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218(화) '25년 우수
절기가 우수로 접어드니 햇살도 따뜻해 지고 추위가 풀리는 기분
꾀 부리는 하루 하루, 우수에 관한 시를 모아 보았다.

우수
김명수
눈 녹은 우수(雨水) 날
외출에서 돌아오는 골목 안
야트막한 북향집
대문은 삐끗 열려 있고
응달진 마당 구석
아직도 덜 녹은
때에 절은 눈 더미가
쌓여 있는데
겨우내 묶여 있던
수척한 개 한 마리
목줄 묶인 채 대문턱에 나앉았다
눈에 회백 내려앉은
눈굽 아래 두 줄
절은 듯
적갈색, 눈곱 눈물줄기 흔적
본래 흰빛일
때에 절은 털빛은 희읍스레한데
파리하고 여윈 그 개
지나치는 나를 보고
꼬리를 사린다
돌아와 불 끈 잠자리에서
응달에 묶여 있는
그 개와 더불어
결핍과 격리 속
또 다른 생명들
영어(囹圄)의 생명들도
우수(憂愁)의 그림자를
겹쳐 보인다
- 김명수,『곡옥』(문학과지성사, 2013)
雨水
안상학
오늘은 늦은 점심을 해먹고 뒷동산에 올랐습니다
춥고 바람은 아렸습니다
새로 생긴 무덤 두 개가 추워 보였습니다
마른 나뭇가지들은 겨울에도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습니다
산 너머 마을까지 느릿느릿 걸었습니다
다 말라버린 것 같은데, 다 얼어 있는 것만 같은데
이게 무언가, 성질 급한 버들강아지 몇 마리
물기 없는 가지에 머리를 묻고 옹송그리며 저녁잠을 청하고 있네요
오늘내일 비는 당연히 돌아온다는 듯이 내리기라도 하면
버들강아지들은 머리를 털고 줄을 지어 냅다 달려갈 테지요
- 안상학,『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실천문학사, 2014)
우수
윤은경
비가 오네 비야 오려무나
고집불통의 부드러움이여
맥없이 굴러만 가던 시간의 골짜기, 어둠 깊은 곳에서
내 뇌리의 통점만 밟아오는
희망의 악마구리 울음소리
흰 종이 같은 불안한 다리를 건너
마른 나의 땅으로 오는
눈물겨운 손님
오려무나 비
열어주마 이제
네 순은의 날카로운 발톱에
콸콸 피 흘리고 싶은
부드럽고 따뜻한 나의 대지를
- 윤은경,『벙어리구름』(시선사, 2005)
雨水
최하림
우수라는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면서
무심히 창을 여는데 길 건너편 슬레이트 지붕 아래로
달려들 듯 노을이 흘러가고
가는 바람이 흘러가고
볼이 붉은 아이가 간다
누가 스위치를 눌렀는지
어두운 창이 밝아지면서
추녀가 높이 솟아오르고
불분명한 시간들이 산허리를 타고
강둑 버드나무숲 쪽으로 휘어져간다
- 최하림,『풍경 뒤의 풍경』(문학과지성사, 2001)
우수
고재종
모진 돈들막 귀영치의
씨톨 하나도 깨우는 속삭임이여
논두렁 밑 양지녘엔
벌써 저리 냉이꽃 반짝이네
얼음에 뜬 애보리조차
지상으로 힘껏 떠미는 뜨거움이여
덧짚 걷어낸 마늘밭엔
벌써 저리 마늘촉 서늘하네
보리밭 너머 저 지평선에서
웬 것인지 둥둥둥둥 울려나는
북소리는 또 무엇인가
비 젖는 비 젖는 남밭들엔
오늘 그예 청청한 경운기 소리
- 고재종,『날랜 사랑』(창작과비평사, 1995)
우수 무렵
박재삼
입춘을 지나
우수(雨水) 무렵으로 오면
아직 분명히 나무는 벗은 채
찬바람에 노다지로 몸을 내놓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어딘가 회초리를 맞아도
옛날 서당 훈장의 그것 같아
사랑의 물끼가 실려 있고,
멀리서 보면
아지랑이가 낀 듯하고,
조금은 이지럼증도 섞여 들더니
드디어 울음을 터뜨릴
기운까지 얻고 있는
한마디로
눈부신 경이(驚異)가 묻어 있구나.
- 박재삼,『해와 달의 궤적』(신원문화사, 1990)
우수
안도현
그리운 게
없어서
노루귀꽃은 앞니가
시려
바라는 게
없어서
나는 귓불이 발갛게
달아올라
내소사 뒷산에
핑계도 없이
와서
이마에 손을 얹는
먼 물소리
- 안도현,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창비, 2020)
우수에 젖다
최영철
문밖으로 쫓겨난 겨울이 우수에 젖어 있다
이대로 짐 꾸려 돌아갈 것인지
좀 더 분탕질을 할 것인지
잠시 눈치를 살피는 눈치
문밖에 기다리고 있던 봄맞이꽃이
한 발짝 안으로 발을 떼어본다
껴입고 온 외투를 벗을 것인지
슬슬 향기를 날릴 것인지
잠시 눈치를 살피는 눈치
아직 두 눈 시퍼런 겨울 장벽 위로
우수수 떨어지는 비
시린 장벽을 녹일 것인지
거기 그대로 얼어붙을 것인지
잠시 눈치를 살피는 눈치
입춘과 경칩 사이 턱을 괴고 앉아
이대로 꽃피워도 좋겠냐고
문 박차고 나와도 되겠냐고
태산 같은 걱정을 안고
우수憂愁에 젖는 우수雨水
- 최영철,『금정산을 보냈다』(산지니, 2015)
우수서 경칩까지
정일근
웅달에 녹지 않은 잔설이
겨우내 동면동물처럼 웅크리고 있다
저건 버려진 땅의 추운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우수서 경칩까지 같이 걸어와 보니, 아니다
응달에 쑥 수북하다, 산수유꽃 터진다
저건 어느 땅 한줌이든 버리지 않는
은현리의 가르침, 부지런히 볕 찾아
청솔당 문 앞 시멘트 바닥 갈라진 틈새마다
봄까치꽃, 별꽃 스스로 지천이다
- 정일근,『소금 성자』(산지니, 2015)
우수(雨水) 지나고
조명제
봄이 온다고
은하의 모래밭에는
쑥잎 돋는 봄이 온다고
낯익은 듯한 새가 한 마리
창가에 와서 지저귄다.
우수 갓 지난 무렵의 골목 끝
하늘을 보니 생각나다.
앵두나무 가지 너머
우리의 아픈 별 지구에도
봄이 온다는 것이.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봄날은
기적처럼 온다는 것이.
우수雨水 이후
김수우
왜 노랑멧부리새를 좋아하나요
그냥요
왜 오래된 사랑을 나비처럼 놓아주나요
그냥요
왜 어제 본 영화를 다시 보나요
그냥요
건널목에 언덕길에 무덤가에
잎눈, 잎눈, 잎눈 돋는다
사는 데에 이유를 대지 않아도 되는
그냥, 봄
- 김수우,『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시와시학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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