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격정에 시달렸던 마음 속의 짐도 함께 꾸려 배낭에 넣었다.
높은 산과 넓은 바다에 훌훌 털어 내고 돌아오는, 고행의 길이 아닌 즐거움으로 가득찬 하루가 되기를 바라며
05:30 출발, 격주로 한 달에 두 번씩 실시한 백두대간 종주 산행이 오늘로 만 2년이 된다.
같이 다니고 있는 일행 중 몇 사람은 타 산악회나 다른 요일에 참석하여 오늘로 종주를 끝내는 사람도 있다.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닌 날들 동안 결석 한 번 없이 다닌 자신이 대견 스럽다. 이대로 종주 끝낼 수 있기를 빌어본다.
08:25. 평창 휴게소, 밖에서 밥을 먹으니 손이 시리다. 하얀 성애가 차 유리에 무늬를 만든다.
09:15. 대관령(832m) 도착. 남쪽으로의 역 산행이다. 차에서 내린 많은 일행들 아이젠 착용하느라 동시에 엎드리니
논에서 모내기하는 모습 같다. 파란 하늘 배경으로 서있는 하얀 풍력 발전기 날개도는 소리가 안 들려 쳐다보니 생각보다
바람이 덜 분다. 커다란 거북 잔등에 세워진 고속도로 준공 기념비 옆 능경봉 등산 안내도를 훑어본 후 설국 능선을 밟는다.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따라 만들어진 골 무늬가 아름답다. 능선에 새겨진 발자국이 꽤 깊다.
어느 해인가 설경 찍으러 왔다가 눈에 미끄러지던 생각이 난다. 날씨가 상큼하기 이를 데 없다.
돌아보니 파란 하늘 아래 장쾌하게 조망되는 선자령의 풍력 발전기들이 눈 속에 더 희다.
헬기장 도착하니 10;00. 발자국 하나 없는 넓은 터에 후미대장 동심이 발동하니 눈장난이 이어진다.
겨울 산행의 별미라고나 할까? 나이를 먹었어도 역시 재미있다. 그래 바로 이거다.
마음 아팠던 일들일랑 모두 잊자, 산은 내게 위로자라는 이해인님의 시와 자신의 생각이 일치하는 순간이다.
<그 누구를 용서 할 수 없는 마음이 들 때 그 마음을 묻으려고 산에 오른다.
산의 참 이야기는 산만이 알고 나의 참 이야기는 나만이 아는 것
세상에 사는 동안 다는 말 못할 일들을 사람은 저마다의 가슴속에 품고 산다
그 누구도 추측만으로 그 진실을 밝혀 낼 수가 없다
꼭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하기 어려워 산에 오르면
산은 침묵으로 튼튼해진 그의 두 팔을 벌려 나를 안아준다
좀 더 참을성을 키우라고 내 어깨를 두드린다> 이 해인
10:10. 능경봉(1123m) 도착하니 키 작은 정상석이 반긴다.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와 강릉시 왕산면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나뭇가지 끝 위로 선자령과 동해가 조망된다. 적설량이 많은 급경사 내리막을 자동으로 미끄러지며 내려가니
커다란 '행운의 돌탑'이 눈에 덮여 있다. 안내판에 쌓인 눈을 쓸어 내리고 설명을 읽는다.
<우리들의 선조들은 험한 산길을 지날 때마다 길에 흩어진 돌들을 하나씩 주워 한곳에 쌓아 길도 닦고, 자연스럽게 돌탑을
만들어 여로의 안녕과 복을 빌며 마음으로나마 큰 위안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의 풍습을 오늘에 되살려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백두대간인 이곳을 등산하는 모든 이들의 안녕과 행운을 기원하고자 여기에 행운의 돌탑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이곳을 지나실 때 마다 이 돌탑에 정성을 담은 돌 하나를 쌓으시고 백두대간의 힘찬 정기를 받아
건강과 행운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원 합니다.>
백두대간 신이시여, 제게도 행운을 !!!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함께하는 이들 또한 건강가 행운을 주소서!!!
신나는 소리에 돌아보니 가파른 내리막을 어떤이들은 엉덩이 썰매로 내려오고 있다.
능선 아래는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터널이 가로 질러 있다. 뱀처럼 구불대며 골을 이룬 발자국을 따라
봉우리 하나를 오르고 내려 딛으니 앞으로는 고루포기산, 뒤로는 선자령의 모습이 맑은 하늘 아래 선명하다.
11:05. 왕산골과 샘물이 표시된 이정표. 뒤에 혼자 오던 젊은 등산객, 대간 종주꾼인지 샘물을 찾아 내려간다.
혼자 다니는 용기에 박수를 보내며 그에게도 행운이 있기를, 왕산골로 가는 두 번째 이정표를 지나 오르막에서 뒤로 미끄러지며
오르고 있는데 선두에서 연락이 온다. "여기는 선두, 고루포기 못 미쳐 허리까지 빠지니 조심해서 오세요." 눈에 미끄러지며
앞 뒤에서 비명이 들린다. “엄마야”, “아이쿠” 후미는 전망대 오르막에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선두 고루포기산 도착.”
12:05. 대관령 전망대. 발아래 횡계리의 아파트에서 대관령을 지나 이어지는 목장 초지의 설원, 선자령을 지나 북쪽까지
하얀 나라가 입체적으로 펼쳐진다. 가슴 속까지 탁 트이며 시원하다. 눈 위에 그대로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여유를 부려본다.
샘물을 찾던 젊은이가 어느새 다가와 신발 끈을 고쳐 매기에 간식을 나누고 헤어진다. 혼자 차를 갖고 왔기에
대관령으로 되돌아 간단다. 눈과 바람과 빛이 만든 작품들을 감상하며 깊은 발자국을 따른다.
높은 송전탑 아래에서 선자령 풍력 발전기를 돌아본 후 고루포기산(1238m) 도착(12:35). 정상석은 없고 이정표만 홀로서서
정상임을 알려준다. 철제로 만든 긴 의자가 구멍 뚫린 채 눈에 덮여있다. 좌측으로 내려서니 능경봉이 높다랗게 조망되고
선자령 모습이 장쾌하다. 지나온 마루금이 한 눈에 전개된다. 송전탑을 또 하나 지나 능선에 생긴 발자국 따라 내려딛는다.
13:00. 넓은 터에 발자국 하나 없이 하얀 곳을 그냥 지나가기 아까운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너도 나도 동심이 되어 뒹군다.
잠시 누운 상태가 되니 이렇게 편 할 수가 없다. 항암제 투여 기간 중 식구들 식사 시간이면 밥 냄새가 싫어 공원에 나가 잔디밭에
자리 깔고 누워 땅 위와 땅 속의 차이는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하늘을 보던 생각이 난다. 이렇게 건강해진 모습에 감사드린다.
세 번째 송전탑을 지나 급경사 내리막을 내려서니 왕산 제2쉼터(13:15). 이곳에도 철제로 만든 긴 의자가 몇 개 있다.
구불구불 깊게 패인 발자국을 따라 걸으니 갈증이 난다. 마음 편치 않아 그런지 몸도 아파, 망설이다 나오느라
오늘따라 과일 준비를 안했더니 얼굴도 마음도 예쁜 정ㅎ씨 어찌 알고 쌍화차 한 잔을 주어 고맙게 받아 마신다.
산이 가려진 남사면 내리막은 겨울 날씨답지 않게 바람이 전혀 없고 장갑을 벗어도 손이 시리지 않다. 돌아보니 나무사이로
고루포기산과 봉우리들이 높다랗게 이어져 있다. 가지를 많이 거느린 멋진 적송이 겨울날씨에 돋보인다.
다시 오르막. 골을 이루는 발자국이 재미있다. 일행 중 한 분은 내리막에 미끄러지며 몇 번째의 엉덩방아를 찧는다.
목이 말라 눈을 뭉쳐 입에 넣으니 어린시절이 생각나며 갈증도 해소된다. 이 또한 겨울산행에서나 맛볼 수 있는 선물이다.
14:00. 왕산 제 1쉼터. ‘닭목령’과 반대 방향인 ‘제 2쉼터’와 2km의 거리로 중간 지점 이다. 시장기가 돌아 떡과 물로 초벌 요기 한다.
우측으로 목장 울타리가 시작되며 붉은 수피를 자랑하는 노송이 군락을 이루고 있어 황량감을 달래준다. 좌측으로
눈에 덮인 넓은 목장 초지가 쓸쓸해 보인다. 깊은 발자국을 밟으며 올라섰다 능선 따라 내려가니 조심해야 할 곳이 있다.
자칫 잘못하면 능선 따라 직진하게 되어 있어 리본을 보고 좌측으로 따라 내려가야 한다. 울타리를 따라 원을 그리며 돌다 보니
목장 안으로 들어왔으면 지름길이 될 뻔 했다. 목장 정문에 이어지는 넓은 길을 버리고 다시 좌측의 능선 따라 나무와
산죽 사이로 내려딛는다. “꽃띠 님 오늘은 매우 힘들어 뵈는데요?” 후미 대장의 한 마디에 "며칠 앓다 나왔다"고 대답해 주었다.
15:10. 경사진 넓은 채소밭에 눈이 덮여 은빛 벌판이 펼쳐지니 또 다시 동심으로 돌아간 일행들 서로 굴린다. 보기에도 즐겁다.
임도 따라 내려딛으니 닭목재(15:20). 지난여름 뜨거운 뙤약 볕에 땀 흘리며 삽당령에서 시작하여 석두봉, 화란봉을 거쳐 왔던
곳이다. 대간 길 걷기를 오늘로 만 2년을 보냈지만 아직 두 구간이 남아있다. 년말이기도 하고 의미 있는 날이라
싱싱한 회 별미를 맛보기 위해 동해 주문진항을 향해 달린다. 오늘의 산행 소요시간 6시간.
2006. 12. 19.(火). 백두대간 37-2구간을 종주하다.
(대관령~능경봉~고루포기산~닭목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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