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
이 병률
겨우내 아무 일 없던 화분에서 잎이 나니 찬란하다
흙이 감정을 참지 못하니 찬란하다
감자에서 난 싹을 화분에 옮겨 심으며
손끝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도록 내 뼈에 방들이 우는 소리 재우는 일도 찬란이다
살고자 하는 일이 찬란이었으므로
의자에 먼지 앉는 일은 더 찬란이리
찬란하지 않으면 모두 뒤처지고
광장에서 멀어지리
지난밤 남쪽의 바다를 생각하던 중에
등을 켜려다 전구가 나갔고
검푸른 어둠이 굽이쳤으나
생각만으로 겨울을 불렀으니 찬란이다
실로 이기고 지는 깐깐한 생명들이 뿌리까지 피곤한 것도
햇빛의 가랑이 사이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만나는 것도
무시무시한 찬란이다
찬란이 아니면 다 그만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목숨은
찬란의 끝에서 걸쇠를 건져 올려 마음에 걸 것이니
지금껏으로도 많이 살았다 싶은 것은 찬란을 배웠기 때문
그러고도 겨우 일 년을 조금 넘게 살았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다 찬란이다
절연
이 병률
어딘가를 향하는 내 눈을 믿지 마오
흘기는 눈이더라도 마음 아파 마오
나는 앞을 보지 못하므로 뒤를 볼 수도 없으니
당신도 전생엔 그러하였으므로
내 눈은 폭포만 보나니
믿고 의지하는 것이 소리이긴 하나
손끝으로 글자를 알기는 하나
점이어서 비참하다는 것
묶지 않은 채로 꿰맨 것이 마음이려니
잘못 얼어 밉게 녹는 것이 마음이리니
눈 감아도 보이고 눈을 감지 않아도 보이는 것은
한 번 보았기 때문
심장에 담았기 때문
눈에 서리가 내려도 시리지 않으며
송곳으로 찔러도 들어가지 않는 것은
볼 걸 다 보아 눈을 어디다 묻었다는 것
지독히 전생을 사랑한 이들이
다음 생에 앞을 못 본다 믿으니
그렇게라도 눈을 씻어야 다음 생은 괜찮아진다 믿나니
많이 오해함으로써 아름다우니
딱하다 안타깝다 마오
한 식경즘 눈을 뜨고 봐야 삶은 난해하고 그저 진할 뿐
그저 나는 나대로 살 터 당신은 당신대로 살기를
내 눈이 허락하는 반경 내에서 연(緣)은 단지 그뿐
그런 시간
이 병률
일본 사람들은 젋은날
히말라야의 깊고 높은 산을 오른 기억으로
죽음의 시간을 눈칱챌 때가 오면
다시 그곳을 찾아
대열을 이탈해 혼자 사라진다지
크레바스를 만들며 속으로 사라지는 거겠지
가야겠으니
가야겠으니
몸으로 안간힘으로 틈을 넓하는 거겠지
나는 일요일의 계시적인 영역에 있고
아홉시간을 아무것도 소진하지 않아도 된다
생각하기 좋은 버스를 타거나
강을 보러가는 것이 아니라
혼자있는 풍경을 참견하는 것
실내의 속도로 녹는 것
아치, 닫히지 않는 서랍을 신중히 밀어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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