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문화,여행)

여행) 하루에 다녀온 남도여행 1

opal* 2014. 12. 28. 23:00

 

하루에 다녀온 남도 여행,

무안 초의선사 유적지와 장흥 소등섬. 강진 마량.

 

하루에 다녀오기엔 버거운 거리, 기차를 이용하면 최소한 4시간 이상 소요 되므로 근거리의 공항을 이용했다.

기내에서 서비스로 주는 음료수를 마시다 보니 잠시 '땅콩리턴' 사태를 일으켰던' 마카다미아넛'이 생각난다.ㅎㅎ    

 

반갑게 맞이해주는 지인들과 공항에서 미팅하여 바로 무안 초의선사 유적지로,

이곳 무안 초의선사 유적지는 오늘의 첫 방문지이자 생애 첫 방문지 이다.

 

위 사진를 클릭하면 좀더 크게 볼 수 있다.

 

草衣禪師(1786~ 1866) -  성은 장()씨, 이름은 의순(恂, 본관은 인동().

법호는 초의(), 당호는 일지암(庵), 조선 후기의 대선사로서 우리나라 다도를 정입하여 다성()이라 부른다.

 

1786년(정조10년)에 태어난 선사는 5세 때에 강변에서 놀다가 급류에 휩쓸릴 때 부근을 지나던 승려가 구조하여 살게 되었다

 그 승려의 권유로 15세에 남평 운흥사()에서 민성()을 은사로 삼아 출가하고

19세에 영암 월출산에 올라 해가 지면서 바다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을 바라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22세 때부터 전국의 선지식을 찾아가 삼장()을 배워서 통달,

다산 정약용(1762∼1836), 소치 허련(1809∼1892), 평생 친구인 추사 김정희(1786∼1856) 등과 폭넓은 교류,

추와와 함께 다산초당의 정약용를 찾아 스승으로 섬기며 유학의 경서를 읽고 실학정신을 계승,시부()를 익히기도 하였다.  

다산은 '각다고'를 쓰고, 초의는 '동다송(頌- 한국의 다경)을 지어 우리차를 예찬 하였다.

 

초의의 사상은 선()사상과 다선일미(味 -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을 맛본다) 사상, 

즉 차() 안에 부처의 진리[]와 명상[]의 기쁨이 다 녹아있다는 것이다.

차의 진예(, 더러운 티끌 먼지)없는 정기()를 마시거늘

어찌 큰 도를 이룰 날이 멀다고만 하겠는가(, 哉) 고 하였다.

승려에게는 차()와 선()이 둘이 아니고 시()와 그림이 둘이 아니며 시()와 선()이 둘이 아니었다.

 

대흥사에 일지암을 짓고, 40여 년 동안 홀로 지관()에 전념하면서

불이선()의 오묘한 진리를 찾아 정진하였으며 다선삼매()에 들기도 하였다

1866년 나이 81세. 법랍 65세로 대흥사에서 서쪽을 향해 가부좌하고 입적하였다.

 

맑은 차 한 잔의 맛과 멋을 초의는 이렇게 노래한다.

一傾玉花風生腋 / 身輕已涉上淸境 / 明月爲燭兼爲友 / 白雲鋪席因作屛
옥화 한잔 기울이니 겨드랑에 바람 일어 / 몸 가벼워 하마 벌써 맑은 곳에 올랐네. /

밝은 달은 촛불 되어 또 나의 벗이 되고 / 흰 구름은 자리 펴고 병풍을 치는구나

 

시다원(施茶院)

 

초의선사 유적지에서 해설사로 봉사하시는 P교수님, 전직 교수님이시며 사진작가 이시다.  

초의의 이야기는 다산과 초의의 관계로 부터 시작된다.  초의보다 24살 연상이며

조선 중기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조안면 능내리 출생)께서는 초의에게 하대하지 않고

호칭을 '순공'이라 불러주셨다는 ...  

 

"끽다거(喫茶去)" - 차를 마시고 가다.

댓잎에 직접 써서 벽에 봍여 놓으시고,  손수 차를 대접해 주신다.    

삼사왈취(三四曰趣 ,서너명이 재미있게 마시) 후 유적지를 둘러보기 위해 일어섰다.

 

정문 대각문.

 

대각문 안으로 들어서면 밖에서 보기와는 다르게 길 양쪽으로 넓은 차밭이 있고, 건물도 봉수산(군산) 아래 넓게 터를 자리잡고 있다.

봉수산의 봉화는 여수 돌산, 진도 첨찰산, 목포 유달산 등에서 올라와  이곳을 거쳐 서울 남산까지 연결 되었다고 한다.

 

초의선사 80세 생존시 소치 허련이 그린 영정 사진(얼굴)과 같게 만들어진 동상.

초의선사는 무안 출신으로 정조 10년(1786)에 나서 고종 3년(1866)에 입적했다. 명맥만 유지하던

우리나라 다도를 중흥시켜서 다성()으로 불린다. 성은 장씨(氏), 법명은 의순(), 호는 초의()이다.

당호는 일지암(庵), 대흥사 제13대 종사이며 다도()의 정립자이다.

 

강가에서 놀다가 물에 빠진 것을 지나가던 스님이 건져 준 일이 인연이 되어 16세 때 나주 운흥사에서 출가했다.

그후 각지로 다니며 운수행각하다 대둔사 10대 강사 완호 윤우( ) 스님의 법을 받고 초의라는 법호를 얻었다.

 

 

초의선사는 늘 “모든 법이 서로 다르지 않으며”(), “평상심이 곧 도”()라는 것을 기본 자세로 삼았다.

선이나 교 어느 하나만을 주장하는 것은 똑같이 이롭지 못하며 교와 선은 둘이 아니라고 보았던 초의선사와

오로지 선에 주력할 것을 주장했던 백파()대선사(1767~1852) 사이의 논쟁은 조선 후기 선 사상에 굵은 파장을 던졌다.

또 초의선사는 불문에 몸담고 있었으나 그 테두리에 그치지 않고 유학, 도교 등 당대의 여러 지식을 섭렵하며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 자하 신위 같은 학자나 사대부들과 폭넓게 사귀었고 범패와 서예, 시, 문장에도 능했다. 

조용한 곳을 찾아 가부좌 틀고 앉는 것만이 선이 아니었으며 현실의 일상 생활과 선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초의선사에게 차와 선은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차 한 잔을 마시는 데서도 법희선열()을 맛본다고 하였고

 차는 그 성품에 삿됨이 없어서 어떠한 욕심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것이며 때 묻지 않은 본래의 원천과 같은 것이라 하여

무착바라밀()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가 지은 '동다송(頌')은 차의 효능과 산지에 따른 품질, 만들고 마시는 법 등을 적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차에 관한 책이며 동다(), 즉 우리나라 차에 대한 예찬을 담고 있다.

차는 삼국 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주로 불가의 학승들을 중심으로 발달했고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과 영남 지방은 차나무가 자라는 데 풍토가 알맞았으므로 우리나라 차의 본고장이 되어 왔다.

그러나 조선 시대 들어와 불교가 밀려나면서 다도도 쇠퇴하여 겨우 명맥만이 이어지고 있었다.

초의선사는 차와 선이 한가지라는 다선일미() 사상을 바탕으로 다도의 이론을 정리하고

차를 만들어 널리 폄으로써 전래의 차 문화를 중흥시켰다.

24세 연상이어서 스승으로 모셨던 정약용과, 동갑으로 승속과 유불의 경계를 넘어

누구보다도 친밀한 정을 나누었던 김정희와의 사귐에서도 학문과 예술, 차의 향기가 함께했음은 물론이다.

초의선사는 귀양살이하는 김정희를 만나러 제주도를 다녀오기도 했을 만큼 서로 터놓고 도탑게 사귀었다.

김정희가 말년에 초의선사가 보낸 차를 받고 써 보낸 걸작 ‘명선’()이 대둔사에 전해 온다.

 

연못 위로 지어진 용호 백로정.

 

사흘만 지나면 새해, 며칠전 한파가 몰아쳤는데도 차나무 잎이 파랗거니와 홍매화 나무 아래 할미꽃이 피어 있는걸 보고 깜작 놀랐다.

 

초의 선사를 흠모하는 마음이라도 있는 걸까? 철모르고 피어있는 할미꽃이 동상를 바라보고 있다. 

 

초의 선사 사당.

 

 

초의 선사에 대한 자료가 보존되고 있는 기념관.

 

두륜산 대흥사에 있는 일지암(枝庵)과 같은 모양의 일지암(一枝盦)을 지어 놓았다.

 

 

해남 두륜산 자락에 위치한 일지암(枝庵)은  초의선사가 39세였던 1824년에 지어 40여 년간 기거한 한국 차 문화 중흥의 상징인 곳이다.

초의 선사는 추사 김정희, 다산 정 약용 등 당대의 명사, 시인, 예인들과 폭넓게 교류하면서

이곳(대흥사 일지암)에서 다서()의 고전인 '동다송'을 저술하고 '다신전'을 정리했다.

 

초의 선사 입적 후 일지암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의 일지암(대흥사)은 1970년대에 복원된 것이다.

차를 마시는 다실과 물맛 좋기로 소문난 유천()이 있다

 

이곳(무안)에 있는 일지암은 대흥사에 있는 일지암(枝庵, 암자암)과 한자가 다른 一枝盦(뚜껑암, 획수16, 부수皿) 이다.

 

 

 

나중에 다시 오면 좀더 자세히 보기로 하고, 오후 일정까지 소화해야하는 급한 마음에 대강 둘러보고 나선다.  

 

위 사진 아래 좌측 완당의 글씨가 보인다.  추사 김 정희(秋史 金 正喜,1786~1856)의 '명선' 이다.

 

명선(茗禪)이란  '차를 마시며 선정에 들다'. 또는 '차를 만드는 선승(禪僧)' 이란 뜻이다.

추사는 '명선'이라 쓴 큰 글씨 좌우에 이 글씨를 쓰게 된 사연을 직접 썼다.

"초의(草依)가 스스로 만든 차를 보내왔는데, 몽정(夢頂)과 노아(露芽)에 덜하지 않다. 이를 써서 보답하는데,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의 필의로 쓴다.  병거사(病居士)가 예서로 쓰다." 라는 내용이다.

 

초의는 추사와 30세에 만나 42년간 금란지교(金蘭之交)를 나누었던 동갑내기 승려 친구 이다.

두 사람은 신분이 달랐지만 학문가 예술, 그리고 다도(茶道)로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초의는 추사의 글씨를 지극히 좋아했고,

추사는 초의의 차를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했다, 그래서 추사는 무시로 초의에게 차를 보내줄 것을 당부하고 재촉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우측 목록 Story 중 전시) 간송문화(澗松文華)전 에서 볼 수 있다

                                ↑ (위 제목을 클릭하면 볼 수 있음)

 

초의선사 유적지 앞 오승우 미술관은 눈도장만 찍고, 목포 광양간 고속도로(10번) 올라서서 영산강에 놓여진 무영대교를 건너 영암으로 진입.

강 건너 안쪽(왼쪽)으로 '미교리(美橋里)'라는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 이름을 지으신 이는 미래를 내다보았음인가?

후에 이렇게 아름다운 다리가 놓여질줄을???

 

 

차창 밖으로 보이는 월출산을 두 어번 산행했던 추억 떠올리며 흘깃 보는 정도로 쳐다보기만하며 영암 통과. 

차안에서 올려다 보니 천황봉 보다 큰얼굴 바위가 있는 구정봉쪽이 더 높아 뵌다.

 

달리고 달려 장흥까지. 장흥 시가지의 가로수로는 상록수인 후박나무가 줄지어 서있다.

 

위사진 윗쪽 좌측에 보이는 건물은 구치소라고...  

 

위사진 위 우측 멀리 보이는 사자산... 철쭉 필때 산행했던 제암산과 우두봉에서 하산 할때 급경사 생각, 근처에 일림산이 있다.

길가에 가까이 보이는 간판은 차의 속도가 빨라 사진이 흐릿하여 전에 찍은 것을 아래에... 

요즘은 정남진이 다른 곳에 있다고... 동행인 중 한 분이 얘기해 주신다.

"전에 안기부에 있던 이가 있어 이곳(남포)을 '정남진'이라 했는데 지금은 정남진이 다른 곳에 다시 생겼다" 고

정남진이라 함은 서울 광화문에서 우리나라 정 남쪽을 의미함인데 남쪽도 왔다갔다 움직이나 ??? 

 

7년만에 다시 와보니 도로를 넓히느라 예전에 세웠던 정남진 표석은 없어지고, 굴껍질은 여전히 많다.

 

처음 방문 때(2007.1.5) 만났던 정남진 표지석과 영화 '축제' 기념판, 갯벌은 썰물 상태로 바닥이 들어나 있다. 

 

두 번째 방문 때(2007.5.9.) 사진을 보면 섬에 조각물이 안보인다. 

 

누구 동상? 흰 돌로 된 조각상이 보인다. 시간이 없어 일행 중 혼자만 차에서 내려 얼른 찍고 다시 도망? 가느라 섬까지는 갈 수가 없었다.ㅎㅎ

 

멀리 득량도(좌측)가 배경으로 보이는 남포 소등섬.

 

정남진은 서울 광화문을 중심에서 정 동쪽으로 정동진이 있으며, 북쪽의 가장 추운지방인 중강진과 일직선상에 위치한

정남쪽의 따뜻한 곳이다. 산, 들, 바다, 강과 호수가 어우러진 천혜의 자연경관과 호남의 5대 명산 천관산, 방촌문화마을,

동양3대 보림사 그리고 제암산 철쭉군락지, 장흥댐 청정해역이 어우러진 장흥은 문화·관광·건강휴양촌이다.

정남진 가까이에는 삼산 방조제를 비롯하여 도립공원 천관산과 문학공원, 영화<축제>의 촬영지로 해맞이 행사가 일품인

남포 소등섬, 안양 수문의 해수탕 등 해안 주변의 볼거리와 즐길 거리가 많다.

특히, 제암 철쭉제 행사와 함께 키조개 축제, 갯장어 축제, 물축제, 개매기 체험행사, 천관산 억새제 등 다양한 축제들이 있다. 

동쪽은 보성군·고흥군, 서쪽은 강진군·영암군, 남쪽은 완도군, 북쪽은 화순군과 접하고 있다.

 

 

동쪽은 금성산(, 401m)· 제암산(, 807m)· 골치산(, 664m)· 사자산(, 666m),

서쪽은 국사봉(, 613m)· 부용산(, 609m)· 수인산(, 561m) 등이 있다.

남쪽은 양암봉(, 465m)· 천관산(, 723m), 북쪽은 국사봉· 봉미산(, 506m)· 가지산(, 510m),

중앙에는 억불산(, 518m)· 용두산(, 551m)· 광춘산 등이 있다.

 

소등섬 앞 길가엔 여전히 굴 껍질이 많다. 전에 천관산 산행 후 왔을땐 안양 수문쪽에서 키조개를 먹었었다.

 

 

죽청 배수 갑문 앞에서 조망되는 천관산.

 

민물에 바닷물이 밀려 들어오지 못하게 배수갑문을 만들어 수위를 조절하고 있다.

굴구이 집들이 모여있는 곳은 상호에 여자 이름이 많이 들어있다.  장흥 특산물인 석화구이를 점심으로 먹기위해 이곳까지 달려 왔다.

 

장흥 특산물 석화(Oyster)

식용종인 참굴을 말하며 굴조개라고도 한다. 이매패류에 속한다. 한자어로는 모려()·석화() 등으로 표기한다.

굴이 식용으로 이용된 역사는 오래되었으며 한국에서도 선사시대 조개더미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굴류는 왼쪽 껍데기로 바위 등에 붙으며, 오른쪽 껍데기는 좀 작고 볼록해지는 정도도 작다.

두 껍데기의 연결부에 이빨은 없고, 검은 인대()로 닫혀 있다(자산어보에 기록)

 

껍데기 표면에 성장맥이 판 모양으로 발달하고 돌기나 방사륵()이 생기는 수도 있다. 몸의 중앙에 후폐각기능이 있다.
자웅동체지만 생식시기에는 암수가 뚜렷하며 웅성이 강해진 개체로 되었다가 다음에 자성이 강해진 개체로 되는 교대성의 자웅동체 이다.

 

굴구이를 먹기위한 필수품 면장갑.

 

넓은 실내에는 이미 사람들로 꽉차 붐비고, 별관?(비닐하우스)으로 안내되니 바로 수북히 쌓인 굴 함지박이 따라 들어온다. 

 

장흥 특산물 석화 구이 점심.

불판에 굴을 올려놓으니 금방 김이 모락 모락, 익으며 벌어지는 대로 집어 잘 안떨어지는 알멩이를 칼로 뗀 다음 장에 찍어 먹으면 된다.

 

오랫만에 푸짐하게 원없이? 포식ㅎㅎㅎ  동치미 국물 또한 일품. 더 달래서 먹었다는...

 

굴이 익으며 벌어지면 안에 있던 국물과 굴껍질이 튀므로 앞치마는 필수, 익는 대로 집어주기에 얼마나 열심히 먹어댔는지...

 

굴을 다 먹은 후 나오는 떡국, 굴로 배를 채웠더니 떡국 생각은 별로, 초의 선사 유적지에서 준비해온 차까지...

 

죽청 배수 관문 앞에서.

 

 

식사 후 당종려가 가로수로 심겨진 장흥의 아름다운 길을 달린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천관산과 시원한 색감의 보리밭. 추운 겨울인데도 보리빛이 아름다운 곳, 

  

 장흥 남포(소등섬)에서 강진 고금대교가 있는 마량항으로 가는 도중 바위와 억새로 유명한 천관산을 담아 보았다.

 

천관산은 두 번의 산행이 있었다.(2006.06.16.  2008.11.04)

길가에 잠시 차 세우고, 얼른 찍고 아름다운 마량향을 향하여 다시 달린다.

 

마량항 도착.

 

마량포구.

 

강진과 고금도를 이어주는 고금대교.

 

고금대교 배경으로 마량항에서.

 

 

고금대교. 다리 우측이 고금도(완도군 고금면), 오늘 일행 중 한 분의 고향이기도 하다.

 

 

 

 

 

 

 

'말을 건너주는 다리' 라는 돌에 새겨진 글이 마량(馬梁, 馬良)에 대해 잘 말해주고 있다.

 

 

강진과 관련깊은 작가들의 시를 돌에 새겨 세워 놓았다. 

 

 

 

 

 

청자의 고장답게 청자로 만들어진 마량의 청자 조명등.  

 

 

 

 

 

 다산 정약용의' 다산 초당', 시인 김영랑(김윤식)의 '영랑 생가'까지 둘러보는 것이 오늘의 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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