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신 동엽 - 아니오, 그 사람에게, 창가에서.

opal* 2008. 4. 23. 23:56

 

 

아니오

 

                               신 동엽

 

아니오
미워한 적 없어요,
산마루 투명한 햇빛 쏟아지는데
차마 어둔 생각 했을리야.

아니오
괴뤄한 적 없어요,
능선 위 바람 같은 음악 흘러가는데
뉘라, 색동눈물 밖으로 쏟았을 리야.

아니오
사랑한 적 없어요,
세계의 지붕 혼자 바람 마시며
차마, 옷 입은 도시 계집 사랑했을 리야
                                                    <시집 阿斯女, 1963년>

 

 


 그 사람에게

 

                               신 동엽

 

아름다운
하늘 밑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쓸쓸한 세상세월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다시는
못 만날지라도 먼 훗날
무덤 속 누워 추억하자,
호젓한 산골길서 마주친
그날, 우리 왜
인사도 없이
지나쳤던가, 하고.

 

 

창(窓)가에서

                           신 동엽

창가에 서면 앞집 담 너머로 버들잎 푸르다.

뉘집 굴뚝에선가 저녁 짓는 연기 퍼져 오고,

이슬비는 도시 위 절름거리고 있다.

석간(夕刊)을 돌르는 소년은 지금쯤 어느 골목장이를 서둘고 있을까.

바람에 잘못 쫓긴 이슬방울 하나가 내 코 잔등에 와 앉는다.

부연 안개 너머로 남산 전등 불빛이 빛무리져 보인다.

무얼 보내신 이가 있을까.

그리고 무언 정말 땅으로만 가는 거일까.

정말 땅은 우리 모두의 열반일까.

창가에 서면 두부 한 모 사가지고 종종걸음 치는 아낙의 치맛자락이

나의 먼 시간 속으로 묻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