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정 호승 - 부치지 않은 편지,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길, 추억이 없

opal* 2007. 8. 8. 02:17

 

 

부치지 않은 편지

 

                      정 호승

 

그대 죽어 별이 되지 않아도 좋다

푸른 강이 없어도 물은 흐르고

밤하늘은 없어도 별은 뜨나니

그대 죽어 별빛으로 빛나지 않아도 좋다.

언 땅에 그대 묻고 돌아 오던 날

산도 강도 뒤따라와 피울음 울었으나

그대 별의 넋이 되지 않아도 좋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 길을 멈추고

새벽 이슬에 새벽 하늘이 다 젖었다.

우리들 인생도 찬비에 젖고

떠오르던 붉은 해도 다시 지나니

밤마다 인생을 미워하고 잠이 들었던

그대 굳이 인생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정 호승

 

이제는 누구를사랑하더라도

낙엽이 떨어질 때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왜 낮은 대로 떨어지는지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한 잎 낙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시월의 붉은 달이 지고

창밖에 따스한 불빛이 그리운 날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도더도

한 잎 낙엽으로 떨어져 쎡을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한 잎 낙엽으로 썩어

다시 봄을 기다리는 사람을 사랑하라

 

 

 

                  정 호승

 

님 그리며 길을 걷는다

길을 걸으며 님 그린다

꽃은 잎을 보지 못하고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님 그리며 길을 걷는다

길을 걸으며 님 그린다

 

 

추억이 없다

 

                    정 호승

 

나에게는 무덤이 없다

바람에게는 무덤이 없다

깨꽃이 지고 메밀꽃이 져도

꽃들에게는 무덤이 없다

 

나에게는 추억이 없다

추억으로 걸어가던 들판이 없다

첫눈 오던 날 첫 키스를 나누던

그 집 앞 골목길도 사라지고 없다

 

추억이 없으면 무덤도 없다

추억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

꽃샘바람 부는 이 봄 날에

꽃으로 피어나던 사람도 없다

 

 

끝끝내

 

             정 호승

 

헤어지는 날까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헤어지는 날까지

차마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그대 처음과 같이 아름다울 줄을

그대 처음과 같이 영원할 줄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순결하게 무덤가에 무더기로 핀

흰 싸리꽃만 꺾어 바쳤습니다

 

사랑도 지나치면 사랑이 아닌 것을

눈물도 지나치면 눈물이 아닌 것을

헤어지는 날까지 알지 못하고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끝끝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습니다.

 

 

보길도에서

 

                   정 호승

 

내가 마신 물이 피가 되지 않을 때

내가 흘리 피간 물이 되지 않을 때

세연정 동백꽃은 한 순간이 뚝 뚝

모가지를 놓아 버리고

나는 정신없이 동백꽃을 주워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