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연안여객 터미날 맞은 편 삼학도에 있는 계류장에서 출발하여 목포대교까지 갔다가 턴하여 돌아오는 요트 세일링 끝내고 하선.
요트 세일링 마치고 바다에서 나와 작은 요트에 탄 사람들 도착하기 기다리는 동안 바다가 보이는 분위기 좋고 냉방시설이 잘된
카페에서 잠시 냉커피 한 잔의 여유를 갖는다. 마리나 옆에 있는 이 건물은 목포 개항 년도와 같은 1897년에 지어졌다고 한다.
목포대교 아래에서 요트를 즐기고, 이번엔 고하도를 가기위해 해안가로 달려 목포대교 위를 달리게 된다.
학이 날개짓하는 착시현상을 느낄 수 있다는 3Wey 케이블 공법은 앞 좌석이 아니라 옆으로 내다보니 케이블만 휙휙 지나간다.ㅎㅎㅎ
차에서 내려 고하도 땅을 밟는다, 목포에 몇 번 왔었지만 고하도가 있는 것 조차 모르고 있엇으니...
살아가며 자신의 무지를 느끼는 순간 순간이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더 살아야 다? 알 수 있을까?
고하도(高下島)는 "높은 산(유달산) 밑에 있는 섬"이라 하여 고하도(高下島)라 불린다.
예전에는 보화도(寶化島), 고하도(高霞島), 고하도(孤下島), 비노도(悲露島), 칼섬 등으로도 불려 왔다
1963년 무안군 이로면이 목포시로 편입되면서 달리도, 외달도 등과 함께 충무동에 편성되었다.
서해안과 남해안이 만나는 목포 시내에서 남서쪽에 위치한 섬으로 반달 모양이며, 동쪽으로 영산강 하굿둑과 마주하고 있다.
섬 전체가 낮은 산지(고도 77m)이고 북동쪽 사면은 비교적 경사가 급하고 남서쪽 사면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해안으로 이어져 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에 의해 전략지로 활용되어 왜적의 침투를 막아낸 곳으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충무공기념비(도 문화재 제39호)가 있다.
어 또한 이 지역을 이충무공유적지(지방기념물 제 10호)로 지정하여 충무공의 뜻을 기리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일본 수군을 크게 물리친 뒤 함대 정비를 위해 108일간 주둔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인근에 다도해 여러 섬을 끼고 있고, 목포 앞바다 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용머리 부분은 목포항의 자연 방파제 역할을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의 병참기지와 연합군 폭격을 피하려는 무기를 숨겼던 인공 석굴 11곳이 있다고 한다.
고하도와 북항을 잇는 목포대교가 2012년 6월에 개통이 된 이후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키가 큰 해송이 노목 같으면서도 싱싱 해뵌다. 이순신 장군이 주둔 시에는 이 소나무로 전선을 고치기도 했다고 한다.
언덕을 오르며 모충문을 들어서기 전 홍살문미 먼저 보인다.
비문을 지은 약천 남 구만 선생은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해놈은 상기하니 일었느냐 재 넘어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뇨>라는 시조를 지은 분이다.
모충문 안으로 모충각이 보인다.
충무공 유허비를 모신 모충각.
모충각 문이 잠겨 있어 문살 사이로 비문을 찍어 보니 비석 전면 전체에 비문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모충각 안에 있는 충무공 유허비.
비석의 아랫부분은 일제 감정기때 일본인들에 의해 뿌리가 뽑히고 총탄 연습을 하여 흔적이 남아 있다.
모충각 안에 걸린 유허비 비문의 해설판. ▲ 위사진을 클릭하면 글씨를 크게 볼 수 있음
모충각(慕忠閣)은 군량미가 많이 쌓인것 처럼 보이는 유달산 노적봉과 마주하고 있다. 임란 시에는 고하도 앞 바다에 전함이 줄지어 있었다.
열심히 설명해주시는 강 원장님.
1597년 10월 29일, 충무공 이순신은 배 열 두척으로 일본 수군을 대파, 해전사에 빛나는 명량해전 직후 이곳에서
바닥난 전력(戰力)을 재정비하기 위해 108일 동안 주둔하며 군사와 군량미를 다시 확보했다.
이듬해 퇴각하는 왜군들을 끝까지 섬멸하려는 충무공의 의지이다.
열강하시는 교수님과 열공하는 학생?들.
위 사진엔 우측 위사진 맨우측 흰 화살표. 아래 사진엔 맨 앞 원 안이 본인.
강연 들은 후 단채 기념을 남긴다. 다음날 뉴시스에 나온 사진 캡쳐.
충무공 비각을 둘러보고 나와 우측 솔밭 사이 오솔길로 내려딛으니 무화과 밭이 보이고, 그 속에 비석이 세워져 있다.
우리나라 면화 재배는 고려말에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씨앗을 가져왔다는 것은 국민학교 때 배워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1904년 일본이 면화(목화)씨를 가져와 이곳 고하도에 심었다.
남미가 원산지이며 미국 등에서 재베되던 종으로 품질이 좋은 것인데 일본에서는 기후가 적합치 않아 실패했다.
당시 목포 주재 영사로 부임한 와카마쓰 우사부로(若松兎三郞)가 한반도 남부지역의 기후 풍토가 육지면 재배에 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미국종 육지면 종자를 입수해 목포 고하도에서 시험재배해 성공했다. 이것이 계기가 돼 한반도에서 육지면재배가 시작됐다.
목포 고하도는 한반도 육지면의 발상지가 됐다. 와카마쓰 영사는 한국에서의 육지면 재배가 산업발달에 도움이 되고
일본 방직원면의 공급처가 된다면 일거양득이라고 일본 정부에 보고했다.
1905년에 도쿄에서 하라 다카시(原敬) 전 총리를 비롯한 정계 관계 산업계의 저명인사가 면화재배협회를 창설했다.
이듬해 통감부권업모범장이 수원에 설치됐으며 목포출장소가 개설돼 전국에서 면화장려 사업이 전개됐다.
일제 시대 때 우리나라에 육지면 면화가 제일 먼저 재배되었던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 뒷면 이다.
쌀,소금, 면화는 목포의 '삼백(三白)'으로 그 당시 교역항이 목포항 이었다.
해방 후 일본의 흔적을 기분 나쁘게 생각한 지역 주민들이 밭두렁 구석에 버린 것을 후대 사람들이 다시 세워 놓았다.
‘식민지 역사도 역사' 이기에.
유년 시절엔 면화를 많이 심었었다, 면화꽃이 피기 전 열매처럼 생긴 동그란 어린 송이를 따 입에 넣고 씹으면 달착지근 했다.
어른들이 나무로 만든 기구를 돌려가며 면화씨를 빼고, 물레질하며 실을 뽑는 것도 보고 자랐다.
손수 심어 수확한 목화 솜을 모아두었던 모친께선 딸들을 시집 보내며 두툼한 이불을 두 벌씩이나 만들어 주시기도 하였다.
고하도를 둘러보고나니 역사의 섬 이었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이 군량미를 비축해 두었던 고하도,
멋대로 굽어 늘어진 해송을 보니 이 섬은 아직도 옛 정취가 남아있는듯 하다.
고하도의 탕건바위에는 샘처럼 생긴 깊은 굴이 있는데, 여기에는 옛날 힘센 장수가 금은보화를 숨겨 두었다는 설과
한 궁녀가 숨겨둔 곳이라는 설이 함께 전해 온다.
고하도에 가뭄이 심해지면 '탕건 바위 놀이'로 기우제를 지냈다. 비를 내리지 않으면 금은보화를 파내고 말겠다는 위협(威脅)을 하기도 한다.
돼지를 잡아 제물로 바치며 "양반의 탕건에 돼지 피가 흐르는 것을 큰비를 내려 그 빗물로 말끔히 씻어주사이다"
"만약 비를 내리지 않으며 탕건바위 밑에 숨겨진 금은 보화를 파내겠습니다" 이때 농악을 울리며
큰 줄로 탕건바위에 걸어 끌며 매김 소리에 맞춰 줄꾼들이 설소리에 맞춰 줄을 끄는 것이다.
의식이 진행되면서 각 절차마다 노래가 불린다. 먼저 제주가 기원을 한 뒤 농악을 울리면서,
“(앞소리)얼얼러 상사듸어/(뒷소리)얼얼러 상사듸어//(앞소리)비야비야 내려라/(뒷소리)얼얼러 상사듸어//
(앞소리)비가오시지 않는다며는/금도캐고 보화도캐네/(뒷소리)얼얼러 상사듸어//(앞소리)나랏님이 숨겨놓은/
금칼보화 찾아다가…….”라는 노래를 메기고 받는 선후창으로 부른다.
또, 제물로 바친 돼지의 피가 바위를 적시게 되면 “……(앞소리)피를보소 피를보소/(뒷소리)얼얼러 상사듸어//
(앞소리)비내려서 저피닦소/(뒷소리)얼얼러 상사듸어//(앞소리)비안오면 모두죽네/(뒷소리)얼얼러 상사듸어//
(앞소리)비야 비야 많이 오소…….” 등 비가 오기를 기원하는 의식과 함께 노래를 부른다.
노래가 끝나면 모닥불을 피워 탕건바위를 묶었던 밧줄을 태운다. 모닥불에 태운 재를 담아 논밭에 뿌리고 놀이는 끝난다.
탕건 바위를 묶었던 밧줄재는 풍년을 들게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탕건바위 전설과 보화를 좀 더 오래 간직하려면 너무 빨리 개발이 되지 않아야 하는데,
목포대교가 건설된 지금은 새로 항만을 만들기 위해 넓은 부지를 확보해두고 있는 모습이 차창 밖으로 보인다.
고하도 탐방을 끝내고 대 삼학도 이 난영 공원으로 향한다.
목포역~삼학도 입구~삼학부두를 연결하던 인입철도(1.8㎞)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채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
1965년 설치돼 1966년부터 면화와 쌀, 석탄 등을 수송했던 철도로 삼학도 복원화 사업으로 한국제분 등이 타지역으로 이전하고,
고려시멘트도 석탄수송 방식을 2012년부터 육로 수송으로 전환하면서 철로의 기능을 상실했다.
섬이었던 삼학도는 육지화 되었다.
삼학도 중 제일 큰 대삼학도엔 목포를 대표하는 인물 고 이 난영씨 이름을 따서 '이 난영 공원'을 조성하고 노래비를 만들어 놓았다.
노래 중 '목포의 눈물'은 1934년 조선일보가 공모한 향토 노래 가사 당선작 이다. 우리나라 수목장 1호인 '이 난영 나무'가 이 공원에 있다.
버튼을 누른 후 노래가 나오니 강의 듣던 탐방객들이 작은 소리로 따라 부른다. 너무나 오랫동안 귀에 젖었던 노래이다.
"다도해 명소화사업"을 위해 한가지라도 더 알려주려고 열강을 하시는 원장님과 각기 편한 자세로 앉아 열심히 청취하는 탐방객들.
열강하시는 원장님 강의내용을 바위에 앉아 메모하다 몰카에... 딱 걸렸네...
'목포는 항구다'를 작곡한 이 봉룡은 이 난영의 오빠로 납북. 강의하시는 원장님과 이름만 똑같다.ㅎㅎㅎ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 이 난영씨를 기념하는' 이 난영 공원'은 쾌적한 녹지공간과 시민 편의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앞에 보이는 부두에는 아직도 석탄이 쌓여 있다고 한다.(녹색 가림막)
세 마리 학이 내려앉은 전설의 섬, 삼학도. 이난영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목포는 항구다’, ‘목포의 눈물’ 노래가 흘러나온다.
대삼학도 이 난영 공원에서 내려와 중삼학도 앞으로 이동.
삼학도는 주변을 메꾸어 육지화 시키더니 지금은 둘레에 수로(水路)를 만들어 섬 모양으로 복원하여 카누를 탈 수 있게 했다.
줄지어 쉬고 있는 카누의 모습이 마치 삼칸 대청 마루 앞 댓돌 위 여자 고무신 처럼 나란히 나란히...ㅎㅎㅎ
삼학도는 10년간 메꾸어 육지화 시키더니 다시 섬으로 만드느라 10년을 공사, 둘레에 수로를 만들어 카누를 즐기란다.
전남 목포시 영해동에 있었던 삼학도(三鶴島)는 연륙(連陸) 및 간척공사(1968∼1973)의 완공으로 현재는 내륙과 이어졌다.
무안동 남동쪽에 위치하며 최고점은 높이 73m로 낮은 산지인 대삼학도, 중삼학도, 소삼학도로 구성되었으며 서로 연결 되었다.
현재 삼학도 자리에는 항만청·해양경찰대·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 등의 정부기관과 한국냉동·호남제분 등의 기업들이 있다.
이 섬은 본래 목포진의 시지(柴地)로서 목포진에 땔감나무를 제공하던 섬이었다.
1897년 목포항이 일본인에 의해 개항되자 섬에도 사람이 살게 되고, 1928년 유달산이 공원으로 지정되면서 관광객이 오기 시작했다.
1950년대 목포항이 좁아서 대형 선박의 정박이 어려웠기 때문에 신항 공사를 착수하면서 크게 변하였다.
1962년에는 이로면 입암리와의 사이가 매립되어 완전히 섬으로서의 모습을 잃어 버렸다.
목포 앞바다에 떠 있는 삼학도(三鶴島)는 학으로 변신한 세 처녀의 혼이 깃들여 있다.
「삼학도전설」은 옛날 무예를 익히려는 한 장사의 비장한 각오가 담긴 이야기이다.
<유달산에서 한 젊은 장사가 무예를 닦고 있었다. 절벽 같은 암벽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바위와 바위 사이를 건너뛰기도 하고,
활로 날아가는 새를 쏘아 떨어뜨렸으며, 큰 칼로 호랑이의 숨통을 끊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아침마다 마을에서 올라와 물을 길어가던 세 처자가 이 늠름한 장사의 모습에 연정을 품게 되었고,
장사 역시 날마다 마주치게 되는 그녀들에게 마음이 끌려 무예를 닦을 수 없었다.
장사는 무예수업을 마치기도 전에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몹시 자책하면서 마음을 굳게 다져먹었다.
하루는 산에 오른 세 처자에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면서 “당신들을 사랑하게 되어 혼란스러워진 마음에 무예를 익힐 수 없으니
수업이 끝날 때까지 멀리 떨어진 섬에 가서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 말을 들은 세 처자는 어느 맑은 날 돛단배에 몸을 싣고 먼 섬으로 향하였다.
이 광경을 숨어서 지켜보던 장사는 ‘세 처자가 살아 있는 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유달산에서 배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천하장사의 화살을 연거푸 맞은 배는 두 동강이 나면서 목포 앞바다 한가운데 가라앉았다.
그러자 그 자리에 세 마리의 학이 솟아오르면서 슬픈 울음을 남기고 하늘 높이 날아갔다.
곧이어 세 개의 바위가 솟아오르면서 섬이 되었는데 이것이 삼학도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삼학도를 보면 이런 전설이 느껴질까?
카누를 타기에 앞서 교관으로 부터 교육 중.
늘 헷갈리던 것을 이번에 확실하게 입력시켜 보지만 얼마나 기억을 하고 있을지...
'패들이 양날이면 카약, 외날이면 카누.' 들을 때마다 입력시키는데 자꾸 잊는다.ㅎㅎㅎ
카누는 계곡같은 좁은 장소에서 타고, 카약은 넓은 장소에서 탄다고 하니 뉴질랜드 트래킹 끝내고 보트로 이동 중에 본 카약커들 생각이 난다.
같이 온 일행은 패들 젓기 자신 없다며 구경하다 버스로 가고, "카누는 타고 싶은데 짝꿍이 없다"고하니 스댑진 중 한 분을 연결 시켜주었다.
팔과 다리로 조심 조심 균형 맞추며 올라탄 후 뒷사람과 호흡 맞추며 노를 저었다. 이런 저런 얘기도 나누며.
앞 사람은 방향에 따라 패들을 좌 우측으로 바꿔가며 짓기만 하면 되고, 뒷자리에 앉은 사람이 잘 해야 한다.
다음날 뉴시스에 나온 사진 캡쳐.
카누를 다 타고 나오니 해가 뉘엿뉘엿.
저녁식사를 위해 여름철 보양식인 민어의 거리로. 영란 횟집은 목포에서 가장 유명한 민어 요리집 이란다.
양은 많지 않지만 살짝 데친 껍질과 부레까지도 별미인 민어, 육질이 부드러운 민어회와 전라도 소주 잎새주를 마셔 보았다.
저녁식사 메뉴는 목포 5味 중 두 번째 맛인 민어 요리, 여름 보양식 이다.
얼큰한 무침, 따뜻한 전, 매운탕까지 입에서 살살 녹는 민어로 배를 채우고나니 피로가 몰려 온다. 새벽 세 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나섰으니...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네온이 도심을 밝히고 있다.
오늘 일정 스케쥴이 아직 남아 있어 평화의 공원 분수가 춤추는 바닷가로... 분수 감상 후 갓바위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우리나라에 강물이나 호수에서 분수공연 하는 곳은 많지만 바다에서 공연하는 건 목포 한 곳 뿐으로 우리나라 최초라고 한다.
분수쇼는 하루에 두 번 공연된다.
더위를 피해 나온 목포 시민들 사이에 끼어 앉아 양 옆으로 늘어 앉은 관중들 모습을 담아 보았다.
보름을 이틀 앞 둔 열 사흘 밝은 달과 무수히 떠있는 별들과... 노래라도 부르고 싶은 분위기,
레이져와 물의 쇼를 알리는 오픈 음악은 싸이의 노래와 춤추는 모습으로 시작.
앞자리에 앉으려다 물방울들이 날아와 얼굴과 옷을 적시며 카메라에 묻기에, 염분섞인 바닷물이라 뒷자리로 옮겼더니 앞 사람이 찍힌다.
똑같는 장면이 한 번도 없이 갖가지 색체와 형상으로.
초대형 부유식 음악분수로서 물과 빛, 음악의 하모니를 통한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한다.
매일 밤 웅장하고 환상적인 공연이 펼쳐지고 관람객과 함께 하는 사연 소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소중한 추억을 선사한다.
오색 찬란한 물줄기가 이쪽 저쪽 자유자재로 방향을 바꾸며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나머지 춤추는 분수의 모습들은 다음 Page에)
시원한 바닷바람에 머리는 마구 마구 흩날리고.. 분수 공연 끝난 후 갓바위로 이동,
갓바위 주변의 바위. 풍화혈로 들쭉날쭉 깎여 마치 조각품 같다.
갓바위 주변에 있는 바위.
2009년 4월 27일 천연기념물 제500호로 지정된 갓바위.
영산강 하구의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에 있는 이 바위는 바닷물이 바위에 부딪치면서 수면과 잇닿은 바위 아랫부분이 깎여나가
마치 갓을 쓴 사람 형상으로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겉보기에는 갓을 쓴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인데 그 크기는 큰 갓바위가 8m, 작은 갓바위가 6m 정도 된다.
이런 종류의 풍화혈(風化穴)은 바위의 균열 등으로 수분이 바위 내부로 쉽게 스며드는 부위에 쉽게 발달한다.
스며든 수분이 계절적 요인으로 냉각되어 부피가 커지면 바위에 균열이 일거나 조각이 떨어져나가 바위는 점점 더 빨리 깎이게 된다.
자연적인 과정으로 발달한 풍화혈 상태의 자연조각품으로 그 가치가 있고, 효자의 전설이 있어 천연기념무로 지정 되었다.
또 하나의 전설은 영산강을 지나가던 부처님과 아라한이 놓고 간 갓이 돌로 변하였다는 설이 있다. 목포시에서 관리 한다.
풍화혈(風化穴, weathering pit) 이란
암석이 물리적, 화학적 풍화작용을 받은 결과 암석의 표면에 형성되는 요형(凹型)의 미지형을 말한다.
암석의 표면에 나타나는 풍화혈의 종류에는 5가지가 있다.
갓바위 앞 해상 보행교에서 저녁 늦게까지 열강하시는 교수님.
갓바위는 자연이 만들어낸 조각품으로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희귀성을 가지고 있어 흥미롭다.
저녁노을에 물든 바다와 입암산의 절벽에 반사되는 노을빛이 아름답다.
20일 전에는 인천 옹진군 굴업도에 갔다가 토끼섬에서 아랫부분이 많이 파인 해식와(海蝕窪, notch)를 보고 왔다.
해식와는 바닷물의 침식작용으로 해안의 절벽 아랫부분이 오랜 세월에 걸쳐 밀물과 썰물로 섬이 잠겼다가 드러나기를 반복하면서
바닷물의 염분이 해안 절벽 아랫부분의 응회암을 서서히 녹이며 깊고 좁은 통로 모양이 형성되는 것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토끼섬의 해식와는 깊이가 3~5m에 이르는데 이곳 갓바위는 폭이 좁고 대신 높이가 높다.
섬을 다니다 보니 여러가지 형태의 신기한 바위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목포시 용해동에 있는 갓바위에는 아래와 같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갓바위를 둘러본 후 마지막 코스? 호텔로 이동. 이렇게 늦게까지 탐방 다녀보기도 처음이 아닐까 싶다.
호텔로 이동 중 버스안에서 내다본 목포대교 야경.
바다건너 고하도 야경을 바라보고, 호텔방에 들어와 보니 4명이 자기에는 좀... 여행사 측에 문의하니 방 하나를 더 주어 두 명씩 잤다는...
Tea Time(다과회)을 가질 예정으로 ㄱㅇ씨가 준비는 다 해왔으나 너무 늦게까지 다니는 바람에 피곤하여 통과,
요트도 타고 카누도 타보며 즐겁고 길게 보낸 첫날의 밤은 이렇게 깊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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