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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
유희경
네가 두고 간 커피잔을 씻는다
그런데도
아직 네가 여기 있네
책장에 기대서서
책을 꺼내 읽고 있네
그 책은 안 되는데
안 되는 이유가 뭘까
손이 다 젖도록 나는
생각해 본다
그 책은 옛일에서 왔고
누가 두고 간 것일 수도 있다
얼마나 옛일일까
두고 간 사람은 누구일까
그렇다 해서
네가 읽으면 안 될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젖은 커피잔을 엎어두고
젖은 손을 닦으려 하는데
엎어둔 건 커피잔이 아니었고
곤란하게도
젖은 내 손이었다
커피잔 대신 손을 엎어두었다고
곤란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젖은 내 손은 옛일과 무관하고
네가 꺼내 읽을 것도 아니다
성립하지 않는 변명처럼
오늘은 볕이 좋다 아직
네가 여기 있는 기분
너는 책에 푹 빠져 있고
손은 금방 마를 것이며
네가 두고 간 커피잔은
어디 있을까 나는
체념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유희경
1980년 서울 생, 서울예술대학에서 문예창작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극작 전공.
조선일보 신춘문예 통해 시인 등단, 시집 『오늘 아침 단어』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이다음 봄에 우리는』 『겨울밤 토끼 걱정』과
산문집 『반짝이는 밤의 낱말들』 『세상 어딘가에 하나쯤』 『사진과 시』가 있다.
현대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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