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春)이 들어선다는 '입춘(立春)'은
24절기 중 첫번째 절기로 대한(大寒)과 우수(雨水) 사이에 있다.
24절기는 기본적으로 태양의 궤도인 황도의 움직임을 기본으로 정해지므로 양력 날짜에 연동된다.
입춘은 태양의 황경이 315°인 날로 대개 2월 4일이나 5일이다.
입추로부터 꼭 반년째 되는 날이며,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을 써서 문에 붙여 집집마다 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했다.
입춘단상
박형진
바람 잔 날
무료히 양지쪽에 나 앉아서
한 방울
두 방울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녹아내리는
추녀 물을 세어 본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천원짜리 한 장 없이
용케도 겨울을 보냈구나
흘러가는 물방울에
봄이 잦아들었다
1992년, 창비
희망, 그 입춘 사이
곽진구
겨울 내내 낡은 양철지붕은
펑펑 쏟아 붓는 함박눈을
잔치 집 밥상처럼 느긋이 먹어치우고선
입을 쓱쓱 닦고
그 자리에 하늘빛 고드름을 내어 달아
열두 가얏고 소리를
낙숫물과 함께 참 이쁘게 그려냈는데,
그 소리엔
막 글을 깨친
첫째의 책 읽는 소리도 함께 섞여 있어서
하루종일
듣기가 여간 좋은 게 아니었다
이런 날은
으레 일도 없이
빈둥빈둥 천장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나에게
그런 소리를
소중히 나누어 들으라고,
아내는 나를
무릎에 뉘여 놓고
오래도록
귓밥을 파주고 있었다
입춘
오정방
아직도
겨울은 그대로 머물러 있다
산마루에도
계곡에도
들판에도
그 잔해가 늑장을 부리고 있다
겨울 속의 봄인가
봄 속의 겨울인가
간단없는 시간은
누구도
거꾸로 돌릴 수 없다
이미
봄은 문턱을 넘어왔다
지필묵을 준비 못해
입춘대길은
마음에만 새긴다
입춘
유승희
봄 앞에서 선 날
좋은 날만 있어라
행복한 날만 있어라
건강한 날만 있어라
딱히,
꼭은 아니더라도
많이는 아니더라도
크게
욕심부리지 않을지니
새 봄에
우리 모두에게
그런 날들로 시작되는
날들이었으면 싶어라
매서운 추위 걷히고
밝은 햇살 가득 드리운
따스함으로
뾰족이 얼굴 내미는
새순처럼
삶의 희망이 꿈틀거리는
그런 날들이었으면 싶어라.
입춘 이야기
박얼서
잔설 속에 숨어
밤새껏 몸을 뒤척이던
동백이
복수초가
여기저기서
새봄맞이 길을 닦느라
재잘거리는
입춘이야기를 듣는다.
이젠 더 이상
주체할 수 없는 태동
어차피 잘려나갈 겨울 긴 꼬리
아직은 좀 이른 셈인데
꽃망울을 붙들고
서로 밀치고
잡아당기며
서리꽃 앞다투어
지는 소리를 듣는다.
입춘
박인걸
분홍 빛 꽃잎이 흩날리던
바람 잦은 산길을 돌아
내 곁을 훌쩍 떠난 그대 소식에
아직도 애달프더니
눈보라 사납게 흩날리는
얼어붙은 강둑을 걸어
꽃눈 틔우며 내게로 온다는
그대 소식에 설레는 마음
헤어지자는 말도 없이
아쉽게 가버렸지만
아직도 못 잊어하는 마음
그대 어찌 알았을까
대문 활짝 열고 뛰어나가
플래카드 내걸어 환영하며
그대 오시는 앞길을
빗자루로 쓸어 드리리다
입춘
공석진
입춘이란다
무심한 짧은치마는
한파를 비웃고
쇼윈도 마네킹은
화려한 꽃무늬로
입춘을 반긴다만
폭설로 고개 넘기를 포기하고
먼길을 우회하는
심정은 어쩔 것이냐
서울역 행려병자의
객사하는 산송장을
옆에 두고
속없는
세상 사람들의
봄 타령은 어쩔 것이냐
입춘이란다
체감하기 어려운
봄은 다가오는데
내 마음의 한파는
도무지 풀릴 줄 모르는데
입춘이란다.
입춘 추위
권오범
평년보다 유별나게 행세했던 동장군
제 기념일인 대한도 모른 채 한눈 팔아
꼬리를 사리나 싶더니
그러면 그렇지 제 성깔 남 주랴
정상적으로 오르내리던 온도계 혈압이
봄의 문턱에서
지하로 급격히 추락해
온기 사라진 살벌한 세상
계절도 시기가 만만찮아
호락호락한 봄에게
그렇게 쉽사리
자리 비켜주기가 싫은 게야
다짜고짜 다가와 주물러대는
뻔뻔스런 봄의 끄나풀 아양 못 이겨
제풀에 지쳐 스러지는 그날까지
또, 얼마나 발악을 할는지
가시나무 입춘
김영천
채 겨울도 떠나지 못한 들판에서
미리 푸른 것들이야 계절의 전령으로
치지
오메, 벌써 봄인갑다, 그리 오두방정으로
좌정치 못하고 들썩거리기 시작할라치면
이제 돌아오는 봄을 어찌 다 견디겠는가
낮고 볼품없는 밭두렁이나 언덕배기로부터
코딱지풀꽃이나 냉이꽃, 술꽃들이 서둘러 피어나면
듬성듬성 이름도 설운 오랑캐꽃이 또
피어나고
그러다 환장하도록 노오란 빛깔의 꽃들이
폭포처럼 쏟아져내릴 터라
미리 조심스럽다
매양 사는 꼴이 똑같아
하나도 더 나아지는 법이 없어
늘 초라하고 곤란하면서도
어찌 봄을 또 그리 겨워하는지
야윈 두 팔로는 햇빛을 가득
안으며
마른 가지마다 톡톡 움을 틔어볼까,
하는갑다
하찮은 바람에도 호들갑을 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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