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멕시코 현대미술의 거장 ‘디에고 리베라’ 국내 첫 단독 기획전
거의 같은 시기에 한 지역인 서울에서 부부였던 두 사람의 전시회를 여는 일도 참 드문 일이다.
14년 전 암 투병시 딸이 엄마의 재기를 위해 제일 먼저 사다준 책이 '프리다 칼로' 였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은 책을 통해 본 적이 있으나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의 그림은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 접한다.
어제 소마 미술관에서 관람한 프리다 칼로 전이 국내 첫 전시이듯, 디에고 리베라 전도 우리나라에서는 첫 전시이다.
벽화 그리는 디에고 리베라.
판화 공방의 유리창에 붙어 구경하던 소년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는 1886년 멕시코 중남부의 구아나후아토(Guanajuato) 지방에서 태어났는데
집안 사정이 어려워져 곧 멕시코시티로 이주했다.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그를 엔지니어라고 불렀다.
기계처럼 생긴 장난감들을 뜯고 붙이는 솜씨가 뛰어나고, 전차와 기차를 그리기 좋아하며 기계장치를 상상하고 꾸미는 재간이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연필을 잡고 물감통을 갖고 다니는 나이가 된 후로 스케치와 드로잉을 놓지 않은 디에고는
10살에 멕시코의 권위 있는 산 카를로스(San Carlos) 아카데미 미술과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야간 과정에 다니다가 한 달 15달러에 해당하는 장학금을 받아 주간으로 옮겼다.
어린 디에고의 재능을 알아 본 사람은 75세의 미술 교수, 레불(Rebull)이었다.
그는 디에고를 집으로 불러 그림 수집품을 보여주고 이런 이야기를 했다.
“너는 사물을 유심히 보는구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고...네가 무엇을 한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는 걸 거다.”
소년 디에고의 시선을 끈 것은 거리에 있는 작은 판화 공방이었다. 디에고는 거리 유리창으로 그 판화공방을 늘 들여다보았다.
멕시코 사람들은 늘 판화를 보았다. 그들이 세상 소식을 듣고 문화를 가까이 하는 길은 장터의 노래꾼과 떠돌이 시인, 기도문,
낱장짜리 인쇄물을 통해서였는데, 판화는 그 인쇄물에 붙는 그림이었다. 어린 디에고는 곧 판화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인기 있는 판화공, 포사다(Posada)가 드디어 유리창 앞에 붙어 있는 소년을 가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자
디에고는 “여기 있는 모든 것이 좋다”고 했다. “이건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만찬]이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만든 이런 판화들하고 이 그림(복제화)이 모두 좋으냐?” 하고 포사다가 물었을 때 디에고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그의 전기 작가는 기록한다. “다 좋아요. 모두가 움직여요.” 디에고가 이렇게 강렬한 느낌을 받은 것은 훗날
파리에서 다시 유리창 너머로 폴 세잔(Paul Cézanne)을 보았을 때, 그리고 이탈리아에 가서 14세기의 프레스코(Fresco) 앞에 섰을 때이다.
그는 훗날 세계적 화가가 되어 멕시코 벽화를 제작하게 되었을 때 포사다를 잊지 않았다.
멕시코시티 민족 궁전의 벽에는 그래서 판화공 포사다가 들어 있다.
리베라는 10대 후반의 4년 동안 산 카를로스의 진부한 커리큘럼과 유럽식 회화 기법의 답습에 반항하고
멕시코의 농촌을 오르내리며 집과 거리, 교회, 인디언, 화산을 그렸다. 멕시코인들은 조형 예술의 천재들이었다.
러시아 사람들이 문학을 좋아한다면 멕시코 사람들은 조형에 탁월했다. 아즈텍 문자도 그림 같았다.
그들이 만든 직물과 항아리, 바구니, 담요는 모두 디자인적으로 훌륭했고, 건물 벽의 모퉁이, 교회의 연단은 예술품이었다.
그리고 거리 식당의 밥상, 거기에 차려진 그릇들과 그것들 사이를 누비는 오색찬란한 민중 축제가 있었다.
스페인 정복 이래 억눌려 깊이 침전되고 오래 응고된 강렬한 감정이 예술의 원천으로 작용했던 것일까.
그러나 20세기 멕시코의 미술이 오직 인디언적인 조형은 아니었으며 모든 기법은 유럽으로부터 전수된 것이었다
유럽에서 프레스코 회화를 접하다
22살이 되던 1908년, 디에고 리베라는 멕시코를 떠나 유럽으로 가는 배를 탔다.
안목 있는 베라크루즈의 데헤스(Theodor A. Dehes) 주지사가 약속한 장학금 덕분이었다.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디에고는 스페인을 중심으로 활동했지만 온 유럽에 영향을 미친 엘 그레코(El Greco)와
벨라스케스(Velasquez)를 보았다. 스페인이 낳은 또 다른 거장 고야(Goya)의 거대화는 나폴레옹의 침공 앞에서 프랑스 군대를 물리치고
스페인의 봉건제도도 끝내려는 스페인 민중의 노력을 담고 있었다.
헐벗은 민중이 많아 19세기 후반 이래 무정부주의 사상이 널리 퍼진 스페인에서 디에고 리베라는 전단과 소책자들을 사들였다.
스페인 남부 발렌시아가의 셈페레(Sempere) 민중도서관에는 싸구려 문건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무정부주의 사상가인 러시아의 바쿠닌(Bakunin)과 크로포트킨(P. Kropotkin), 프랑스의 민족사상가 르낭(Renan),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라브리올라(Labriola)를 비롯하여 니체(Nietzsche), 쇼펜하우어(Schopenhauer),
드레퓌스 사건에서 “나는 고발한다”를 쓴 에밀 졸라(Emile Zola), 프랑스 노동이론가 소렐(Georges Sorel),
그리고 러시아 소설가들의 작품이 모두 리베라의 흥미를 끌었다.
그는 곧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을 돌아다녔으며 자신도 명확히 할 수 없는 어떤 문제를 찾아 유럽을 헤맸다.
런던에서는 부둣가, 빈민가인 이스트엔드, 변두리 공장 지역에서 스케치를 쉬지 않았다.
빈민들이 일을 끝내고 런던 브리지(London Bridge)를 건너와 템스 강둑에서 잠이 드는 것을 바라보기도 했다.
1910년 혁명이 시작된 멕시코에 잠시 들른 것을 제외하면 그는 주로 파리에 거처를 두고 1920년 겨울까지 10년간 유럽에서 지냈다.
디에고는 파리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된 모딜리아니(Modigliani)와 사귀면서 큐비즘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파리에는 러시아에서 온 작가, 화가, 사상가들이 많았다.
디에고는 그의 첫 번째 아내가 된 러시아 출신의 안젤리나 벨로프(Angelina Beloff)를 여기서 만났으며
몽마르트의 러시아 망명자들과 정치, 혁명, 예술의 이상에 관해 토론했다.
1차 대전 직후의 파리는 초현실주의, 다다이즘(Dadaism)에 기반한 시와 노래, 잡지 또 기계와 노동자를 그리는
페르낭 레제(Ferdinand Leger)의 작품이 휩쓸고 있었다. 그러나 리베라를 사로잡은 것은 1920년 이탈리아에 갔을 때 보게 된
14세기의 프레스코(Fresco: 회반죽 벽에 그려진 벽화기법)들이었다.
14세기의 이탈리아 미술가들은 비잔티움과 에게 해(Aegean Sea)의 모자이크 조형 예술을 받아들여 화법을 발전시켰고,
프레스코는 그 중에서도 위대한 문화유산이었다. 프레스코를 접했을 때의 리베라는 이미 서른, 화가로서 수련기를 지난 나이였다.
그러나 그는 피렌체, 시에나에서 지오토(Giotto di Bondone), 우첼로(Paolo Uccello),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같은
대가들의 전쟁화, 역사화들을 힘들여 꼼꼼히 공부했다. 프레스코는 화폭이 거대하고 누구나 접근 가능하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고,
화랑 안에 들어가야 볼 수 있는 그림과는 차원이 다르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리베라는 프레스코에 그려진 사람들의 신체 표현 방식과 동작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또한 프레스코 전체의 구조를 튼튼하게 하고 벽의 배색과 장식을 만족시킬 방도를 구하는 데에 힘썼다
공공미술로서의 벽화 제작 운동에 나서다
1921년 멕시코로 돌아온 디에고는 “새로 태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보는 것마다 나의 잠재적 걸작이었다.
군중, 시장, 축제, 행진하는 부대, 길가에 늘어선 가게들, 들판과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번쩍이는 얼굴, 온통 빛나는 어린아이들.
나의 스타일은 아이가 태어나듯이 그 순간에 태어났다.“ 그는 무엇보다 공공미술에 강한 신념을 가졌다.
때마침 혁명 정부는 미술의 공공성을 높이기 위해 벽화 제작을 추진하였다.
리베라와 더불어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Jose Clemente Orozco), 다비드 시케이로스(avid Alfaro Siqueiros),
또 다른 외국 화가들이 벽화 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첫번째 과제는 멕시코시티 교육부 건물 전체의 내부를 장식할 벽화였다.
수년 후 이들의 공동 작업으로 완성된 교육부 건물의 벽화 연작은 이탈리아 회화에서 볼 수 있는 유럽 회화 특유의 우아하고 가는 선,
격조 있는 걸작들과는 판이한 멕시코 벽화 르네상스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지오토가 성서의 사가(Saga)를 그렸다면, 멕시코의 리베라와 오로스코는 인종과 정복의 서사시를 그렸다.
교육부 건물 지상층의 디에고 벽화 중에서 3개의 그림이 특히 인상적이다. 하나는 광산으로 일하러 들어가는 노동자들의 그림이다.
다른 하나는 설탕을 휘젓고 있는 일꾼들이다. 중남미의 설탕 제조업은 뜨거운 설탕 가마 앞에 선 고단한 노동을 요구하는 산업이었다.
또 하나는 아름다운 푸른색으로 아마포를 물들이고 있는 테오틸루아칸(Teotilhuacan) 여인들의 모습이었다.
멕시코시티의 민족 궁전에 그려진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그는 스페인 정복 이전 아즈텍 문화를 바탕으로 한
멕시코의 신화와 역사를 독특한 그림체로 그려넣었다
혁명 정부의 공식 화가 디에고 리베라에게 노동은 오랜 동안 뇌리에 박혀 있던 주제였다.
스페인으로 떠나기 전인 1906~1907년 어느 겨울날, 그는 베라크루즈 주를 굽어보는 큰 화산의 밑자락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가
우연히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보았다. 그때 그는 산에서 내려와 조심조심 신설된 직물공장으로 들어가는 농부-노동자들,
공장 감독과 신부, 경찰관의 감독 아래 공장 상점에서만 지불되는 토큰 임금에 불평하지 않는 사람들의 내면을 읽었다.
그 후로 리베라는 런던 부두에서도 뉴욕 항만에서도 노동자들을 관찰하고 그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멕시코 벽화운동 시기에 그린 차핑고(Chapingo)의 교회당 벽화에도 회화와 서사를 섞어서 혁명사상을 드높이고
인디언 문화의 전통을 기념하였다. 그러나 리베라의 거대벽화는 스페인에게 정복되기 이전의 멕시코 문명을 찬양하고
그리워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정복 이전 멕시코의 군사 중심 사회, 인간을 제물로 삼는 풍습을
벽화에 그려넣음으로써 그것들에 대한 평가가 가능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멕시코 벽화운동이 한창이던 1925년에 멕시코를 방문했던 러시아의 시인 마야콥스키(V. Mayakovsky)는
리베라의 벽화를 보고 경탄해 마지않았다. 마르크스주의를 믿고 멕시코 공산당에 가입했던 디에고 리베라는 마야콥스키의 주선으로
1927년 러시아혁명 1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멕시코 대표단이 베를린을 거쳐 차가운 날씨에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리베라는 작가, 예술가들, 또한 일반 시민이
자기를 알아보는 것에 놀랐다. 유명한 혁명시인이자 전위주의 예술가로서 인기 있던 마야콥스키가 그를 소개해 놓았던 것이다.
리베라는 수 주간 행사에 참가할 계획으로 방문한 것이었지만, 모스크바의 젊은 미술학도들이 수업과 지도를 요청하고
멕시코 미술에 대한 강연도 청탁하여 8개월이나 러시아에 체류하였다.
이때 러시아혁명 기념 영화로 [10월]을 제작한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S. Eisenstein)도 만났다.
그러나 1928년에 그가 본 혁명 러시아는 그에게 환멸을 안겨주었다. 러시아는 1920년대 초의 자유로운 활력을 잃고 점차 경직되고 있었다.
리베라는 스탈린주의에 대해 비판적으로 돌아섰고, 이로써 멕시코 공산당에서 축출되며
스탈린과 대립한 트로츠키 (Leon Trotskii)의 혁명관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멕시코시티 미술궁전 벽화에 그려진 트로츠키와 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모습.
리베라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트로츠키의 혁명론에 이끌렸고, 이로 인해 멕시코 공산당에서 축출되었다
그가 자화상으로 유명한 또 다른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를 만난 것은 교육부 벽화 작업 중이던 1927년이었다.
그는 화가로서 칼로의 재능을 높이 평가했고, 어린 시절의 사고와 10대의 교통사고로 30여 회의 수술을 받은 이 여성이
화가의 길을 걷도록 격려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프리다 어머니의 반대 아래 1929년 멕시코의 코요아칸(Coyoacan)에서 이루어졌다.
칼로 역시 멕시코 인디언의 전통을 중요시하고 재능이 넘치는 화가였으나, 그들이 가진 예술적 재능만큼이나
격렬한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평탄치 않았다. 두 사람은 1939년 이혼하였다가 1년 후 재결합했다.
그 사이인 1937년 스탈린에 의해 러시아로부터 추방당한 트로츠키가 멕시코에 도착했다.
리베라와 프리다, 트로츠키는 분란도 있었으나 모두 가까이 지냈다
멕시코를 사랑한 멕시코다운 화가
1930년대 리베라의 주요한 활동 무대는 미국이 되었다. 1920년대 말 리베라, 오로스코의 벽화 그림들이 미국에 많이 알려졌고,
미국은 1929년 대공황의 시작과 함께 대중 예술 지원책을 세운다. 이로 인해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다수 대중을 위한 미술’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작가 존 스타인벡이 [분노의 포도]를 쓰듯이 서부의 화가들은 미국인의 고난을 화폭에 담았다.
1930년 프리다 칼로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리베라는 오래된 예술인 마을 몽고메리 거리에 스튜디오를 두고 일하면서
미국의 문화를 이렇게 평가했다. “당신네 엔지니어들은 당신네의 위대한 아티스트이다.”
“이 고속도로들은 이 멋진 나라에서 본 최상의 멋진 작품이다. 인류의 모든 과거의 건축, 피라미드, 로마의 도로, 수로, 또 성당, 궁전을
모두 보아도 이에 필적하지는 않는다. 이 도로와 기계들로부터 내일의 스타일이 출현할 것이오.
" 리베라는 미식축구 경기장에서도 “저 군중을 보시오” 라며 감탄했다.
1932년 리베라는 중서부의 공업 도시 디트로이트로 자리를 옮겼다.
굴지의 기업가 헨리 포드의 주문으로 디트로이트 미술학교(Detroit Institute of Arts)에 노동자들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디트로이트 자동차 공장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1933년에 완성된 이 벽화는 미국의 공업화를 대표하는 작품이 되었다.
리베라 자신도 이를 자신의 주요한 작품으로 인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프레스코는 급진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는데,
헨리 포드의 아들 이젤 포드(Easel Ford)가 나서 리베라를 방어했다.
그러나 1933년 록펠러(Rockefeller) 가(家)에서 뉴욕 록펠러 센터 안을 장식할 벽화를 주문했을 때는 사정이 달랐다.
리베라는 뉴욕의 벽화에 20세기의 사회와 정치, 산업과 과학의 가능성을 모두 그리고자 했다.
록펠러 센터 내 RCA의 그림 속에는 노동자들이 벌이는 거대한 메이데이 행진이 들어갔다.
(뉴욕은 사실 메이데이 창설과 연관이 깊은 도시였다). 그것은 기업주들의 비난을 사지 않았다.
그런데 이 행진을 이끄는 레닌의 초상이 선명하게 그림 속에 들어 있었다. 리베라는 이 초상을 제거해 줄 것을 요청받았다.
그리고 이를 거부하여 결국은 그 큰 그림이 파괴되었다. 그 해에 리베라는 록펠러 재단에서 받은 기금으로
뉴욕 독립 노동자학교(Independent Workers School)의 벽화를 그렸다.
1933년 12월 멕시코로 돌아온 리베라는 좌파 지식인들과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찬사를 받았지만, 보수파와 기업주들로부터는 경멸을 샀다.
디에고 리베라, <농민 지도자 사파타>
1931년, 프레스코화, 238.1 x 188 cm,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디에고 리베라, <꽃 축제: 산타 아니타의 축제>
1931년, 캔버스에 납화, 199.3 x 162.5 cm, 뉴욕 현대미술관
1940년대에도 그는 여전히 멕시코의 풍경과 멕시코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사랑했다.
벽화만이 그의 회화 세계의 전부는 아니었으며 농부들의 일상생활 또한 변함없이 화폭 속에 담겨졌다.
꽃이 많은 나라에서 허리가 부러지게 꽃짐을 진 남자, 밀가루 반죽에 온 힘을 쏟고 있는 여인, 차핑고(Chapingo)의 매장,
특히 어린 아이들. 머리털이 없는 멕시코산 개와 같은 여러 동물들, 온갖 종류의 새, 식물, 돌이 그의 그림으로 살아났다. 그
의 회화적 신념은 뚜렷했다. 그는 “쓰레기 같은 외래 유럽 물건을 늘어놓은 문화가 아니라 아메리카의 아름다움을 찾기를” 호소했다.
그러면서 그는 특히 인디언을 사랑했다. 인디언은 그에게 아메리카 전통 문화의 꽃이었다.
디에고 리베라는 1957년 11월 24일 멕시코시티에서 작고했다.
노동자와 농부들, 꽃과 어린아이, 인디언과 멕시코, 현대 산업의 프레스코 걸작들을 남긴 채.
프리다 칼로가 "내 인생의 대형 사고"라 표현했던 디에고 리베라,
처제와 바람을 피웠을 정도로 여성 편력이 심했지만, 남미 미술사에서 그의 존재는 대체 불가능하다고 한다.
도시의 건물을 장식하는 프레스코,1931
초창기.- 새로운 영웅의 서막.
커롤로스 미술학교에서 산티아고 아불, 호세 마리아 벨스코등 교수들에게 지도 받은 시기.
초창기 작품.
믹스코악의 풍경 1904.
어머니의 초상화.
오리사바산의 풍경.
점묘법으로 보이는 '불에 탄 카탈루나의 대지' 1911
스페인 여행- 예술과 혁명의 소용돌이.
베라크루즈 주정부의 장학금을 받아 스페인으로 우학간 시기, 첫번째 부인인 러시아 화가 '안젤리나 벨로프'를 만난 시기이다.
디에고 리베라(나이 23세 때) 첫번째 부인인 러시아 출신 화가 '안젤라 벨로프의 초상화'1909.
손에는 보통 꽃을 드는 그림이 많은데 이그림은 목걸이를 만지고 있다.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만남: 자유로운 영혼들의 만남.
스페인을 여행하며 여러 화가들을 만나 큰 인상을 받고, 작품도 변화.
조각가' 마치니 코프의 초상' 1913
'아르쾨일의 풍경' 1918
퐁파르나스
병이 있는 정물(맨 우측) 외
<'인간의 창조'(La Creacion(Creation)> Diego Rivera, Fresco 1922~23.
이탈리아 여행에서 보았던 프레스코 벽화기법을 응용한 벽화. 프레파라토리아 볼리바르 극장.
중세 종교 프레스코화를 보는 느낌의 멕시코 신화 역사 문화적인 상징을 담아낸 작품이다.
멕시코 귀국 -고향으로의 귀환
고향으로 돌아와 호세 클레멘테 오로스코 등과 함께 미술가협회를 결성하여 활발한 벽화 활동을 한 시기.
멕시코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꽃과 여인 1936
아들과 함께 있는 아버지 1940
잉크화로 그려진 이 작품은 멕시코 민중들의 일상을 화폭에 담은 것이라는...
병아리와 함께 있는 소년. 1935
칠면조를 운반하는 농부. 1944
소년 1921
농부 소년 1937
초상화. 예술가= 혁명가
얼굴은 물론 손까지 뒤틀리게 그려 질투심을 나타낸 디에고 리베라의 두 번재 부인 '루페마린의 초상화'.1924
파리화파 영향으로 표현주의 경향이 두드러진 작품.
여배우의 초상화 1938
'드레이퍼스 부인의 초상화' 1927
까롤로스 펠리세르의 초상화 1936
'나신과 해바라기' 1946
무릎 꿇고 노란 해바라기를 화병에 꽂고있는 구리빛 피부의 원주민 여성,
원시적인 대지의 어머니상, 풍요와 다산성을 나타낸 유화 작품이다.
마지막 러시아 여행. 뜨거운 안녕
프리다 칼로와 결혼, 이혼 다시 재결합, 프리다 칼로가 죽은 후 멤마 우르타도와 결혼,
암 발젼 후 마지막으로 러시아 여행했던 시기
'철도 침몸 나르기' 1956 '수확하는 사람들' 1956
수확하는 사람들 연작.
'철도 침묵 나르기' 1956
제설작업 1956
우주의 지배자 인간.1934
벽화의 중앙에는 오른손으로 기계의 손잡이를 쥐고, 왼손은 다섯 개의 버튼을 누르고 있는 작업복을 입은 기술자가 묘사되어 있다.
또한 화면 좌, 우측에 설치된 커다란 렌즈이 빛이 X자로 교차하고 있다.
고도로 숙련된 기술자를 그린 이 초상은 새롭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우주를 지배하는 인간으로 묘사 되었다.
기술자를 중심으로 화면의 우측은 노동자들이 평화의 행진을 하고 젊은 여성들이 흥겹게 즐기는 장면의 시회주의 세계를 보여주고,
좌측은 상류계급 사회의 도박과 춤, 그리고 술 잔치를 벌이는 장면 등 억압과 전쟁을 수반한 자본주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중심 인물로 묘사된 기술자의 뒤 배경에는 커다란 바퀴 모양이 표현되어 있다.
록펠러 센터 벽화에서 많은 논쟁을 축발시킨 레닌의 모습은 각기 다른 인종의 노동자들이 손을 합치고 있는 형상으로 나타나 있다.
벽화의 하단에는 다양한 곡식과 과일류가 자라나고 있는 것이 보이고, 화면 왼편과 오른편에는 입체감이 드드러진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는
쥬피터(Jupiter)의 상과 목이 떨어져나간 시저(Cesar)의 형상이 묘사 되어 있다.
이는 종교와 과학, 그리고 독재의 몰락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레오 마티즈가 찍은, 디에고와 프리다가 살던 푸른집과 프리다 모습.
가운데 인물이 레오 마티즈. 우측이 디에고.
디에고와 프리다가 살던 푸른집.
레오 마티즈가 직은 프리다 모습.
나타샤 겔만
디에고와 칼로 부부의 친구이자 컬렉터였던 자크 겔만과 나타샤 겔만 부부는 수많은 화가들은 후원하고 작품을 수집했다.
나탸샤 겔만은 특히 프리다 칼로의 작품을 사랑했다.
일요일 오훟 알라메다 공원에서 꾸는 꿈. 1947~ 48
(▲ 위 사진을 클릭하면 글씨를 조금 크게 볼 수 있음)
해골인간 카트리나, 허영을 상징하는 여신, 해골 왼쪽으로 프리다와 디에고가 보인다.
프리다가 들고있는 태극무늬 원은 무엇을 상징한다고 얘기해줬는데 잊었고,
디에고의 주머니에는 개구리가 들어있는데 자신의 눈이 개구리 눈을 닮았음을 나타낸다고 한다.
위 사진 우측의 나무로 만든 것은 디에고가 평소 벽화 그릴 때 사용하던 작업대 이다.
벽화 드로잉 원본.
체험공간 영상실.
세 면 모두 스크린으로 되어있어 롤릴되는 벽화 작품을 모두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정체성을 잃지않기위해 전통의상을 즐겨입던 프리다와 주머니에 어김없이 개구리를 넣고 있는 디에고의 익살스러운 인형,
멕시코 유명 판화가 '호세 과달루페 포사다'가 창조한 해골인간 카트리나(Catrina)
디에고는 유년시절 호세 과달루페 표사다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벽화(일요일 오훟 알라메다 공원에서 꾸는 꿈)에도 카트리나가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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