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이 외수 - 점등인의 노래, 진달래 술,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opal* 2008. 4. 26. 14:21

 

점등인의 노래

 

                               이 외수

 

이 하룻밤을 살고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헤어진 사람들은 다시 돌아와
이 등불 가에서 만나게 하라

바람부는 눈밭을 홀로 걸어와
회한만 삽질하던
부질 없는 생애여
그래도 그리운 사람 하나 있었더라

밤이면 잠결마다 찾아와 쓰라리게 보고싶던 그대
살속 깊이 박히는 사금파리도
지나간 한 생애 모진 흔적도
이제는 용서하며 지우게 하라

 

 

 

진달래 술

 

                                 이 외수

 

생각납니다
폐병 앓던 젊은날에는 양지바른 산비탈
각혈한 자리마다 진달래가 무더기로 피었지요

지금은 주름살이 깊어가는 지천명
부질없는 욕망은 다 버렸지만
아직도 각혈같은 사랑만은 버리지 못했습니다
술 한잔 주시겠습니까

 

 

 

그리움도 화석이 된다

 

                                       이 외수

 

저녁비가 내리면
시간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허물어지는 시간의 지층을
한 겹씩 파내려 가면
먼 중생대 어디쯤
화석으로 남아있는
내 전생을 만날 수 있을까
그 때도 나는
한 줌의 고사리풀
바람이 불지 않아도
저무는 바다쪽으로 흔들리면서
눈물보다 투명한 서정시를
꿈꾸고 있었을까
저녁비가 내리면
시간의 지층이
허물어진다
허물어지는 시간의 지층
멀리 있어 그리운 이름일수록
더욱 선명한 화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