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을 줍다
이 원규
이미 저버린 꽃은
더 이상 꽃이 아닌 줄 알았다
새야,
시든 꽃잎을 물고 우는 동박새야
네게도 몸서리 쳐지는 추억이 있느냐
보길도 부용마을에 와서
한겨울에 지는 동백꽃을 줍다가
나를 버린 얼굴
내가 버린 얼굴들을 보았다
숙아 철아 자야 국아 희야
철 지난 노래를 부르다 보면
하나 둘
꽃 속에 호얏불이 켜지는데
대체 누가 울어
꽃은 지고 또 지는 것이냐
이 세상의 누군가를 만날 때
꽃은 피어 새들을 부르고
이 세상의 누군가에게 잊혀질 때
낙화의 겨울밤은 길고도 추웠다
잠시 지리산을 버리고
보길도의 동백꽃을 주으며
애송리 바닷가의 젖은 갯돌로 구르며
지지않는 꽃은
더 이상 꽃이 아니라는 것을...
경아 혁아 화야 산아
시든 꽃잎을 물고 우는 동박새야
한 번 헤어지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장인 줄 알았다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원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노고단 구름바다에 빠지려면
원추리 꽃무리에 흑심을 품지 않는
이슬의 눈으로 오시라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굳이 지리산에 오려거든
불일폭포의 물방망이를 맞으러
벌 받는 아이처럼 등짝 시퍼렇게 오고
벽소령의 눈시린 달빛을 받으려면
뼈마저 부스러지는 회한으로 오시라
그래도 지리산에 오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 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고
최후의 처녀림 칠선계곡에는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으로만 오시라
진실로 진실로 지리산에 오려거든
섬진강 푸른 산그림자 속으로
백사장의 모래알처럼 겸허하게 오고
연하봉의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
그러나 굳이 지리산에 오고 싶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아무렇게나 오시라
그대는 나날이 변덕스럽지만
지리산은 변하면서도 언제나 첫마음이니
행여 견딜 만하다면 제발 오지 마시라
검은테의 안경 그 너머
이 원 규
깊은 주름살 속으로
비는 제 나름의 근심으로 내리는데
다시금 비의 물음표 하나
고개 떨군 풀잎 주변에 가서는
나부끼는 풀잎의 몸짓이다가
눈물의 강변에서는 새삼
비가 몇 소절의 흐름이 되지만
어머니 가까이 가서는
어째서 그냥 비가 되는 것일까
거듭 거꾸러지는 비는
저마다의 절망으로 내리는데
어머니 불면의 무릎뼈 아래
우기를 예감한 개미떼들의 행렬을 따라
나는 정작 어디로 가는 것일까
만성기관지염의 어머니
무덤 속 칼칼한 기침 소리 따라
아픈 부호로만 내리는 비
지금 뜨락엔 깊은 생각에 잠긴
흰 고무신 한 짝
1962년 경북 문경 출생.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빨치산 편지》《지푸라기로 다가와 어느덧 섬이 된 그대에게》《돌아보면 그가 있다》
산문집《벙어리 달빛》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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