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간 천재 화가 '에곤 쉴레'의 불꽃 같은 삶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
클림트가 질투했던 천재적 재능, 사대를 앞서간 천재화가이자 불꽃 같은 삶을 산 예술가
'에곤 쉴레'는 누구인가?
감독 -디터 베르너
주연 -노아 자베다르, 마레지 리크너
제작국가 -오스트리아
청소년 관람불가
에곤 쉴레 Egon Schiele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툴른에서 태어난 에곤 쉴레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매독에 걸린 아버지의 광기로 인해
어린 시절 큰 상처를 받은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매독에 걸린 아버지가 모든 집안 소유물을 아궁이에 던져 태워버린 것,
어머니의 무관심 등은 에곤 쉴레가 짧은 평생 동안 여동생 게르티에 집착하고
자신을 예술에만 몰아치게 한 원동력을 만든 트라우마로 분석되고 있다.
두 살 때부터 무엇인가를 그리기 시작했고 어려서부터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던 에곤 쉴레는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명문인 빈 예술 아카데미에 최연소로 입학 허가를 받으며 천재성을 인정받는다.
하지만 아카데미의 보수적인 학풍에 반대해 학교를 그만두고 ‘신예술가 그룹’을 결성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발전시키며 작품 활동을 펼쳐 나간다.
특히 당대 최고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는 에곤 쉴레의 재능을 아끼면서도 질투했는데,
서로 그림을 교환할 때마다 클림트가 매번 ‘왜 그림을 교환하려 하지? 네 그림이 훨씬 나은데?’라고 한 것은 유명한 일화.
클림트와 쉴레는 서로에게 자극과 영감을 받는 사이였고 클림트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조력자 역할을 했다.
도발적인 인체 묘사로 당시 유럽 화단에서 논란의 중심에 있었지만 시대를 앞서나간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인정받으며 미술사에 한 획은 긋는다. 도발적이고 과격한 터치로 적나라하게 인체를 표현, 금기를 깨고 죽음과 에로티시즘이 결합된 충격적이고 매혹적인 작품들을 남긴 에곤 쉴레는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스페인 독감으로 아내와 뱃속의 아이를 잃고 자신도 짧은 생을 마감한다
영화로 만나는 에곤 쉴레
영화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은 에곤 쉴레의 짧지만 강렬했던 삶을 그의 단 하나의 사랑으로 알려진
발리 노이질을 포함, 그에게 영감을 준 네 명의 뮤즈와의 스토리를 통해 그린 작품이다.
무명의 에곤 쉴레가 그의 인생을 바꾸게 된 거장 구스타프 클림트와 최고의 걸작을 탄생시킨 네 명의 뮤즈를 만나면서
시대를 앞서간 천재 화가로 거듭나는 이야기를 담은 <에곤 쉴레: 욕망이 그린 그림>에서는
미처 알려지지 않았던 에곤 쉴레의 삶과 진정한 사랑, 예술에 대한 열정, 작품에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를 만날 수 있다.
에곤 쉴레의 뮤즈들, 그리고 [죽음과 소녀]
영원한 뮤즈 게르티, 에곤의 여동생, 그의 든든한 지원군이자 첫번째 뮤즈,
지금의 그를 있게 한 첫 번째 뮤즈, 게르티 쉴레
에곤 쉴레의 여동생이자 첫 번째 뮤즈, [체크무늬 옷을 입은 여인]의 주인공이다.
매독으로 아버지가 사망하고 집안이 기울었을 때 에곤 쉴레의 모델이 되어주는 등 그의 예술 활동을 응원한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다.
에곤 쉴레와 남다른 우애를 나누며 그의 영원한 뮤즈로 남는다.
자유를 가르친 모아,
금기된 욕망을 풀어주는 자유로운 영혼의 배두 지망생.
자유로운 영혼, 모아 만두
프라터 극장에서 열렸던 ‘타볼로 비보’ 무대에 섰던 댄서이자 팬터마임 연기자 모아 만두는
에곤 쉴레가 게르티 쉴레 다음으로 찾게 된 뮤즈였다. 에곤
쉴레와 친구들이 체코에서 ‘신예술가 그룹’을 만들었을 당시 함께 했다. 거의 유일하게 자신의 이름을 작품에 남긴 모델이기도 하다.
단 하나의 사랑 빌리,
클림트의 소개로 만나 그의 소울메이트가 되었던 운명의 여인.
단 하나의 사랑, 발리 노이질
에곤 쉴레의 걸작 [죽음과 소녀]의 모델이자, 그의 스승 구스타프 클림트의 소개로 만난 모델 발리 노이질은
그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단 하나뿐인 뮤즈로 알려져 있다. 그림을 팔고, 에곤 쉴레가 감옥에 갇혔을 때
그를 감옥에서 꺼내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전쟁으로 인해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하며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죽음을 함께한 마지막 여인, 에디트 하름스
[줄무늬 옷을 입은 에디트 쉴레]의 주인공인 에디트 하름스는 에곤 쉴레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했던 그의 아내지만
항상 에곤 쉴레를 불신하고 그가 그리는 다른 모델들을 질투하기도 했다. 훗날 에곤 쉴레와 함께 스페인 독감으로 인해 생을 마감한다.
에곤 쉴레의 대표작 중 하나인 '죽음과 소녀'(The Death and the Maiden, 1915)는 그의 모델이자 유일한 사랑으로 알려진
발리 노이질을 그린 마지막 작품으로, 그녀와의 사랑이 끝나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담고 있다고 해석된다.
당대 최고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는 에곤 쉴레의 재능을 아끼면서도 질투했는데,
서로 그림을 교환할 때마다 클림트가 매번 ‘왜 그림을 교환하려 하지? 네 그림이 훨씬 나은데?’라고 한 것은 유명한 일화.
클림트와 쉴레는 서로에게 자극과 영감을 받는 사이였고 클림트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조력자 역할을 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상영 끝나는 엔딩 크레딧 후 안내인이 들어와 영화 내용에 대한 설명을 해주기도 했다.
구스타프 클림트와 에곤 쉴레.
에곤 쉴레.
위 사진은 에곤 쉴레의 작품을 스크린에 비친 모습.< Four Trees,1917>
아래 사진은 맨부커상 수상작인 한강의 채식주의자 표지에 에곤 쉴레의 그림이 인용 된 모습.
시네큐브는 주로 예술영화를 상영하고 있어 가끔 찾는 곳이다.
위 사진은 에곤 쉴레 '백년간의 잠'(임순만 장편소설)
아래 사진은 에곤 쉴레가 그린 네 여인과 자화상.
에곤 쉴레는 오스트리아 출신 이지만 어머니의 고향이었던 체코 체스키크룸로브(Cesky Krumlov)를 좋아했다고 한다.
체스키크룸로브는 5년 전(2012.6.4.) 동유럽 여행시 들렸었던 체코의 작은 마을이지만 무척 아름다워 반했던 곳이다.
그 마을에 에곤 쉴레 아트 센타가 있는데 바쁜 일정으로 들려볼 여유가 없었다.
이발사의 다리 앞에서 사진 찍느라 일행을 잃었다 다시 찾기도 했던 날이다.
28세에 스페인 독감으로 요절한 에곤 쉴레는 많은 일화를 남긴 화가이기도 하다.
인체를 완전히 재해석 하거나 기이하게 묘사하거나 자극적인 에로시티즘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불황, 취업, 절벽, 부조리한 권력을 목도한 젊은이들은
움푹파인 눈, 주름으로 가득한 청년 쉴레의 자화상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염세와 반항이 바탕에 깔린 에곤 쉴레의 그림은 이른바 '헬조선'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기성체제에 대해 갖는 불신과 맞닿아 있다"고 했다.
"쉴레가 살았던 1900년대 초 오스트리아 역시 시대가 원하는 변화을 이뤄내지 못했죠.
겉으론 예의와 규범을 말하면서도 도덕적 타락과 부패가 만연했으니까요,
쉴레는 그 모순과 개인적 삶의 고통을 에로티시즘으로 분출해냈죠." - 조선일보 기사 중 -
자화상
The Poet(Self-Portrait), 1911
인물화
쉴레는 클림트 외에 코코슈카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빈의 빈민가에서 모델을 찾았던 코코슈카처럼 쉴레도 드로잉 모델을 찾아 빈민가를 드나들었다.
코코슈카는 빈민가 이이들의 불결하고 마른 외형적 미학에 관심을 가진데 반해
쉴레는 그 아이들의 외형적 특징뿐 아니라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자 했다.
쉴레는 빈민가에서 만난 깡마르고 핏기없는 아이들을 특유의 신경질적인 시선으로 즐겨 그렸다.
코코슈카는 쉴레가 자신의 양식을 도용했다고 비난했다는 일화도 있지만
일부 양식에서 유사한 점도 있으나 마학적 주제는 아주 달랐다.
쉬레는 클림트와 코코슈카의 그늘을 벗아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만의 예술적 정체성을 추구하였지만
삐뚤삐뚤한 선은 클림트의 영향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클림트는 자신을 작품의 주제로 삼지 않았지만
쉴레는 자신을 인체에 대한 탐구 주제로 삼아 자화상도 많이 그렸다.
쉴레는 인간의 육체를 통해 공포, 죽음, 욕망을 왜곡된 형태와 선으로 표현했고,
시각적이고 미학적인 이상화된 조형 언어로 인간의 영혼을 담아내려 끊임없이 자신과 투쟁 하였다.
오오... 예술이여! 너를 위해서라면 이 몸이 감당하지못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쉴레의 옥중 일기 중에서 -
누드화
쉴레는 스승인 클림트가 에로티시즘으로 포장한 작품 주제를
노골적이고 적나라게 표현하며 클림트도 갈 수 없었던 영역까지 재해석해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였다.
그는 당시 비엔나 사람들의 부도덕하고 위선적인 현실을 특유의 거친 시선을 작품에 투영시켰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복잡한 민족 구성과 보수적이고 귀족적인 체재로 인해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몰락하는 제국의 배에 타고있던 비엔나 시민들은 미술과 무대 예술에 심취했는데
쉴레는 그런 시민들의 욕구에 동요하지 않고 자신이 가고자 했던 길을 갔다.
쉴레가 그린 누드화는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성적인 이미지를 교묘하게 차용하는 작가들과 달리 쉴레의 미학은 훨신 철학적이고 세련되었다.
에로티시즘 자체에 촛점을 맞추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쉴레의 누드화는 에로틱한 것이 아니라 미학적으로 이상화된 이미지다.
그는 자신이나 대상의 신체를 완전히 노출 시키면서 인간의 진지한 눈빛을 강조했다.
쉴레가 몸부림쳤던 에로스는 환희 보다는 괴로움으로 고뇌에 찬 표정으로 자위를 하며 관람자릉 똑바로 쳐다보기도 한다.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여자가 있었듯 쉴레에게도 그런 여인이 있었다.
한때 클림트의 모델이었던 발리 노이질(Wally Neuzil)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상당히 매력적이었던 그녀는 1911년~5년까지 쉴레의 모델이자 애인으로 동거하며 쉴레의 작품할동을 적극 도왔다.
그녀는 쉴레에게 에로틱한 환상의 원천으로 선정적인 누드모델은 물론,
쉴레가 억압된 성적 욕망를 분출할 수 있도록 해주며 헌신적으로 사랑하였다.
노이질은 쉴레에게 버림받아 떠나고, 쉴레는 에디트 하름스(Edith Harms)와 1915년 결혼 하였다.
동거녀 노이질과 빈의 창녀들을 모델로 왜곡된 누드화를 즐겨 그렸던 쉴레는 그 누드화 때문에 옥살이까지 하는 시련을 겪었다.
쉴레는 어린 소녀들을 유혹하고 미성년자들에게 에로틱한 그림들을 보여줘서 그들을 타락하게 했다는 죄로 교도소에 수감 되었다.
"나는 내가 에로틱한 스케치나 수채화를 그렸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그와 같은 그림을 고의로 아이들에게ㅔ 보여주었다는 것,
내가 아이들을 타락시켰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진실이 아니다." - 에곤 쉴레으 옥중 일기 중-
Standing nude Young girl
풍경화, 정물화
쉴레는 약 300점의 회화와 3000여점에 이르는 드로잉을 남겼다.
클림트, 코코슈카와 더불어 오스트리아의 뛰어나 화가로 꼽힌 쉴레는 자신만의 기법으로
인물화만큼이나 풍경화도 독특하게 그렸는데 그의 풍경하는 거칠고 우울하면서도 매우 아름다운 매력을 지니고 있다.
쉴레는 16세에 비엔나 미술학교에 들어가 특별한 재주를 보였으나 당시 보수적인 교육자들은 그의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다만, 미술학교에서 운명처럼 만난 클밈트만이 쉴레의 재능을 매우 높게 평가하였고,
이후 쉴레는 클미트에게 큰 영향을 받고 성장하며 사제의 연을 맺었다.
마치 시를 연상시키는 쉴레의 풍경화는 현실적이지 않지만 시대적 불안 속에서
내면적인 고독과 욕망의 억압으로 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했던 예술가의 혼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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