극우파에 의해 저격당해 생을 마쳤다고 한다. 뛰어난 외모이기도 하지만 불행한 삶 속에서도

틀에  박히지않은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하며 자신을 가꾸는 모습에 마리아테레지아보다 더 사랑받았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뿐 아니라 유럽의 왕실들이 왕가의 순수한 혈통을 잇기위해 근친혼을 하다보니 '카롤 2세의 주걱턱,

영국 '조지 3세'의 정신착란증세, 혈우병 곱추, 등 근친혼으로 유전병인 기형이나 정신질환을 가진 후손들이 많이 태어났다고 한다.

 

※. 참고로, 마리아테레지아에 대해서는 서유럽 여행 시 오스트리아 인스브룩의 마리아테레지아 거리를 걸으며 황금지붕을 관람했던 2010.06.23 일자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여기서는 생략,  마리아테레지아는 합수브룩가의 대단한 권력의 소유자였다.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1세의 황후,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셉 2세의 모후,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앙뚜아네트의 모후 등 16명의 자녀들을 정략 결혼 시키며 합스부르그 왕가의 세력을 확장, 역사상 가장 넓은 식민지를 보유했다. 

 

정문 쪽에서 바라본 쉔부른 궁전(Schloss Schönbrunn).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도 등재된, 오스트리아 왕조의 최후인 1918년까지도 현역으로 활동한 방 1441개짜리의 거대한 궁전이다.

슈테판 사원과 함께 빈 관광의 양대 핵심. 도심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쉔브룬 궁전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여름 별궁으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 곳에서 궁중 업무를 보았다.

쉔브룬이란 이름은 1619년 마티아스 황제가 사냥 도중 '아름다운 샘 Schonner Brunnen'을 발견한데서 유래한다.

함부르크 제국의 황제가 거주하던 성이며 건축가 Johann Bernhard Fischer von Erlach와 Nicolaus Pacassi 설계하였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의 남서쪽 교외에 있는 합스부르크가의 여름 별궁으로, 합스부르크 왕조 6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곳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를 비롯한 많은 왕들이 이곳에서 정무를 보았고,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했을 때는 나폴레옹군의 사령부로 사용되기도 했다.

 

건축가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를라흐(Johann Bernhard Fischer von Erlach)가 황제의 수렵용 소궁전이 있던 자리에

1696부터 1700년 사이에 쇤부른 궁전을 처음 지었다. 이어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때인 1744년부터 1749년 사이에

니콜라우스 파카시(Nicolaus Pacassi)의 설계에 따라 대대적인 개축이 이루어졌다.

개축 규모가 워낙 커서 애초의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였다. 알력관계에 있던 이웃나라 프랑스에

국력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다분히 있었던 터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 견줄 만한 화려하고 아름다운 궁전이 탄생하게 된다.

궁전은 부드러운 황색의 외벽이 인상적인 거대한 3층 건물로 방이 1441개나 된다. 바로크 양식의 건물에 화려한 로코코 양식의 실내장식을 해 전체적으로 화려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다.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45개의 방을 통해 합스부르크 왕가의 화려했던 과거를 엿볼 수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거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방, 남아메리카산 장미나무 뿌리로 꾸민 방 등 어느 곳이든 일반인의 눈에 호사스럽지 않은 곳이 없다. 사방이 온통 거울로 둘러싸인 ‘거울의 방'은 여섯 살 된 모차르트가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또래였던 마리 앙투와네트에게 어린 모차르트가 청혼을 했었다는 일화가 있다.

 

쉔부른이라는 말은 “아름다운 샘”이라는 뜻으로 역사책에서도 항상 나오는 이름인 합수부르크왕가가 여기서 머물렀다.

앙숙관계인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모방하여 축조하였다고 한다. 합스부르크 최대 전성기였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때 축조되서 지금까지 이어진다. 합스부르크 왕비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여름별장으로 지었고, 이곳에서 1918년 왕권이 무너지고, 공화국으로 선포했던 방이 있다.

 

 

쇤브른궁전과 정원 Palace and Gardens of Schonbrunn

 

궁전 뒤로는 1.7㎢ 달하는 광대한 프랑스식 정원이 펼쳐진다. 화단과 분수, 정교한 조각상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정원은

궁전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정원 끝 언덕에는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세운 일종의 개선문인

글로리에테(Gloriette)가 있다.

아치형의 주랑과 정교한 조각이 일품인 신전풍의 건물 자체도 아름답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궁전과 정원의 전망이 좋기로 유명하다.

 정원에는 이외에도 1752년에 세워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 아치형의 독특한 모양을 한 온실,

1690~1918년까지의 마차가 전시된 궁정마차박물관 등이 있다.

 

궁전 내부 관람시간이 정해져 있어 그 시간 안에 정원을 둘러보는 짧은 시간이 주어져 언덕을 향해 달려갔다.

 

쉔브룬 궁전 정원은 막시밀리안 2세에 의해 1569년 만들어졌으며 건물은 1700년에 완공된 것을 1744~1749년에 증축하였다.

 

아직도 뭔가 공사 중인지 앞이 복잡하다.

 

언덕을 향해 가다 정원쪽에서 바라본 궁전.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쇤부른 궁전.

 

 쇤브룬궁전의 정원(Gardens of Schonbrunn)

맨 꼭대기 정원의 축 한가운데에 글로리에테가 서있다.  건축가는 애초에 전체 궁전이 언덕을 기초하도록 설계하였으나 

마리아 테레지아 황제가 제정적 어려움을 겪게되자 이 계획을 철회하고 언덕 아래쪽에 중심을 두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하였다.

글로리에테는 그녀의 통치 기간 내에 서서히 지어지기 시작하였다.  맨 위에는 챠경의 우리나라 정원양식과 같은 자연풍경식인 영국식,

가운데는 물을 이용한 이태리식, 아래에는 대칭을 이루는 프랑스식 정원양식으로 꾸며져있다. 

 

 

1780년에 만들어진 바다의 신을 상징하는 냅튠 분수(Neptunbrunnen). 이태리 정원양식은 물계단이 특징이다. 

 

 

정원 끝 맨꼭대기에는 1747년 프러시아와 싸워 이긴 것을 기념해 세운 건축물인 글로리에테(Gloriette)가 있다.

언덕 꼭대기 글로리에테를 그레이트 파르테레(Great Parterre)라고 부르는데 신들의 조각상이 열을 지어 세워져 있다.

대개 이 상을 중심으로 이어져 있으며 같은 거리와 기하학적 균형을 고려하여 세워져 있다. 

현재 이곳에는 카페가 들어와 있어 관광객이 찾는 주요 공간이자 빈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꼭대기까지 올라가 빈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 보고 싶었지만 궁전 내부 관람 시간이 촉박하여 더 이상 위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그마저 이곳도 일행 중 걸음속도 빠른 몇 몇만 올라올 수 있었으니 얼마나 댜행인지... 언덕 오르느라 헐레벌떡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정도에서만이라도 정원과 궁전, 빈 시내를 바라 볼수 있는 것으로 만족을 느껴야 했다. 그리고 줄달음으로 궁전을 향하여 내달렸다.

 

건물에서 바라볼 수 있는 맨 앞에는 좌우 대칭을 이루는 프랑스 정원양식.

 

정원 쪽에서 바라본 쇤부른 궁전 . 건물 외부는 황금색으로 치장되어 있다.

 

약속된 관람시간에 맞춰 다시 모여 현지 가이드 설명 듣고 궁전 내부 입장,

  실내에서의 촬영은 금지되어 찍을 수가 없다. 

 

쇤브른 궁전 관람을 마친 후 화장실에 들어서지 숲 속에 와 있는 느낌, 화장실 문에 온통 나뭇잎을 그려 놓았다.

 

쇤브룬궁전의 화려한 내부를 둘러보고 나왔으나 건물 안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눈으로만 볼 수 밖에 없어 많이 아쉽다.  

내부는 18C 후반 마리아 테레지아가 수집한 동양의 자기나 칠기, 페르시아의 세밀화 등으로 우아하고 호화로운 로코코식으로 꾸며져 있다.

총 1400실이 넘는 방 중에서 39실만 공개하고 있는데 특히 6세 때 모차르트가 연주하고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구혼했던

'거울의 방 Spiegelsaal'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비밀 만찬실인 '중국식 작은 방 Chinesisches Rundkabinett' 등이 볼 만하다.

 

합스부르크왕가(Habsburg Haus)는 오스트리아의 구제실(舊帝室)이며 유럽 제일의 명문가(名門家) 이다.

10세기경 알자스에서 북()스위스에 걸친 소영주()에서 비롯되었고

11세기 스위스에 산성 합스부르크(매의 성)를 쌓은 후로 합스부르크백()이라 불렀다.

 

대공위시대() 이후 실력 있는 국왕의 출현을 꺼린 독일 제후()가 1273년 이 집안의 루돌프(1세)를 국왕으로 선출하였다.

이렇게 선출된 왕은 정략결혼으로 오스트리아의 슈타이어마르크주를 획득함으로써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 그의 아들이며

초대 오스트리아공()인 알브레히트(1세)도 독일 국왕으로 선출되었으나, 1308년 암살된 후로 15세기까지 독일 왕위에서 멀어졌다.

그러나 그 동안 가령() 확대정책을 진행시켜 케른텐, 클라인 등을 가령에 병합시키면서 이 집안은 남동() 독일의 대세력이 되었다. 1438년 알브레히트 2세의 국왕 즉위 이후로는 독일의 왕위와 제위()를 계속 차지하였다.

 

15세기 말의 막시밀리안(1세)는 합스부르크가 중흥의 시조로, 에스파 냐왕실과의 통혼으로 가령확대를 꾀하였고,

그의 손자로 황제와 에스파냐왕을 겸했던 카를 5세()에 이르러 지배영역은 최대규모에 달하였다.

카를 5세 이후 제위를 보유하는 오스트리아계()와 펠리프 2세의 에스파냐계로 분열되었다가, 후자는 1700년에 소멸되었다

 

따라서 오스트리아계의 합스부르크는 독일 제위를 보유하고 오스트리아와 그밖의 본령() 외에 헝가리, ·뵈멘 등을 영유()하고,

프랑스의 부르봉왕가()와 대항하는 동방의 국제적 세력이었다. 프랑스와의 대립은 나폴레옹 시대까지 계속되어

나폴레옹과도 시종 적대관계에 있었으나, 결국 패하여 라인동맹 성립을 계기로 신성()로마제국의 칭호를 버리고,

1804년 이후로는 오스트리아 황제라 칭하였다. 19세기에 와서는 프로이센과의 대항에서 패하여 독일 통일의 지도권을 빼앗기고

 독일제국의 세력권 밖으로 밀려났다. 그 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가 패전함으로써

1918년 카를 1세가 퇴위하여 500년에 가까운 황제가()로서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쉔브룬 궁전 관람을 마치고 오스트리아를 떠나 헝가리를 향해 달리게 된다.

 

 

오스트리아에서 헝가리를 향해 달리는 길 양옆은 황량한 벌판으로 이어진다.

 

긴 시간을 달리는 동안 헝가리가 배경인 영화 'Gloomy Sunday(글루미 선데이)'를 감상하며 지루함을 잊는다.

1933년 헝가리에서 발표된 노래의 제목으로, 전세계에서 수십 명을 자살하게 함으로써 '자살의 찬가', '자살의 송가'로 알려져 있다

 

글루미 썬데이 포토 보기 

한 여자와 그녀를 사랑한 세 남자의 비극적 운명을 그린 독일 영화 이다.

 1930년대 헝가리 작곡가 레조 세레즈가 작곡한 이 곡은 악명높다.

이 곡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하여 “자살 찬가” 혹은 “자살의 송가”라는 기괴한 칭호를 얻었다. 

 

자살의 송가’라는 명성에 확신의 마침표를 찍어준 것은 1968년 1월 7일, 작곡가 레조 세레즈의 자살이었다.

그가 자살한 원인은 분분하나, 글루미 선데이의 성공 이후 두 번째 히트곡을 만들 수 없었던 괴로움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죽을 당시, 손가락이 굳어 있어 두 손가락밖에는 쓰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연주하던 카페의 이름은 ‘키스피파 벤데글로’. 작은 파이프 스토브라는 의미다. 평생 그곳에서 피아노를 치며 살았던 그는

그의 음악이 성공을 거두면서 미국으로 가 로열티를 받으며 호화롭게 살 수 있었지만 헝가리에 대한 애국심이 너무 강한 나머지

부다페스트를 떠나지 않았다 한다. 결국 그의 과거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영화 내용은 우측 목록 'Story'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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