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30. 출발.
도상거리 23km는 하루에 걷기엔 만만치 않은 거리다. 더군다나 해의 길이가 짧은 겨울철 산행이라 한 시간 일찍 출발한다.
07:05. 주변은 어둡고 아직 가로등이 환한 평창휴게소에 도착하여 이른 아침을 먹는다.
08:00. 전 고속도로 휴게소가 있던 大關嶺(832m) 도착. 우리나라 동서를 가로 지르며 영동과 영서지역이란 말을 탄생시킨
상징적 공간이다. 차에서 내리니 기온도 낮거니와 바람에 날려 갈 것 같다. 한 때 호황을 누리던 곳이라 더 을씨년스럽게 느껴진다.
‘大關嶺 國師 城隍堂 入口’라 써있는 커다란 입석 옆을 통과해 눈길을 오른다. ‘국사 성황당’은 중요 무형문화재 13호로 지정된
강릉 단오제의 主神인 서낭신을 모시는 곳이다. 강릉에서는 매년 음력 4월 보름에 산신제와 국사 서낭제를 올린다.
그날 서낭신을 모시고 내려가 시내의 國師女城隍祠에 봉안하고 음력 5월 7일 단오제가 끝나면 다시 이곳으로 모신다.
통신회사 철구조물 울타리 옆으로 눈 덮인 콘크리트길을 20 여분 오르니 대관령의 옛길인 반정으로 가는 이정표와 등산 안내도,
대관령 유래가 적힌 안내판이 있다. 오르막이라 속에선 금방 땀이 흐르나 겉옷은 방풍을 위한 무장이기에 벗을 수가 없다.
08:35. 포장도로를 벗어나 선자령 방향 숲으로 들어서니 이정표 옆으로 9.2km 거리의 매봉부터 출입을 통제한다는 안내판이
있다. 몇 발작 더 가니 여러 대의 풍력 발전기가 보인다. 처음 볼 때는 이국적인 느낌이 들더니 그것도 여기 저기서 자꾸 보니
바람이 많이 부는 곳 정도로 인식된다. 돌아보니 통신회사 철탑 뒤로 다음에 걸어야 할 능경봉과 다른 봉우리들이 인사한다.
08:45. 새봉(1071m)도착. 1월에 왔을 때 없던 전망대가 설치 되었다. 그냥 봐도 강릉 시가지와 바다가 잘 보이는데 굳이 산을
훼손시키며 설치해야 하는 건지? 북사면의 빽빽한 나목 숲은 적설량이 많고 경사가 급해 발걸음을 떼지 않아도 자동으로
미끄러지며 내려진다. 많은 눈이 작은 나무들과 풀을 덮고 있는 오솔길에 마가목 빨간 열매가 흰 눈 배경으로 돋보인다.
바람을 맞서며 올라보니 풍력 발전기 숫자가 셀 수 없도록 많이 늘었다. 벌거벗은 민둥산이라 그런가 바람소리가 애처롭게 들린다.
09:35. 출발 1시간 반 만에 선자령(1157.1m) 도착. 겨울이 빨리 왔다 늦게 가는 곳,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와 강릉시 보광면
성산리를 이어주는 고개다. 예전에는 ‘大關山’ 또는 ‘普賢山’, 보현사에서 보면 마치 떠오르는 달과 같다하여 ‘滿月山’이란
이름들을 가진 높은 산이면서도 ‘嶺’으로 불리는 곳. 여름에는 푸른 초원, 겨울에는 은빛 설원인 이곳은 仙者嶺, 仙子嶺, 모두
쓰이더니 지금은 한글로 쓰여 우뚝 서있다. ‘백두대간 보호지역 지정(2005.9.9.) 1주년에 즈음하여 우리 국토의 핵심 축인
백두대간을 영원히 보존하고... ’ 달 포전인 10월 하순에 산림청에서 새로 세운 사람 키 몇 두 배가 넘는 거석이 눈에 거슬린다.
자연을 영원히 잘 보존함이란 자연 상태 그대로 나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전에 세운 仙者嶺 표지목 뒤에 있는 작고 아담한
표지석과 어깨 동무하며 한 컷 찍힌다.
하늘과 땅이 내기라도 하듯 광활한 눈 덮인 초지는 어디까지가 땅인지 날리는 눈발에 온통 회색빛 세상이다.
1월에 왔을 때만 해도 몇 기 안 되던 풍력 발전기는 몇 십개로 늘어나 거대한 발전기 왕국을 이루니 새로운 관광 명소가 되겠다.
발전기 한기의 높이는 80m, 날개 하나의 길이가 40m라니 날개가 도는 원의 지름이 80m 가 넘는다.
친환경적 에너지 자원을 얻는다며 시설물들을 자꾸 세우다 보면 과연 고산 지대인 백두대간을 온전하게 보존 할 수 있을까?
한강, 낙동강 등의 발원지가 백두대간에 속해 있고, 야생의 동물과 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지인 백두대간이
더 이상 훼손 안 되기를 바라며 눈길을 밟는다.
10:00. 선자령 나즈목. 전에 선자령 산행 후 보현사 방향으로 내려섰던 곳이다. 눈발이 점점 더 날리니 걱정이 된다.
이제 두 시간 왔고 갈 길은 아직 멀었는데 이러다 또 길 잃는 것은 아닌지, 앞으로 노인봉 산장까지는 초행길이며
눈길이라 속도도 안 나는데, 머릿속 생각과 다르게 깨끗하게 많이 쌓인 눈을 보니 동심이 되어 사지를 쫙 펴고
영화 Love Story 흉내를 내어본다. 겨울산행 중에 맛보는 즐거움이다. 넓은 임도에 제설차가 눈을 치우며 지나간다.
10:30. 대공 산성 터 갈림길을 지나 곤신봉(1131m)도착. 벌판을 지나와 그런가 특별히 높아뵈지는 않고, 바람부는 방향 대로
잔가지 뻗은 작은 나무 몇 그루와 바위, 표지석이 임도 옆에 서있다. 사방으로 회색공간인 능선을 오르내리며 한동안 걸으니
선두에서 걷던 일행들이 길을 잘 못 갔다며 되돌아 온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고’를 촬영했다는 간판 앞에서 우측의
전망대 방향으로 기수를 돌린다. 이럴 땐 뒤에 가길 잘 했단 생각이 든다. 해발 1165m의 표지판이 목장 초지에도 서있다.
11:00. 동해 전망대 도착. 눈이 내리고 있어 전망을 볼 수 없어 유감이다. 쉬었다 갈 수 있는 작은 비닐 쉼터가 있지만
겨울이라 인적이 없다. 강릉 반대편으로 황병산, 주문진과 발왕산, 정동진과 소황병산, 선자령과 대청봉 등, 서로 마주보는
방위표 방향을 그려 논 바위가 있다. 넓은 임도에 제설차가 밀어낸 눈 위로 새로 내린 눈이 거대한 생크림 케익처럼
먹고 싶을 정도로 깨끗하다. 넓은 길인데도 발 한 번 잘못 짚으니 무릎까지 빠진다.
우측 ‘太古의 原始林’이란 간판을 보고 내려섰다 다시 오르며 임도와 헤어져 산으로 오른다. 먹구름이 벗겨지니 은빛 설원과
청명한 하늘이 청백으로 대조된다. 제설차가 지나간 임도와 달리 산 속엔 눈이 많아 깊은 발자국을 따라야 하니 더 힘들다.
12:00. 매봉(1173m) 헬기장. 이곳에도 노인봉 대피소까지 출입을 금한다는 간판이 있다. 이 먼 곳까지 와서 자연 공원법을
지키기위해 안 걷는 사람 있을까? 서쪽으로 정상에 군 시설물이 있는 황병산이 보인다. 백두대간 능선에서 조금 비켜있는 산이다.
쌀가루처럼 하얗고 포슬포슬한 눈을 밟으며 광활한 설원으로 내려딛는다. 목장 초지 밖으로 빙 돌아 걷는, 앞 사람들이 직선으로
보이기에 지름길로 내려가니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옆 사람이 큰 소리로 따라 부른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내리막을 다 내려와 다시 오르는데 방금 옆에서 노래 부르던 산님의 외마디 소리가 들린다.
돌아보니 허벅지까지 빠져 얼른 걸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눈(雪) 밑으로 물이 흐르는 습지에 눈이 쌓인 것을 모르고 지름길을
택했던 것이다. 조금 멀어도 남들 따라 돌아야 하는 것인데... 好事多魔라 했던가? 노래 부를 때까지는 좋았으나...
도처에서 복병이 기다리고 있다. 단단히 무장을 해 젖지는 않았단다. 간신히 기어올라 눈 위에 주저앉아 정신을 가다듬고
다시 걷는데 너무 긴장을 했던 탓인지 이번엔 다리에 쥐가 난다며 주저앉는다. 옆 일행이 주무르며 수지침으로 도와 준다.
드문드문 서서 바람을 이겨내기 위해 많은 가지들을 옆으로 뻗고있는 설원의 소나무들이 인상적이다. 흰 눈과 흰 구름,
푸른 하늘 배경이 흰 도화지의 그림 같다. 낮은 지대에서 바람을 피해 서서 떡 간식을 먹는다. 바람이 없는 곳엔 햇살이
눈(雪)에 반사되어 봄날 같이 따뜻하다. 눈이 많이 쌓인 오르막은 몸 균형이 안 잡혀 발자국 떼어 놓기가 힘들다.
정상인 발걸음이 아니라 다리 아프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눈이 단단히 얼었으면 걷기에 좋겠는데 깊은 발자국을 따르려니
이건 걷는 게 아니고 건넌다는 표현이 맞겠다. 허벅지에 가래톳이 생길 것 같은 아픔이 온다.
13:00. 초지와 헤어져 숲으로 들어선다. 눈길 오르막이 힘들어 아무 생각 없이 오른다. 요리 조리 방향을 돌려 오르고 또 오르니
땀이 흥건히 밴다. 한 동안을 오르니 우측 계곡 바위 사이로 눈이 녹고 물 흐르는 소리가 난다. 이 산엔 나무들이 제법 크고
자작나무 수종이 많아 수피가 아름답다. 너무 힘들어 그런가 속에선 허기지고 입에선 단 내가 난다.
14:00. 눈 위에 앉기 싫다며 그냥 가는 사람도 있지만, 칼로리 보충용 물이라도 마실까하여 앞 사람들 식사하던 자리에 앉아
뜨거운 물에 밥 한 수저 말아 후르르 삼키고 일어선다. 오를수록 더 가파러 어기적거리며 걸으니 엉덩이 뼈까지 아프다.
이러다 림파선 붓는 건 아닐까? 소황병산(1338m)인줄 알고 올라섰더니 웬걸, 온 몸에 밀가루 칠을 한 밋밋한 봉우리가 앞에
버티고 있다. 이 산도 전체가 초지라 나무 한 그루 없이 눈으로 덮여있다. 선자령 전 매봉에서 이곳까지가 출입 금지 구간 이다.
눈길 오르막에선 한발 한발 떼어 놓기가 정말 힘들다. 시간이 지체되고 바람이 심해 모두들 소황병산 정상엔 오르지 않고
나무 대신 유일하게 서 있는 전신주 하나를 표시로 우측으로 방향을 돌리니, 와~ 드디어 노인봉이 보인다.
저 산을 넘어야만 6번 국도상의 진고개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신갈나무와 잡목이 우거진 가파른 내리막엔 눈이 많아 자동으로 미끄러지며 내려가 진다. 눈이 무릎 위까지 찬다. 균형이 안 잡힌다. 다시 오르는 오르막은 죽을 맛이다. 다리는 자꾸 꼬이고 여기저기서 "아이구 죽겠다" 소리 들린다. 이리비칠 저리비칠, 엉치 뼈가
다 아프다. 내일 온 몸이 무사할까? 다가설 수록 노인봉은 점점 더 높아지는데, 앞에서 러셀 한 선두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15:30. 앞에 가던 동료가 쥐가 나서 혼났다며 눈 위에 주저앉아 과일 간식을 먹고 있다. 다시 고난의 길을 오른다.
바람은 도대체 어디에 있던 눈을 이곳으로 다 가져 왔을까? 무릎 위까지 찬다.
16:00. 오를수록 발자국은 깊고 바람은 차다. 4시까지 하산하라 했는데, 하산은 커녕 노인봉도 아직 못 올랐다. 허기지고 춥다.
16:25. 노인봉 산장. 이곳에서 우측(동쪽 방향)으로 내려가면 청학동 소금강 계곡이다. 진고개 매표소가 3.9km 남았다는
노인봉의 이정표를 처음 만난다. 넘어가는 해가 나뭇가지 사이로 아주 작은 모습으로 작별 인사를 한다.
노인봉(1338.1m) 정상엘 가보고 싶은데 날은 이미 어둡고 시간이 촉박하니 가지 말란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쳐나와 ‘산악회’라는 곳에 처음 발을 들여 놓던 2년 전 어느 날, 자신의 건강 회복을 반기며
자신감을 가졌던 곳, 지난 해 여름엔 다시 올 수 있다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던 노인봉이다.
이정표에 표시된 숫자가 점점 줄어든다. 2.9km에서 1.5km로, 가파른 눈길 내리막을 달리듯 내려오니 0.9km 남았다.
17:50. 이미 어두워진 고랭지 채소밭 위 능선을 내려오며 돌아보니 넘어온 산 위로 둥근달이 모습을 점점 크게 만들고 있다.
하루 해를 산에서 다 보낸 긴 산행이다.
18:00. 진고개(970m) 도착. 산행거리 23km, 산행 소요시간 10시간.
2006.12.5.(火) 백두대간 38구간을 종주하다.
(대관령~새봉~선자령~곤신봉~매봉~소황병산~노인봉~진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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