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불 조심 기간이 끝나고 두 달만에 개방된 국립공원 덕유산 종주를 나섰다.
오전 8시 육십령(734m)도착, 남으로는 경남 함양, 북으로는 전북 장수를 잇는 고갯마루다.
"백두대간 덕유산 산행기점, 삿갓재 대피소 13km, 소요시간 7~8시간, 09시 이후 종주는 조난사고 위험으로 산행을 금합니다."
빨간 글씨가 섞인 오래 전에 만든 넓은 나무판자 팻말이 나무 아래 살짝 가려져 있다. 아직 제거하지 않은 입산금지의
노란 금줄 아래로 몸을 구부려 들머리를 들어선다. 어제 종일 내린 비로 초목이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고 새로 돋는 잎 끝마다
물방울이 영롱하다. 풋풋한 흙냄새 풀냄새가 코 끝을 자극한다. 이른 아침 대자연 속에 묻혀 걷는 발검음이 무척 가볍다.
신선한 아침공기가 허파 속 깊숙히 들어오며 온 몸을 감싼다. 세속과의 단절감을 느끼니 한결 기분이 좋다.
백두대간 종주 첫 산행을 빼재(신풍령, 수령)에서 출발 했기에 향로봉을 제외한 마지막 구간이라 의미가 깊다.
진부령 북쪽에 위치한 향로봉은 군부대의 허락하에 갈 수 있는 곳이라 백두대간 종주 구간에 포함시킬 수도, 제외시킬 수도 있다.
백두대간 종주 산행 시작한지 2년 4개월 만에, 벼르고 벼르다 마지막 구간의 첫 발을 내딛는 이 기분은 말과 글로
표현하기 어렵다. 마음은 한없이 하늘을 향해 붕 떠올라 양 팔을 옆으로 쭉뻗어 올리며 걷는다.
사람들은 기분이 좋을 때 왜 흥얼거리며 손을 들어 올리는 몸짓이 나오는 걸까? 이런 행동을 일컬어 가무라 하던가?
5월이라고는 하지만 뺨에 와닿는 바람은 아직도 차다. 젖은 낙엽을 밟는 촉감이 아주 부드럽다. 삿갓골재 대피소에서
1박 할 생각을 하니 한없이 여유로워지며 즐거움이 배가 된다. 산악회의 산행일정 계획 중 백두대간 종주 계획이 취소되어
좋은 계절을 이용하여 개인적으로 나섰다. 계획 대로 산행을 했으면 1월에 끝낼 수 있는 것을 한 구간을 남겨논 상태에서
이런 저런 핑계로 미루고 있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종주가 끝나더라도 계속 더 걷고 싶은 마음은 아쉬움이
크기 때문일까? 솔밭에 뽀얀 분위기를 만들고 안개 한 무리가 지나가며 시원함을 더해준다.
여유로운 걸음으로 40분을 걸어 바위 전망대에 오르니 육십령 고갯마루가 금방 발 아래로 떨어진다. 오래 전에 걸었던 깃대봉과
백운산, 장안산이 가까이서 반긴다. 몇 발자국 더 오르니 앞에 할미봉(합미봉) 바위들이 좌우로 펼쳐지며 내려다 본다.
시야를 가리는 나뭇가지를 피해 옆으로 서서 마주보니 할미봉을 기준으로 서봉(장수 덕유산)과 남덕유, 우측으로 Sky Line이
180도 파노라마로 펼진다. 어두운 밤 시간에 종주하는 이들은 이런 장엄한 모습을 감상할 수 없겠다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발로 딛고 있는 이끼낀 커다란 바위에 오래 전에 일부러 파놓은 듯한 동그란 구멍들은 어떤 역사성이 있는 걸까?
헬기장 도착하니 08:55, 바람은 차지만 햇살은 따갑다. 걸음을 잠시 멈추고 자켓 벗어 가방에 넣는다.
할미봉(일명 합미봉, 1026.4m) 암봉에 오르니 09:30, 함양 304번 삼각점이 있다. 조망 안내판엔 멀리 지리산 천왕봉까지
나타나 있으나 내 육안을 구별이 안된다. 대신 남덕유산 뒤로 고개만 살짝 내민 무룡산과 인사 나눈다.
이 멋진 조망의 맛을 어디에 비교하랴, 환희의 함성을 가슴으로부터 내지른다.
안내판에 누군가가 '합미봉'으로 적어 놓았다.
옛날 한 도승이 이 산속에 우리나라 군사가 수 년 먹을 쌀이 쌓여있는 격이라하여 '합미봉'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유래와,
국토 지리 정보원의 지명 일람표에 '합미봉'이라고 고시(1961년)되어 있다고 한다.
육십령 초입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에 군장동(軍藏洞)이라는 마을이 있다. 예전에 군사를 숨겨둔 곳이라는데서 유래된 이름 이란다. 숨겨둔 군사와 군량미는 관계가 깊으니 '합미봉'이 더 어울리겠다. 지명이 하나로 통일 되었으면 좋겠다.
합미봉에서 내려딛는 내리막 바위는 절벽 상태라 위험하다. 출발 전에 이곳이 제일 걱정되었기에 잔뜩 긴장 된다.
매듭 있는 굵고 가느다란 밧줄을 교대로 잡으며 내려딛으니 아래로 늘어진 밧줄이 또 있다. 서너 번 반복되는 비좁을 돌 틈을
무사히 내려서서 안도의 숨을 내쉬며 두루 두루 감사 드린다. 눈 쌓인 겨울 산행 땐 위험 하겠다.
낮은 봉우리들을 오르내리며 고도를 높혀 넓은 터에 올라섰다(10:20). 내가 앞으로 가는 만큼 뒤로 물러 서는지
합미봉에서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이던 서봉과 남덕유산은 쉽사리 다가오지 않는다.
가지 끝에 겨우 새 순을 달고 있는 나뭇가지 사이로 따뜻한 햇살과 차가운 바람이 적당히 도와준다.
밟기도 아까운 진분홍 꽃잎들이 등산로에 널부러져 있다. 지금 이곳은 진달래가 지기도하고 피기도 한다.
해발 900m 봉에 오르니 경남 뎍유 교육원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고, 20 여분 뒤에 또 갈림길이 있다.
오늘 처음 만난 이정표(육십령 5.2km, 남덕유 3.6km, 교육원 1.6km)를 보니 여기부터 국립공원 인가보다.(10:55)
어제 내린 비로 고랑이 생긴 고운 모랫길 등산로엔 발자국이 하나도 없다. 두 달만의 첫 손님을 맞이 해서 그런가 보다.
이곳 부터는 계속 오르막, 오를수록 골바람이 세게 불어오며 바람 소리가 무섭게 들린다.
산죽나무 오솔길을 지나니 손잡고 봄놀이 나온 아가 얼굴같이 하얀 개별꽃, 노란 양지와 제비꽃, 보라색 제비꽃들이 만발하여
꽃들과 얘기 나누며 헬기장에 오른다.(11:10) 정상은 멀었는데 벌써 세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어쩌랴, 기다리는 사람도 재촉하는 사람도 없으니, 나무와 바람과 돌과 구름과 새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마냥 즐겁다.
돌아서서 지나온 능선을 바라보니 백운산 앞 영취산과 깃대봉 사이 아래로 오동제 저수지가 긴 시간의 산행을 걱정해 주듯
바위 전망대부터 한동안을 계속 쳐다보고 있다, 위험하다던 합미봉은 한 번 안기고 나니 이젠 보면 볼 수록 정겹게 다가온다.
남덕유산이 잘 보이는 오르막에 한 사람이 추월을 한다. 뒤에도 몇 사람이 더 올라오고 있다.
호젓한 산죽 사이를 지나 가파르게 치고 오르며 속도를 줄이니 한결 편하다. 가파른 오르막이라 머리를 숙이니
모래가루에 반사된 빛이 보석가루 뿌린 듯 찬란하다. 땅은 촉촉하게 젖어 있어 먼지도 없다.
서봉과 남덕유산이 사이좋게 보이는 전망좋은 바위에서 남덕유산 배경으로 폼잡고 기념 남긴 후 바위사이로 늘어진
밧줄을 잡고 내려딛는다. 능선따라 내려설수록 서봉은 더 높게만 보인다. 뒤돌아 바라보니 지나온 능선이 겹겹이 발아래
일렬로 늘어서며 점점 육중한 산으로 변한다. 소복하게 만개한 진달래 뒤로 보이는 서봉의 바위들이 일품이다.
바위 위로 보이는 파란 하늘의 흰구름 조각은 풍광을 더 빛내 주니 헬만 헷세의 시가 생각 난다.
흰 구름 /헤르만 헤세
오 보아라,
잊혀진 아름다운 노래의 조용한 멜로디처럼
푸른 하늘가를 계속 떠도는 구름을,
긴 여행 속에
방랑의 슬픔과 기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흰 구름을 이해할 수 없으리.
나는 태양이나 바다나 바람을 사랑하듯,
정처없이 떠도는 흰 구름을 사랑한다.
고향이 없는 자에게 그것은
누이이며 천사 이기에.
고도가 높은데도 불구하고 돌에 달구어진 지열이 산죽 사이 오솔길을 덥게 만든다. 해발 1300m,
남덕유 2.0km, 육십령 6.8km 이정표가 있다(12:30), 바위 틈을 비집고 올라서도 서봉 정상은 왜이리 멀기만 한지...
교육원 건물과 영각사를 내려다보며 얼음물로 목을 축이고 다시 가파르게 오르니 웬걸? 역시 짐작은 금물이다.
앞에 제일 높게 보인 암봉이 서봉 정상인줄 알았더니 착각 이었다. 정보없이 온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거대한 암봉 뒤 건너편에서 서봉 정상 팻말이 웃고 서있다. 연줄 늘어진 모습으로 선을 이루며 남덕유와 이어져 있다.
1492m의 서봉(장수 덕유산)은 그렇게 웃으며, 작년 2월 삿갓봉에 하얗게 쌓인 눈 위에서 가슴 설레며 바라보던 나를
반가이 맞아주니 感慨無量(감개무량) 하다.(13:15). 남덕유, 삿갓봉, 무룡산, 중봉, 향적봉까지 덕유 능선이 장엄하게
一望無際(일망무제)로 펼쳐진다. 뒤로의 백두능선은 아름다운 합미봉에서 백운산으로 이어지며 봉화산까지 가물 거린다.
날씨가 쾌청하면 지리산도 보이겠다. 옆 봉우리 정상 헬기장에선 단체로 온 이들이 식사 중이다.
서봉 큰 바위 아래 아늑한 곳에 자리잡고 오찬을 즐긴다.
철계단과 돌길로 가파르게 이어진 안부에 내려서고, 다시 남덕유를 향해 오른다. 발길에 차이는 돌들과 나무뿌리 사이,
산죽 아래 핀 보라빛 현호색과 노란 양지꽃이 힘들지 말라고 응원해 준다.
14:25, 갈림길에서 삿갓봉으로 직접가는 길과 헤어져 우측 남덕유산 정상을 향해 한 발 한 발 올려 딛는다.
하늘가에 떠돌던 흰구름 조각 하나가 해를 가리니 와 닿는 바람이 더 차다. 가파른 능선에 속도를 늦추니 올려딛기가 훨씬 수월하다.
단체산행이 아니라 여유롭다, 남덕유 정상이 보일만도 한데 보이질 않는다. 이름값을 하는지 네 발로 기어오르다시피 해야하는
급경사 바위 길이다. 남덕유는 북덕유의 부드러운 육산과 달리 날카로운 바위로 이루어져 산세가 거칠다. 오르는 중 갈림길을 또 만난다.(14:40). 이곳에서 남덕유 정상까지는 1.0Km 거리, 동엽령에서 걸어오며 삿갓봉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토록 마음 설레게하던
남덕유산, 백두대간에서 약간 비켜 서있는 산이지만 아무리 힘들고 지루해도 여기까지 와서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드디어 남덕유 정상(14:50), 덕유산의 두 번째 높은 봉우리로 경남 함양군, 거창군, 전북 장수군을 경계로 한다.
한 팔에는 주봉인 향적봉(1,614m) 15km, 다른 한 팔에는 영각 통제소 3.4km를 나타내는 두 팔 벌린 이정표가
푸른 하늘 배경으로 높다랗게 외로이 서있다. 산이 높고 평일이라 그런지, 아니면 교통이 불편해 그런지,
유명세 있는 다른산 같으면 정상석 부여잡고 기념사진 포즈 취하는 인파로 붐빌텐데 이름값에 비해 너무 호젓하다.
표시된 해발높이는 노고단과 같은 1507m 이다.
지리산 다음으로 웅장한 산세가 연봉을 이루고 있는 '크고 넉넉한 德裕山', 남덕유산 정상석 옆 바위에 앉아 잠시 휴식 취하며
봉우리들을 바라본다. 향적봉을 향해 내 달리는 장쾌한 주능선이 한 눈에 시원스레 조망된다.
삿갓봉, 무룡산, 백암봉, 중봉, 향적봉 등 1000m가 넘는 고봉들이 능선에 줄지어 서있다.
삿갓봉에서 하염없이 바라보던 남덕유, 지나온 육십령과 합미봉은 까마득히 보이고 서봉 모습은 한층 더 의젓하다.
영각사로 이어진 가파른 철계단은 폭이 좁아 뵌다. 긴 철계단을 안고 있는 암릉은 하늘을 찌를 듯 날카롭다.
남덕유의 명물인양 많은 사람들이 철계단에 매달려 있다. 언젠가 저곳으로 올라와 보고싶다.
발 아래 보이는 함양 땅 마을은 평화롭기만 하다. 산에서 보이는 모습 대로 평화롭게 살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한참을 머물고 가파른 돌계단을 내려 딛는다. 300m 내려 딛으니 갈림길, 육십령이 8.5km로 표시되어 있다.
능선따라 내려 딛다 보라빛 '처녀치마'를 만나니 얼마나 반가운지, 얼른 카메라 렌즈를 들이댄다.
철기둥에 매어진 굵은 철사 줄을 잡고 바윗길을 오르고 내려 딛는다.
남덕유산과 삿갓봉 사이에 있는 월성치(月城峙,1240m)도착하니 오후 4시, 육십령에서 8시간이 걸렸다.
작년 2월 병곡에서 동엽령으로 올라 역 산행하며 월성치에서 황점 마을로 하산 했었다. 월성치에서 육십령까지 오늘 걸은
한 구간만을 남겨논 채 이날을 기다렸으니 1년 3개월 만의 일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오게 될 줄은 미쳐 몰랐다.
월성치 등산로 안내판 앞에 발 딛는 순간 갑자기 울컥,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 내린다. 감격과 애환의 눈물일까?
암과 함께한 투병생활의 사경에서 벗어나 여기까지 오게된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다.
백두대간 종주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시작한 산행, 하루 하루 자신의 의지로 걸으며 종주를 마치고 보니 감개무량 할 뿐이다.
아무리 악천후라도 공지된 날은 하루도 빠짐없이 참석하여 2년 4개월이 걸렸다.
튼튼한 체력 물려주신 부모님 감사 합니다. 험한 대간 길 아무탈 없이 끝 맺도록 보살펴 주신 조물주 감사합니다.
당신 품 안에 있는 미물까지도 그 섭리를 헤아리게 하시고 산에 다가가는 자세까지도 깨치게 하신 산신령님 사랑 합니다.
그동안 머나먼 길 함께 했던 여러 산우님들, 관심갖고 지켜보며 격려해주신 여러분, 그리고 가족들 모두 모두 고맙습니다.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이겨낼 수 있었고, 걸을 수 있었습니다. 두 손 받쳐 공손히 엎드려 절 올립니다.
감상에 젖어 마냥 있을 수 없어 일어섰다. 해는 기울고 가야할 길은 아직 남았다. (월성치~신풍령)
오늘은 삿갓봉 넘어 삿갓골재 대피소에서 쉬고, 내일은 20km 길을 또 걸어야 한다. 역산행으로 한 번 다녀간 구간 이지만
나에겐 또 다른 의미가 있는 빼재! 백두대간 종주 시작 첫 발자국을 빼재(秀嶺, 신풍령)부터 남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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