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여행

2-1. 둘쨋날 아침 유달산에서

opal* 2013. 7. 21. 21:00

 

둘쨋날 일정

유달산→해양 유뮬 전시관 → 점심 식사 → 목포 개항장 → 목포 특산물 쇼핑.

 

  신안 비치 호텔에서 자고 일어난 둘쨋날 아침, 출발 전.

 

유달산 노적봉 앞 도착. 유달산에 대한 설명을 해주기 위해 오늘 새로 오신 목포 대학 교수님을 소개하시는 강 원장님과 최 ㅅㅎ교수님.

 

 

고 김 대중 전 대통령 의 휘호가 쓰인 시민 종각.

 

 

유달산에는 전남 유형 문화재 제 299호 목조지장보살 반가상(木造地藏菩薩 半跏像)과

전남 유형문화재 제 228호 목조 아미타 삼존불상이 모셔져있는 달성사를 비롯하여, 유달산 산신역할을 했던

미륵불이 모셔져 있는 보광사 등이 있고, 산신제를 지내던 재단과 조성시기를 알 수 없는 커다란 마애불 등이  있다.

 

유달산에는 대학루, 달선각, 유선각, ·관운각, ·소요정,  팔각정 등 6개의 정자가 있다. 

 

노적봉.

노적봉은 해발 60m의 바위산에 불과하지만 왜적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의 호국혼이 담겨있다.
정유재란 때 12척의 배로 불가능해 보였던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전열을 재정비 하는 동안
유달산 앞바다에 왜적의 배가 진을 치고 조선군의 정세를 살피고 있을 때 이순신 장군은 노적봉을 이용하여 위장 전술을 펼쳤다.

 

노적봉은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적은 군사로 많은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유달산 기슭의 노적봉에 이엉을 덮어 낟가리처럼 만들어 아군의 군량미를 많이 쌓아둔 것처럼 위장하였다.

또 영산강에 횟가루를 뿌려 군사들이 밥을 해먹는 쌀뜨물로 보이게 하여 우리 군사가 엄청나게 많은것처럼 속여

왜적으로 하여금 미리 겁을 먹고 도망가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구한말 무렵 유달산의 한지 이름에 선비 유(儒)字가 사용되면서부터 어감에 유교적인 느낌이 강해졌지만,

실제는 불교관련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쥐바위와 탕건 바위.

 

 

 

 

 

포를 쏘아 정오를 알리던 포.

 

유달산 중턱에 대학루(待鶴樓)라는 정자가 있어 학으로 변한 세 처녀의 혼백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으나 

육지로 변한 삼학도는 학의 귀환은 어렵지 않을까? 만약 돌아온다고 해도 그 학이 깃들일 만한 안식처도 없고,

또 그들이 사모하던 청년도 사라진지 오래이니 그저 슬픈 전설로만 기억할 수밖에 없겠다.

 

대학루에서 바라본 전경. 좌측으로 삼학도가 보이고, 구 일본 영사관이 보인다.

 

아래 사진은 위사진 우측으로 연결된 모습이다.

 

시민 종각 뒤 멀리 영산강 하구도 보인다.

 

붉은 벽돌의 일본식 건물이 조망되는 구 일본 영사관.

 

일본인 들이 많이 살았던 지역은 신작로가 넓고, 건물도 크다.  

그곳에는 일본의 침탈과 지배를 증거하는 영사관과 동양척식 건물 등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동양척식 건물은 역사박물관으로, 일본절(동봉원사)은 문화센터로 탈바꿈했다.

 

대학루에서 조망되는 일본식 정원 이훈동 정원과 성옥 기념관. 우측으로 녹색지붕은 일본시대 초등학교 건물이고, 옆 큰 건물은 강당 이었다.

 

조망되는 삼학도와 구일본 영사관.

목포 최초의 서구적 근대 건축물로 당시 중국 시아먼에 있는 영사관과 함께 일본 재외 영사관으로 쌍벽을 으루었다고 한다.

현재는 근대역사관으로 활용하기 위해 준비중이다

 

노래비에 얽힌 비화를 설명하시는 최 교수님.   

 

노래비에 있는 가사를 고치는 바람에 돌에 흠집이 나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4년, 조선일보와 OK 레코드는 민족정서 고양을 위한 노래를 만들자며 의기투합한다.

조선일보를 통해 노랫말을 공모, 3000여 통의 가사 응모  중 당선된 시가 '문일석'이라는 목포의 한 문학청년이 응모한 '목포의 눈물'이다.

 

민족의 정서를 짙게 담아내는 노랫말인데다가, 남도의 한을 담은 이 난영의 애절한 목소리에 일순간 민족의 노래가 된 것이다.

나라잃은 슬픔을 달래는 노래, 이 노래가 유행하자 일제가 가만 있을 리 없었다.

그러나 노래 자체를 막을 수는 없어  노랫말에 나오는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이라는 귀절을 꼬투리 잡았다.

 

'삼백년 원한'이 무었이냐? 는 거였다. 삼백년 전의 원한이라면... 그건 바로 임진왜란을 가리키는게 아닌가 말이다.

일제는 이를 핑계로 즉각 레코드 판매를 금지시켰다. 노래가 고사하기 직전, 작곡가 손목인이 재치를 발휘하여 노래를 살려냈다.

'삼백년 원한'은 자신이 작곡 과정에서 실수한 거리며 '삼백년 원앙'으로 고친 것이다. 

 

이런 소문이 알려지자 이 노래는 더욱 무서운 기세로 번지기 시작했고, 이 난영은 일약 스타 중 스타가 되었다.

그러나 이 시를 쓴 문일석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거금이 걸린 시상식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자신의 노래가 삼천리 방방곡곡에 울려퍼져도 그는 모습을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그 시 한편을 남기고 영원히 종적을 감춘 신비의 문학청년이 된 셈이다.

 

노래가 슬펐던 만큼 이 난영의 운명도 슬펐다. 아버지의 술주정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제주로 식모살이를 떠났고,

당시 10살이던 이 난영은 솜공장에 다니며 학교를 다녔다. 그러다 4학년이 되자 엄마가 그리워 학교를 그만두고 제주로 갔다.

그곳에서 주인집 아이를 봐주면서 밥을 얻어 먹었다. 이 난영의 콧소리, 비음이  나오는건 아이를 봐주며 흥얼거리던 콧노래 때문이었다고. 

 

김 해송과 결혼 후에는 남편의 바람기와 8명의 자녀를 돌보느라 가슴을 쓸어야 했고,

이어 김 해송마저 월북을 하는 바람에 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쓸쓸히 눈을 감아야했다.

 

당시 목포에서 레코드 가게를 하던 사람 중에 박옥주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노래가 히트를 치자 그는 큰 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을 보람있게 쓸 방법이 없을까 하던 그는 '목포의 눈물 노래비'를 세우자고 했다.그당시엔 노래비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는 사제를 털어 목포 유달산 중턱에다 문 일석과 이 난영을 기리는 노래비를 세운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노래비였다.

지금도 삼학도와 다도해가 내려다 보이는 그 산자락 노래비 앞에 서면 이 난영의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   *    *   *   *  

 

김 해송과 그악단이 목포에서 공연 할때  가수 되기가 소원이던 18세 아리다운 시골 처녀가 악단을 찾아왔다.   

청춘고백. 이별의 부산정거장 등을 불러 히트한 당대 최고의 청년 미남가수 남인수를 만났다  
  남인수는 이처녀를 보자마자 부드러운  분위기와  미모를 갖춘 이 여자가 바로  내여자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김 악단장에게 오디션을 부탁,  이 난영이란 예명으로 악극단 일원이 되어 
지방순회공연을 하게 되었고, 

울어라 문풍지야 . 목포의눈물 . 목포는항구다. 등 수많은 노래을 히트시키여 만인의 애인이기도 하였고 

갈수록 남인수와 이 난영의 인기는 상승하였고 사랑도 깊어 갔다
  
  알다가도 모를게 인연이며 운명인가 보다  당시사람들은 이들의 이별이란 상상도 못했건만 

운명의 여신은 이들의 사랑을 시셈이나 한듯  악단장의 끈질긴 구애을 뿌리치지못한 이난영은 악단장과 결혼하고 말았다. 

이에 분개한 나머지 남인수는 일본으로 건너가 유랑생활로 세월을 보냈다 
  
6.25사변으로 김 악단장은  납북되여  영영 소식이 두절되었고  이 난영은  딸 셋을 키우며 고생하며 어렵게 살았다
  이소식을 들은 남 인수는 중년이되어 일본에서 돌아와 이 난영 자녀 5남매를 키워 '김씨스터'란 보컬그룹을 만들었고,  
  이들은 후일에 미국에 가서 활동하였다
   
남 인수와 이 난영은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새로운사랑을 펼치며
잠시나마 꿈같은 신혼생활을 하였다  

가수 남 인수.. 그는 1 세기에 하나 나올가 말가 하는 가요계의 황제로 존재한다.

그의 애절한 사연은 이루 말 할 수 없지만 그가 마지막 운명 할때 이 난영이 부르는 애수의 소야곡을 들으며 눈울 감았다고 한다.

한맺친 피를 토하며 노래부르다 쓰러진 남 인수는 이 난영의  정성스런 간호를 받으며 행복하게 눈을 감았고

이 난영도 오열 속에 몸부치다가  세상을 하직 하였다
  
좋 은아버지.
좋은 남편  명성과 부를 누릴수있는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도 남 인수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그 숱한 여인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풍파도 많았지만 죽음을 앞둔 그는 예견이라도 한 듯 이 난영을 지우고

다시 원래의 아내 김 은하와의 사랑을 찾는다.

가수 남 인수씨가  선택한  길은  비련의 길이였던가 아니면...  영광의 길이였던가 ... (퍼온 글)

 

달선각.

 

시간이 부족하여 이등봉이나 달성사까지 가 볼수는 없고, 계곡 바람이 불어오는 쉼터에서 설명만 들었다. 

 

달성사는 2000년 12월 13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목포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유달산의 남동쪽 중턱에 있는 달성사는 1913년 노대련(盧大蓮) 선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명부전(冥府殿)에 봉안된 목조 지장보살반가상은 1565년(명종 20) 남평(南平) 웅점사(熊岾寺:지금의 나주 雲興寺)에서 조성하였다는
조성 발원문(13×143㎝)이 남아 있다.

불상의 자세는 오른쪽 다리는 아래로 내리고 왼쪽 다리는 의자에 걸친 유희좌(遊戱坐)로, 민머리, 눈과 눈썹, 코와 입 등의
조각수법이 사실적이다. 크기는 전체높이 141㎝, 좌상높이 110㎝, 머리높이 23㎝, 어깨너비 37㎝, 무릎너비 57㎝이다.

지장보살의 오른쪽에는 무독귀왕(無毒鬼王), 왼쪽에는 도명존자(道明尊者)가 협시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에 조성되어 남아 있는 반가상 가운데 국내에서 유일하며, 조선 초기의 불교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2001년 현재 달성사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목포 달성사(木浦達聖寺) 목조지장보살반가상(木造地藏菩薩半跏像)은 2000년 12월 13일 전라남도유형문화재 제228호로 지정되었다.

 

생긴 모양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 바위들.

 

이등봉 바위와 주변.

 

이등봉 아래 조선인들이 살았던 곳은 일본인들이 살았던 지역보다 건물도 작고, 길도 좁아 복잡하다.

 

일등바위 오르기 전 마당바위 아래에서 이등바위로 가는 갈림길이 있다.

 

마당바위에 세워진 전망 안내판.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고하도.

 

 

 

마당바위에서 조망되는 모습. 고하도가 무척 길어 뵌다.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목포대교.

 

고하도 뒤 넓은 부지는  새로운 항만이 들어설 예정 이다. 

 

학의 이미지를 살려 만든 목포대교 주 탑.

 

섬이었던 삼학도는 육지가 되고.

 

목포 시가지,  위 사진 우측으로 아래  사진이 이어지는 모습이다.

 

 

위 사진 우측으로 아래사진이 이어지는 모습으로 삼학도가 가까이 보인다.

 

소삼학도 건너편으로 여객터미날이 보인다.

 

위 사진들로 부터 우측으로 우측으로 이어지는 모습이다.

 

고하도와 항만이 들어설 배후지.

 

마당바위는 일등바위 아래 위치하며 

목포 시내와 다도해 경관,  목포 대교를 사이에 두고 부지런히 드나드는 크고 작은 배들을 볼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목포 대교를 배경으로. 올라올땐 더워서 땀을 많이 흘렸으나 목포대교가 조망되는 마당 바위에선 바람이 얼마나 세고, 시원하던지...  

 

사진 찍히는 동안 배 한 척이 대교 아래로 항해 중이다.

 

마당바위에서 바라본 유달산 일등 바위(해발 228m),  일본 사람들이 산을 낮게 표현 하느라 1, 또는 2라는 숫자를 써서 이름을 붙였다.

 

유달산에 펼쳐진 종교전쟁, 사진에 보이는 불상은 일본 불교의 수호신인 홍법대사(○안)와 부동명왕(좌측 노란색)상 이다.

 

1897년 목포가 통상항으로 개항 하면서 일본인들의 불교가 목포에 유입되었다.

일본 불교의 상징인 홍법대사(弘法大師)상과 그 수호신인 부동명왕상이 1931년 유달산 일등봉 경사면에 위치하게 된 것도

일본의 불교가 목포에서 성행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목포에 들어온 일본 불교의 종파 중 하나는 '진언종'인데 유달산에  조성된 홍법대사(774~835)는 일본 진언종의 창시자 이다. 

그는 9세기 초 당나라에서 수행을 마치고 일본에 귀국하여 여러 곳을 순례하며 불법을 전파한 일본 불교의 선각자로 칭송을 받고 있다.

 

 유달산 바위에 조각되어 있는 모습을 살펴보면 홍법대사가 의자 위에 가부좌을 하고 앉아 있고, 좌측에 '홍법(弘法)'

우측에 '대사 (大師)'라고 새겨져 있으며 의자 아래 부분에 신발, 병 등이 조각되어 있으나 마당바위에선 잘 안보인다.

 

부동명왕(不動明王)상,  모든 번뇌와 악마를 굴복시키기 위해 분노한 모습을 하고 있는 존(尊).

 

일등봉 바위의 바로 아래쪽에 위치한 부동명왕상은 홍법대사상 좌측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유달산의 바위에 새겨진 부동명왕은 불법을 수호하는 5대 명왕 중 하나로 철퇴를 들고 있는 모습 위에

'부동명왕(不動明王)'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홍법대사가 모셔진 공간에 부동명왕이 함께 조성되는 사례가 많은데,

중국유학 후 일본으로 돌아올 때 큰 풍랑을 만난 홍법대사를 부동명왕이 지켜줬다는 설화에서 기인한다.

 

5대존명왕(五大尊明王)의 하나. 부동존(不動尊)ㆍ무동존(無動尊)이라고도 한다.

대일 여래가 모든 악마들의 항복을 받기 위하여 몸을 변하여 나타낸 형상이다.
그 형상에는 2비상(臂像)ㆍ4비상ㆍ6비상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보통 2 비상으로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왼손에는 삭(索)을 잡았고

이마의 머리카락을 왼쪽 어깨에 드리우고 부릅뜬 눈과 뾰족한 어금니에 윗입술을 깨문 무서운 분노신(忿恕身)을 하고 있다.
불길(맹염,猛炎)이 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악마를 박멸하는 위력을 나타낸 것이다.

 

 

기사 관련 사진

 

 

이등봉과 소요정. 온김에 모두 돌아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부족하여 갈 수 가 없었다.

 

이등봉 바위 중에 장미꽃을 닮은 바위가 보인다.

 

압해대교.

 

신안 군청은 압해도로 이전 되었으나 전에 사용되었던 건물 지붕엔 아직도 글씨가 남아 있다.

 

 

 

전에는 유달산에 오르면 멀리 보이는 바다와  다도해 조망 감상, 특이하게 생긴 바위 모양 바라보며 신기하게만 생각했는데

이번엔 하나 하나 설명을 듣고보니 목포의 역사에 대한 산 교육장이란걸 느끼게 된다. 유달산은 목포를 대표하는 명물임에는 틀림없다.

유달산에서 내려오며 촬영기사님으로 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았는데 말을 조리있게 하질못해 방송에 나올지는 미지수이다.

어제 삼학도에서 카누 탈 때 도와주셨던 분이 잡지사 편집장님인 줄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다. ㅎㅎ

 

 

유선각(儒仙閣),  유달산(儒達山, 228m) 중턱에 있다.

목포의 최고 전망대로 알려진 정자로 목포항과 목포 시가지, 삼학도, 영산호, 다도해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1932년 목포 개항 35주년을 기념하여 세웠다가 태풍으로 인해 무너져 중건하였고,
중건한 건물도 퇴락하자 1973년 8월 1일 옛 모습 그대로 개축하였는데 원래는 목조건물이었으나 현 건물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전통적 건축양식을 갖춘 누각(樓閣)이다.

 

한말의 유학자로 시문에 능했던 무정 정만조(鄭萬朝 1858~1936)를 비롯한 많은 선비들이

유달산에서 시회(詩會)를 열고 시를 읊었던 곳이라 하여 유선각(儒仙閣)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다.

누각 전면에 걸린 현판의 글씨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해공 신익희(申翼熙 1894~1956)가 유달산에 들렀다가 기념으로 남긴 것이다.
유선각 앞쪽 암반에는 1973년 개축 때 세운 유선각 표비가 있다

 

봉이 김 선달 대동강 물을 팔듯, 유달산을 일본인에게 팔은 정 봉주가 있었다.

국민대 초대 학장을 지내신 신익희(申翼熙) 선생은 국민대학을 세울 때  돈이 없어 정 봉주를 찾아간 일이 있었다고 한다. 

  해공 선생은 1956년 자유당 시절 민주당 대표로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로 3대 대통령 후보(부통령 후보 장면)로 나서기도 했었다.

그러나 투표 열흘 전 지방 유세에 나선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서하여 국민장으로 치루었다.

 이 시기에 유행했던 가요가 "비내리는 호남선(손목인 작사, 박 춘석 작곡) 이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내리는 호남선에    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다시 못올 그 날짜를 믿어야 옳으냐    속는 줄을 알면서도 속아야 옳으냐
죄도 많은 청춘이냐 비내리는 호남선에    떠나가는 열차마다 원수와 같더란다

 

 

정오에 포를 쏘아 시간을 알리는 것으로 후에 사이렌으로 바뀌었다. (사진을 클릭하면 글자를 조금 크게 볼 수 있음)

 

일등봉에서 내려오니 때마침 오포 체험행사가 준비 중에 있다.  오포는 1986년 재방문화재 자료로 지정하여 정오에 행사하고 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행사 관람 후 하산.

 

 

 

 

유달산에서 내려와 다음 코스인 해양 유물전시관으로 가는 길에 창 밖으로 보니 상가나 주택 바로 앞에 전에 사용하던 철로가 그대로 있다.  

어제 저녁에 본 바다 분수도 좋고, 외관이 화려한 건물도 좋지만 서민들의 생활에 불편함을 보살펴 주는게 급선무 일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