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다녀온 남도 여행, 강진(康津) 다산초당(茶山草堂)과 영랑생가(永郞生家)
달리는 차 안에서 차창 통해 촬영한 가우도와 출렁다리. 차량은 다닐 수 없다.
무안 초의선사 유적지와 장흥 소등섬. 강진 마량을 들린 후 다산 초당 향해 가는 중에 보인다,
장흥군과 강진군 사이의 강진만에 있는 작은 섬으로 가우도길과 강진의 월곶나루, 장흥의 중저길, 양쪽으로 다리가 놓여져 있다.
길 우측 가까운 거리에 강진 청자 박물관이 있으나 시간이 부족해 둘러 볼 수가 없었다. 산 위에 그려진 청자 모습이 강진임을 알려준다.
강진만에서 오수를 즐기는 큰 고니떼.
날개쭉지 위에 긴 목을 걸치고 다들 자고 있는 줄 알았더니 불침번 보초도 있다.
다산초당 입구. 다산초당 가는 길은 이곳 말고 백련사에서 산을 넘어가는 오솔길도 있다.
1년전 왔을 땐 백련사를 먼저 답사 후 다산초당을 찾았었다.
안내판에 설명이 잘 되어 있다.
다산초당이 있는 곳에는 4채의 건물이 있다.
다산초당을 중심으로 우측에 동암과 천일각, 좌측에 서암이 있다.
다산의 시대보다는 근대에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녔을 것으로 느껴지는 길.
나무뿌리가 다 들어나 있는 노송들이 불쌍해 보인다.
그러잖아도 나이가 많은 나무들이라 걱정 되는데 해마다 흙으로 조금씩 덮어주면 안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주변 산은 잡다한 식물들의 자생지 이다.
오랜세월동안 사람들의 발길에 의해 다 들어난 나무 뿌리들. 복토를 해가며 뿌리를 감추어 주고 싶은 맘이 든다.
길 우측으로 해남 윤씨가의 묘지 한 기가 보이고, 그 앞에 서있는 작은 석상 이다.
정호승 시인의 '뿌리의 길'
다산 초당 가는 길엔 나무뿌리가 들어난 길도 있지만 가파른 돌계단 있다.
다산초당 배경.
제자들은 가르치고 책을 썼던 서암.
다산초당(茶山草堂)
정면 5칸, 측면 2칸. 조선 후기의 대표적 사상가인 정약용(丁若鏞)이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귀양와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1808년에 윤규로(尹奎魯)의 산정이던 이 초당으로 처소를 옮겨 1818년
귀양에서 풀릴 때까지 10여 년간 생활하면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하고 실학을 집대성함으로써 실학사상의 산실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58년 지역민으로 구성된 다산유적보존회가 무너진 초당을 복건하여 이 해 사적 제107호(정다산유적 丁茶山遺蹟)로 지정받았다.
건물은 도리단층 기와집으로 문화재관리국에서 관리하고 있다.
1970년, 1971년, 1975년에 보수공사를 하였으며, ‘茶山艸堂’이라는 현판은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로 유명하다.
경내에는 정석(丁石), ·약천(藥泉),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 ·다조(茶竈) 등 다산의 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다산초당은 1995년에 처음 왔었고, 일 년전(2013.12.20)에도 왔었으니 일년만에 다시 찾은 셈이다.
처음 왔을 때는 '나의 문화 유산기'(유홍준저) 책 한 권을 옆에 끼고 3박 4일 동안 남도일번지를 두루두루 답사했었다.
다조(차 닳이는 부뚜막으로 사용하던 돌)
다산초당 옆의 연지. 연지의 물은 사진에선 우측 아래 안보이는 부분, 연못 위치로는 우측 위로 대나무 통로를 통해 위에서 떨어지게 되어있다.
석가산은 산을 본뜬 조경물을 말하며 조경수법의 하나 이다.
원래 중국의 신선사상에 근거하여 정원에 연못을 만들어 선산(仙山)을 쌓는 풍습에서 기원한다. .
중국에선 바다를 보기가 쉽지않아 연못을 파고 거기서 나온 흙이나 돌로 연못 안에 산을 만들고 짐승을 기르거나 나무, 화초 등을 심었다.
이것을 일지산삼(一池三山 : 하나의 호수와 세 개의 산)이라 한다. 세 개의 산은 영주, 방장, 봉래하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영주 - 한라산, 방장- 지리산, 봉래 - 금강산을 나타낸다.
이곳 다산 초당은 연못이 작아 석가산이 하나밖에 없다.
다산이 기거하며 저술하던 곳. 동암 또는 송풍루라고 한다.
다산 생존시에는 없었던 천일각.
일년 만에 다시 찾은 천일각 루 마루에서.
천일각에서 보이는 강진만, 전에는 앞에 보이는 곳이 모두 바다였었다고 한다.
천일각에서 보이는 천관산,
세 번째 찾은 천일각에서.
다산초당과 백련사로 이어지는 오솔길.
일년 전 왔을때는 백련사를 먼저 둘러본 후 산을 넘어 다산초당으로 왔었다.
다산초당에서 나와 영랑생가고 이동.
강진 둘레길 안내판.
영랑생가 앞의 예전에 사용하던 공동 우물.
영랑생가가 보이는 앞의 우물물은 자꾸 퍼내야 깨끗한데 사용하지를 않아 썩어 보인다.
예전에 지어진 집이면 커다란 대문이 있음직한데 나무로 만든 사립문 이다.
마당은 넓고 한쪽에 영랑생가를 설명하는 안내판과 시비 등이 보인다.
영랑생가 인증?
앞에 바로 보이는 곳은 문간채, 그 앞에 '모란이 피기까지는' 대표적인 시비가 있다.
가을 햇 볏짚으로 새로 이었는지 지붕의 이엉이 산뜻하고 단아하다.
우측은 사랑채로 들어가는 문. 안체와 사랑채는 서로 통할 수 있는 쪽문이 안에 또 있다.
(▲사진을 클릭하면 조금 크게 볼 수 있음)
상량문에 “광무 10년 병오 4월(光武十年丙午四月)…”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 집의 건립연대는 1906년임을 알 수 있다.
사랑채는 흔히 안채 앞에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영랑생가는 옆으로 길게 위치한다.
중요민속자료 제252호 (2007년 10월 12일 지정) 현재는 본채와 사랑채, 그리고 문간채 등 3동만 남아 있다.
문간채 앞에 있는 영랑의 대표적인 시,'모란이 피기까지는' 시비.
문간채와 사랑채가 들여다보이는 대문.
문간채 문을 통하여 들여다본 안채.
문간채 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안채. 마당 한쪽에 모란이 가지만 보인다.
모란이 피기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겨울에 왔더니 화려한 모란꽃을 볼 수가 없다.
모란,
아직도 모란과 작약의 구별을 못하는 친구가 있다. 참고로 모란(목단)과 함박꽃(작약)의 구별,
모란(꽃말 '부귀영화')
모란과 작약의 새싹.
모란은 목본(나무-낙엽관목)으로 겨울엔 가지만 남아 겨울을 나며 봄이면 가지 끝에서 새싹이 나오고,
작약(함박)은 다년생 초본(풀)으로 잎이 모두 죽어 흔적이 없어져 봄이면 땅 표면에 새싹이 나온다.
모란과 작약의 잎.
모란의 잎은 윤기가 적고 오리발 모양, 작약 잎은 윗부분이 세 갈래로 좁고 길며 윤기가 있다.
모란은 보통 4~5월 경에 꽃을 피우는데
작약은 모란이 지고 난 후 6월경(예전엔 보통 장마 때)에 핀다. 작약의 뿌리는 한약재료 쓰인다.
요즘은 지구의 온난화 현상으로 더 일찍 피기도 한다.
꽃이 지고난 후의 모란과 작약의 열매.
작약(함박)꽃(꽃말 '수줍음')
요즘은 개량종이 많이 나와 분홍색, 흰색 말고도 다른 색의 꽃을 볼 수도 있다.
작약에는 슬픈사연이 전해져 온다.
<옛날에 파에온이라는 공주가 사랑하는 왕자를 먼 나라의 전쟁터에 보내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며 혼자 지냈으나 왕자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후 맹인 악사 한 사람이 찾아와 집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는 왕자가 공주를 그리워하다 마침내 죽었다는 사연이었다.
슬픔이 커진 공주는 악사를 따라 먼 이국땅에 가보니 왕자는 모란꽃으로 변해 있었다.
모란꽃으로 변한 왕자의 옆에서 떠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니 하늘도 감동하여
공주도 꽃으로 변하게 해주어 그 옆에서 오래 오래 같이 지낼 수 있었다.
공주가 변한 그 꽃이 바로 작약(함박꽃) 이다.>
모란과 작약의 학명 중 속명(작약과)이 같은 이유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한다.
전설은 믿거나 말거나인데 모란이 '작약과' 인 것만은 틀림 없다.
안채에 모셔진 영랑(永郞))의 영정사진. 꾸며지지 않은 방이 소박해 뵌다.
영랑의 본명은 김윤식(金允植)으로 1903년1월 16일 바로 이곳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휘문고보를 거쳐 일본 동경 청산학원에서 수학한 후 귀국하여 박용철(朴龍喆) 등과 교류하면서
최초로 '시문학' 동인지를 만들면서부터 작품을 발표하였다.
영랑은 일제치하에서 설움 받은 내용을 시로 표현하고 자신의 젊은 정열과 민족의 기상을
은연중에 문학을 통해서 불살랐던 우리나라 현대문학의 거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가옥은 건축적 의미를 지녔다기보다는 영랑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가치가 높다.
1950년 9·28수복 때(1950.9.29) 유탄에 맞아 사망 하였으니 그의 나이 48세 이다.
안체의 부엌과 누마루, 장독대 시비 등. 돌에 시를 새긴 시비는 곳곳에 있다.
'오- 메 단풍 들것네'로 시작되는 안채 좌측 장독대(장광) 옆에 있는 시비.
안채와 사랑해 사이 공간에도 모란밭이 있다. 모란이 작약과라는 속명이 보인다.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모란이 지고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햐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필 때 오면 곳곳에 핀 모란을 보았을텐데 겨울에 왔으니 화려한 모란꽃은 볼 수 없고, 앙상한 나목만 보인다.
향나무, 동백나무, 꽝광나무(감탕나무과) 등 사랑채 앞의 정원수.
사개 틀린 고퐁의 툇마루.
예전에 사용하던 글자체로 쓰여진 처마와 기둥이 조금 뒤틀린 툇마루를 표현함.
파파라치? 의 몰카에... ㅎㅎ
사랑채 앞의 상록 정원수.
넓은 터에 따로 따로 지어진 사랑채. 많이 고쳐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사랑채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오히려 본채보다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이 사랑채는 1930년대 건물로 전해지고 있다.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의 영랑생가 돌담.
내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우에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가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돌아래 우슴짓는 샘물가치 (돌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우에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오날하로 하날을 우러르고 십다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붓그림가치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詩)의 가슴을 살프시젓는 물결가치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얄게 흐르는(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 십다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영랑생가를 마지막으로 일정을 끝내고, 목포를 향해 달리는 차창을 통해 해가 저문 억불산을 담아 보았다.
압해대교.
맛있는 저녁식사까지 마친 후 집에 올 때는 목포역에서 KTX 이용.
기나긴 하루의 여정 무사히 마치고 용산역 도착.
하루 하루 소소한 행복을 자주 느끼며 감사할 일이 아주 많았던 해.
2015년 새해를 사흘 앞두고 저물어 가는 해의 마지막 일요일,
소중한 시간 내어 과분하게 환대해 주신 분들의 따뜻한 온정에 감동 먹으며
본인이 한 말은 "오늘 하루의 행복감이 삼 년은 이어질 것 같다" 고 표현할 만큼
2014년의 마지막 큰 선물에 넘넘 감사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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