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마애삼존불과 보원사지 첫 답사는 삼십 여년 전인 1980년대,
그시절 마애삼존불은 단청빛을 입힌 보호각 안에 있어 전등불을 이쪽 저쪽에서 비춰가며... 설명을 들었었다.
오늘은 서산에 있는 일락산 산행 날, 산행 후 돌아오는 길에 만날 수 있는 여건은 되지만,
일행들의 의견이 어떨지 몰라 혼자 답사하기로 맘먹고, 일락산 산행 할 일행들 개심사 입구에서 내려준 후
하산지점인 용현 휴양림을 향해 달려가는 기사님께 부탁하여 삼존불상을 향해 올라가는 입구에서 차 세운 후
혼자 내려 마애삼존불 먼저 둘러본 후 여유있게 걸어 보원사지로 향했다.
보원사지도 오래 전 답사한 적 있지만, 서산 가야산 두 번째 산행 날도 갔으나 여유있게 둘러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서산 마애삼존불상지 입구 계곡물 위로 놓인 다리. 물론 전에는 못본 다리 이다.
계곡을 건너 데크로 된 계단을 오르고 다시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
나무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치니 한결 상큼하다.
전에는 없던 불이문을 지나야 삼존불상을 만날 수가 있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 계곡에 축대를 높이 쌓고 오르내릴 수 있게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가운데 커다란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 국보 84호)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84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본존여래상 2.8m, 보살입상 1.7m. 반가상 1.66m이다.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이 마애불은 암벽을 파서 불상을 조각힌 마애석굴 형식의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마애불상은 햇살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미소가 다르게 보인다고 했기에
종일 있을 수는 없지만, 아침 햇살이 비치기를 기다리느라 조금 기다리기도 하였다.
불상은 삼존형식(三尊形式)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중국의 남북조시대 말기인 제주양식(齊周樣式)이라고 한다.
온유한 조각수법, 반가상의 배치 등 당대신앙의 일면을 엿볼 수 있고, 석불의 아름다움이 배어 있다.
삼존불이 위치한 서산시 운산면은 중국에서 태안반도를 거쳐 부여로 통하던 옛 중국과의 교통로로
600년경 중국불교 문화의 영향을 받아 불교문화를 꽃 피웠던 곳이며 그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바로 이 마애불이다.
세 불상은 가운데가 석가불, 우측 미륵보살(사진에선 좌측), 좌측 제화갈라보살(사진에선 우측) 삼존으로
법화경(法華經) 사상의 백제사회 유행사실을 입증하는 자료로서 백제불교사 내지 사상사 연구에 중요한 구실을 한다.
가운데 제일 큰 여래입상(석가불)은 소발(素髮)한 두상, 풍만한 면상을 특징으로 하며 두꺼운 법의(法衣)가 발등까지 덮여 있고
발 밑에는 간략한 단판연화(單瓣蓮華)가 음각되었으며, 광배는 보주형 두광(寶珠形頭光)의 단판연화가 양각되어 있다
삼존 모두 보주형 두광과 복련 연화좌를 갖추었으며
본존은 묵중하고 중후한 체구로 왼손 끝 두 손가락을 구부린 채 시무외 여원인을 지었다.
육계는 작으며 눈은 행인형(杏仁形)으로 뜨고 백제의 미소로 표현되는 온화한 미소가 얼굴 전체에 퍼져 있다.
통견의 법의는 두텁게 드리워져 몸 전면에 U자형 주름을 형성하고 왼쪽 손목으로 옷자락을 걸쳤다.
가슴에는 Y자형 승각기와 매듭이 있다. 옷자락에는 Ω형 주름이 보인다
우측의 보살입상(여래불)은 머리에 삼산관(三山冠)을 썼고 면상은 약간 긴 편이며, 상반신은 나형(裸形)에 하상(下裳)은 길게 늘어져 있다.
발 밑에는 이중의 단판복련(單瓣複蓮)이 양각되어 있고, 광배는 보주형 두광이다.
머리에 보관을 쓴 채 오른손을 위로 하고 왼손을 아래로 하여 보주를 잡고 있으며 천의자락이 둥글게 U자로 늘어져 두 팔에 걸쳐 있다.
좌측의 반가상(제화갈라보살)은 삼산관을 썼고 상반신은 나형이며 두 팔은 손상되었다.
하상은 매우 얇고, 넓게 옆으로 퍼져 발등까지 덮었으며, 광배는 보주형 두광이다.
삼존불의 통식과 달리 반가상인데 관을 쓰고 상호는 만면에 미소 띤 원만상인데 상체는 나형(裸形)이고 목걸이가 있다.
햇살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다른 팀들이 다녀가며 인증 남기기에 한 컷 부탁 했다.
드디어 삼존불의 얼굴에도 햇살이 들어오고,
미소를 보기위해 옆에서도 찍어보고. 턱밑에 그림자가 생기니 턱이 더 도드라져 보인다.
서산 마애불
박경임
삼국시대부터
바위 속에서 나오기 시작했다는
부처님
아직도 나오고 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몸 뒤쪽은 못 나왔는데
그래도 좋은지
웃고 있다
삼존불 둘러보기를 끝내고 아래로 내려오니 돌에 새겨진 글씨나 연화문이 조각된 돌이 보인다.
1959년 발견당시 사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 계곡의 층암절벽에 여래입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보살입상, 왼쪽에는 반가사유상이 조각되어 있다.
천년의 미소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59년의 일이고 내가 처음 본 것은 그 후 20여년, 그리고 다시 30 여년이 흘렀다.
바위에 새긴 불상을 마애불이라고 한다.
부여박물관장을 지낸 홍사준 관장은 그당시 보원사터에서 많은 유물이 발견되고 있어 그곳에서 유물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홍 관장은 유물을 조사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다른 문화재에 대해서도 묻곤 했는데...
나무를 하던 마을사람이 바위벼랑에 웃고 있는 산신령이 조각되어 있다고 알려줬다.
그렇게 가야산 강댕이골 산속에 묻혀있던 마애여래삼존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발견당시의 지형이 지금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 오랫동안 이 마을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마애여래삼존상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웃고 있는 산신령 옆의 부인이 다리를 포개고 앉아 볼에 손을 대고 놀리자
다른쪽 부인이 약이 올라 손에 돌을 쥐고 서있다는 이 고장의 해학이 담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백제인들의 여유가 친근한 모습의 부처를 만들었다.
얼굴에 미소를 품기도 했으며 부드럽고 잔잔한 표정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마음이 생기게 한다.
6세기 후반부터 7세기 중반에 걸쳐 백제는 국력이 강했고 따라서 불교문화도 함께 번성하며 마애여래삼존상도 만들어졌다.
당시 백제사회에서 불교는 이방인의 종교가 아닌 백제인의 풍요로운 모습이 담긴 백제의 종교였다.
백제인들은 자신들의 독창적인 불교문화를 창조, 더불어 좀 더 대중적이고 친근한 종교로 자리잡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이러한 백제불교를 잘 반영한 것이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이다.
1980년대 처음 답사 왔을 땐 이렇게 단청칠을 한 보호각이 있었다.
보호각 안에는 햇살이 들어올 수 없어 자연 빛 아래에서 볼 수 있는 미소를 만들어 보기위해
전등 불을 들고 이쪽 저쪽에서 비쳐가며 설명을 했었다. 웃지못할 해프닝 시절이 있었다.
1965년 풍화와 인위적인 훼손을 막기 위해 설치됐던 보호각은 내부와 외부 온도와 습도차가 크고 통풍이 안되어
마애삼존불의 변형을 불러올 수 있다는 지적이 있어 지붕과 기둥만 남기고 보호각 벽면을 모두 해체,
다시 많은 논의끝에 지붕까지 완전 철거하고 2008년도에 자연 채광을 받을 수 있었으니
42년 만에 햇빛에 의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온화한 백제의 미소'를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마애삼존불상을 둘러본 후 보원사지로 발을 옮겼다.
마애불이 있는 곳에서 용현계곡을 따라서 더 들어가 보면 비교적 넓은 지대가 나타나는데
그곳이 상왕산 서남쪽 계곡에 자리한 운산면 용현리의 보원사터이다.
상왕산과 가야산은 한 줄기로 이어져 있고, 상왕산(象王山)이나 가야산(伽倻山)이 모두 부처가 머무는 곳이라는 점이 같다.
서산 보원사지에 있었던 사찰에 관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정확한 내력을 알 수는 없으나,
통일신라시대 또는 삼국통일 이전 백제시대 건립된 사찰로 추정된다.
신라시대 최치원(崔致遠)이 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따르면, 화엄사·해인사 등에 더불어 신라 10산 10사찰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보원사지의 면적은 10만 2886㎡이다. 일대의 절터는 모두 경작지로 변하였으나 기와조각 등이 넓게 산재해 있어,
많은 사찰 전각들이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1968년 절터에서 백제시대의 금동여래입상(높이 9.5㎝)과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높이 7.5㎝)이 발견되었다.
사찰 터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백제시대에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그 깊이를 더한다.
보원사에 모셔졌던 불상은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두 구의 불상은 모두 철불로서 석굴암 본존불을 연상시키는 통일신라의 불상과 그 규모가 더욱 큰 고려의 철불이 있어
시대의 흐름에 따른 불상의 변화를 연구하는 데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瑞山普願寺址, 사적 제316호.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에 있는 백제시대 절터.
10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보물 제102호), 당간지주(보물 제103호).오층석탑(보물 제104호) 등의 유물과 초석이 남아 있다
1987년 07월 18일 문화재 지정, 상왕산(象王山, 307.1m) 서남쪽 계곡 근처에 보원마을에 있었으나,
1970년에 이 일대가 ‘삼화목장’에 들어감에 따라 마을 주민들을 모두 이주시켜서 지금은 깊숙한 산 속에 절터만 남았다.
현재 남아 있는 유물로는
석조(石槽), 당간지주(幢竿支柱), 5층석탑(五層石塔)·, 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 법인국사보승탑비(法印國師寶乘塔碑) 등이 있으며,
이러한 유물을 통해서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후 이곳에서 백제 때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금동불입상(金銅佛立像)이 출토되었고,
부근에 백제 때의 마애불로 유명한 국보 제84호인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이 있어,
삼국통일 전 백제시대부터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고려시대의 철조여래좌상(鐵造如來坐像)도 이곳에서 출토된 것이다.
보원사지 5층석탑(五層石塔)·,
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
법인국사보승탑비(法印國師寶乘塔碑)
금당과 오층석탑을 뒤에서 본 모습..
주변에 사람들이 없어 셀카로 한 컷.
석조(石槽), (보물 제102호),
普願寺址石槽, 보물 제102호,
서산시 운산면(雲山面) 용현리(龍賢里) 보원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조물.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02호로 지정되었다.
외곽 길이 3.5m, 너비 1.8m, 높이 0.9m이다
거대한 화강암의 내부를 파내어서 조성한 직사각형의 석조로서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 양식을 따랐다.
대개의 석조가 그렇듯이 사방의 구연부(口緣部)보다는 밑바닥으로 내려가면서 중후한 느낌을 준다.
밑바닥은 평평하며 바닥의 한쪽에 구멍을 뚫어 배수구를 만들었다.
하나의 돌로 조성한 것이며, 내외의 4면은 아무런 장식문양이 없는 소박한 평벽(平壁)이다.
형태가 가장 클 뿐만 아니라 조각수법이 소박하고 웅장하여 당대 석조의 대표격이다.
보원사지에 있는 다른 유물들이 대개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 초기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 석조 역시 그 치석수법(治石手法)이나 양식으로 보아 같은 시대인 10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103호).
아직도 발굴 중인 곳.
산행 후 유적지를 둘러보지 못하고 돌아갈 때는 많이 아쉬웠는데,
혼자서 마애삼존불상과 보원사지를 다 둘러보고나니 마음이 시원하다. .
하산하는 일행들 만나러 다시 용현 휴양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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