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김 경주 - 무릎의 문양, 시차의 건축

opal* 2014. 6. 22. 13:41

 

 

무릎의 문양

 

                                                                           김 경주

 

1

저녁에 무릎,하고 부르면 좋아진다

당신의 무릎, 나무의 무릎, 시간의 무릎.

무릎은 몸의 파문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살을 맴도는 자리 같은 것이어서

저녁에 무릎을 내려 좋으면

천근의 희미한 소용돌이가 몸을 돌고 돌아 온다

 

누군가 내 무릎 위에 잠시 누워 있다가

해골이 된 한 마리 소를 끌어안고 잠든 적도 있다

누군가의 무릎 한쪽을 잊기 위해서도

나는 저녁의 모든 무릎을 향해 눈먼 소처럼 바짝 엎드려 있어야 했다

 

“내가 당신에게서 무릎 하나를 얻어오는 동안 이 생은 가고 있습니다

무릎에 대해서 당신과 내가 하나의 문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내 몸에서 잊혀질 뻔한 희미함을 살 밖으로 몇 번이고 떠오르게

했다가 이제 그 무릎의 이름이 당신의 무릎 속에서 흐르는 대기로

불러야 하는 것을 압니다 요컨대 무릎이 닮아서 사랑을 하려는

새들은 서로의 몸을 침으로 적셔주며 헝겊 속에서 인간이 됩니다

무릎이 닮아서 안 된다면 이 시간과는 근친 아닙니다”

 

2

그의 무릎을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잊혀진 문명의 반도 같았다

구절역 계단 사이,

검은 멍으로 한 마리의 무릎이 들어와 있었다

바지를 벌리고 빠져나온 무릎은 살 속에서 솟은 섬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의 무릎을 안고 잠들면서

몸이 시간 위에 펼쳐 놓은 공간 중 가장 섬세한 파문의 문양을

지상에 드러내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무릎으로 내려오던 그 저녁들은 당신이 무릎 속에 숨긴

마을이라는 것을 압니다 혼자 앉아 모과를 주무르듯 그 마을을

주물러주는 동안 새들은 제 눈을 찌르고 당신의 몸속 무수한 적도(赤道)

들을 날아다닙니다 당신의 무릎에 물이 차오르는 동안만 들려옵니다

당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바람의 귀가 물을 흘리고 있는 소리가”

 

3

무릎이 말을 걸어오는 시간이 되면

사람은 시간의 관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햇빛 좋은 날

늙은 노모와 무릎을 걷어올리고 마당에 앉아 있어본다

노모는 내 무릎을 주물러주면서

전화 좀 자주 하라며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한다

그 무렵 새들은 자주 가지에 앉아 무릎을 핥고 있었다

그 무릎 속으로 가라앉는 모든 연약함에 대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음절을 답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서 나눈 무릎의 문명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생은 시간과의 혈연에 다름 아닐진대 그것은 당신이 무릎을

안고 잠들던 그 위에 내리는 눈 같은 것이 아닐는지 지금은 제 무릎

속에도 눈이 펑펑 내리고 있습니다 나는 무릎의 근친입니다”

 

 

 

시차의 건축

 

                                                                     김 경주

 

오르골이 처음 만들어 질 때 유리통 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은 음악에 고이는 태풍이 되고

오르골에 조금씩 금이 갈 때 유리통 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은 그 음악을 태풍으로 만든다

 

립파이를 먹고 싶을 때에는 립파이를 먹고

죽은 시계를 차고 여행가고 싶을 때는 죽은 시계를 차고 여행간다

어떤 여행지에서는 살구와 자두를 아직 구별하지 못한다

 

오전엔 박하향이 나는 담배를 물고 불을 끄러가는 소방관을 보았고

오후엔 소방관이 박하 사탕처럼 건물 속에서 녹는다

 

수업시간엔 세계지도를 펴 놓고 먼 도시들의 위도와 경도를 외웠는데

수업이 끝나면 독사를 잡으로 가기 위해 검은 봉지를 주우러 다녔다

 

밤엔 나무에 몰래 기어올라 앉아 있는 느낌보다 나무에서 떨어진 느낌으로 책을 본다

새벽엔 종이비행기보다 종이배를 더 많이 접었다고 고백하는 느낌

종이배를 손바닥에 올려 놓고 '이봐 네 곁에 난 오래 앉아 있었다구'

내가 공책에 갈겨 쓴 아주 많은 글자들이 밤에 지우개 속으로 모두 들어가 사라진 날의 느낌

 

인도향을 선물받은 날 다리를 좀 절었고 시차에 대해서 오래 생각했다

집에서만 지내는데도 망각이 필요하다는 사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기는 데에도 기억은 수 십종의 식물을 달고 간다

어쩐지 너의 여행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많은 종의 연필이 필요할 것 같아서 흑말을 탈까? 백말을 탈까?

청기를 들까? 백기를 들까? 여행은 태도의 문제라기 보다는 침묵의 차이 같아 ...

 

내 현기증이 조금 잘 팔리는 이유는 '졸음과의 싸움' 같은 것인데

네 수증기가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내가 모르는 마을 속에서 언제나 네가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일거야

과민한 날 합격통지서를  받은 것처럼, 아침에 손톱을 자르고 저녁에  손톱을 잃어버렸다고 우는 아이처럼,

부모의 섹스롤 처음 훔쳐본 날의 몽연함처럼 나는 <붉은 책 암송대회>에 나가 우승을 하고 온 엄마릉 번쩍 들어올리며 말했다.

 

"유산 같은 건 필요 없어요, 대신 엄마의 멀미를 내게 다 주세요"

 

누군가 내게 언제가 이렇게 말했다. '넌 고향을 꽃다발처럼 평생 벽에 거꾸로 말릴 생각이니?'

누군가에게 언젠가 이렇게 말할 날이 올 것이다. '주머니를 뒤집으니 강아지 사료 한 알이 나옵니다.'

 

유리창에 입김으로 그련놓은 건축들이 흘러 내린다

그건 시차를 이해해 가는 가장 아름다운 머릿 속의 물방울들

배우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스무살도 안되서 양미간을 찌푸리고 나쁜 감정에 진학하기 위해

나는 침묵의 보병이 되었다. 부재의 영역에서 말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역할을 할 뿐이고

시는 그곳을 오고 가는 내 인종에 불과하다, 간직하기를 원하는가 그러면 자신의 시차를 돕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