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에 역사가 있었다
-내가 걷는 백두대간1
이 성부
오랫동안 나는 산길을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산이 있음에 고마워하고
내 튼튼한 다리를 주신 어버이께 눈물겨워했다
아무 생각없이 걸어가는 일이야말로 나의 넉넉함
내가 나에게 보태는 큰 믿음이었다
자동차가 다녀야 하는 아스팔트 길에서는
사람이 다니는 일이 사람과 아스팔트에게
서로 다 마음 안 놓여 괴로울 따름이다
그러나 산길에서는 사람이 산을 따라가고
짐승도 그 처처에 안겨 가야 할 곳으로만 가므로
두루 다 고요하고 포근하다
가끔 눈 침침하여 돋보기를 구해 책을 읽고
깊은 밤에 한두 번씩 손 씻으며 글을 쓰고
먼 나라 먼 데 마을 말소리를 들으면서부터
내가 걷는 산길이 새롭게 어렴풋이나마
나를 맞이하는 것 알아차린다
이 길에 옛 일들 서려 있는 것을 보고
이 길에 옛 사람들 발자국 남아 있는 것을 본다
내가 가는 이 발자국도 그 위에 포개지는 것을 본다
하물여 이 길이 앞으로도 늘 새로운 사연들
늘 푸른 새로운 사람들
그 마음에 무엇을 생각하고 결심하고 마침내 큰 역사 만들어갈 것을 내 알고 있음에랴!
산이 흐르고 나도 따라 흐른다
더 높은 곳으로 더 먼 곳으로 우리가 흐른다
중산리
-내가 걷는 백두대간 2
중산리에서는 산이
바라다보이는 것이 아니라
올려다보인다 조금 멀리 조금 가까이
흰구름 뭉치 천왕봉 언저리에 걸려있다
그리움도 손에 잡혀 가슴이 뛴다
아 비로소 여기 이르렀구나
아잇적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반고비 고개 넘어 세상일 조금은 보일 때까지
꿈에서만 올라보던 그 봉우리
오늘은 내 두발로 온몸으로 오르기 위해
여기 왔거니!
물소리 바람소리가
중산리에서는 옛일들 되감아 내려와서
내 앞에 펼쳐 놓는다
내 앞에 놓여진 오르막길
그냥 무턱대고 가야하는 길 아니다
짐승처럼 킁킁거리며 냄새 맡거나
누군가의 발자국 흔적이라도
그가 쫓기고 스치고 갔을 댓이파리 하나라도
다시 매만지며 올라가야 한다
내 살아 있는 동안의 산길 있음이여
왜 이리 가슴 벅찬 풋풋함이냐
남명선생
-내가 걷는 백두대간 3
중산리 사람들은 좋겠다
날마다 천왕봉 고개 들어 우러르는
중산리 사람들
저마다 가슴이 천왕봉 하나씩 품어
무엇에 노여워도 눈 감음
저를 다스리거나 돌아보거나
깨우치거나 해서 좋겠다
저 아래 덕산골 살았던 남명선생
하루에도 몇 번씩 산봉우리 쳐다보며
하늘이 울어도 산은 울지 않는다는
크고 넉넉한 마음
벼슬길 마다하던 그 까닭 알겠거니
소인배 들끓는 세상에서는
군자가 저를 감추어 더
고요해지는 일 내 알겠거니
다시 남명 선생
-내가 걷는 백두대간 4
세상에 나아가서 부대끼는 사람보다
세상에서 숨어 귀 막고 눈 가린 사람이
세상을 더 잘 터득하는 법!
큰 산을 끌어와서 방에 가두고
좁은 문 닫아 잠그면
그리운 얼굴들 이리저리 헤매어 신발 찾는 일
선연하게 내려다보이느니
바람 불어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에 귀가 트이고 눈이 밝아져
잠자코 있음도 오히려 살맛난다네
큰 산 속에 묻힌 외로움과 어깨동무
만권 서책 즐거움과 호미거리
사람도 큰 산에 숨으면
그 산을 닮아 더욱 커져가는 것
내 오늘에서 깨달았으니
좋은 사람 때문에
-내가 걷는 백두대간 5
초가을 비 맞으며 산에 오르는
사람은 그 까닭은 안다
몸이 젖어서 안으로 불붙는 외로움을 만드는
사람은 그 까닭을 안다
후두두둑 나무기둥 스쳐 빗물 쏟아지거나
고인 물웅덩이에 안개 깔린 하늘 비치거나
풀이파리들 더 꼿꼿하게 자라나거나
달아나기를 잊은 다람쥐 한 마리
나를 빼꼼이 쳐다보거나
하는 일이 모두
그 좋은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이런 외로움이야말로 자유라는 것을
감기에 걸릴 뻔한 자유가
그 좋은 사람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비 맞으며 산에 오르는 사람은 안다
정순덕에게 길을 묻다
내가 걷는 백두대간 8
이 길에서는 온통 그대 생각에
마음이 나를 떠나 낯선 곳으로만 달려가고
내 몸도 어지러워 안갯자락이라도 붙잡아야 한다
산허리 굽이굽이 돌아 끝없이 가다보면
마침내 나타나는 우리네 살림살이
마을에 깔린 저녁 연기 내음
그러나 그대는 돌아와야 할 때 집을 떠나
죽음이 뻔히 내다보이는 길로 들어갔다
내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주저앉고 싶지만
내 정신은 새처럼 온 산골짜기
넘나들며 푸르구나
열여섯 어린 나이에 산에 들었다면
사상보다는 그리움의 키가 커져서
더 먼 데 하늘 바라보는
눈망울 착한 한 마리 짐승으로 쓸쓸할 뿐
그대 젊음 써리봉 기슭 철쭉이거나
드러나 나무뿌리로 뒤엉켜
지금 나를 자빠지게 하는 것은 아닌지
무르팍 생채기 피를 흘리며
마음도 돌아와 나를 가득 채우느니
아 우리나라 지리산 서러운 하늘
내 태어난 숨결이구나!
*정순덕 1950~1963년에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다 생포되었던 여자.
지리산 최후의 빨치산으로 알려져 있으며, 신혼시절 입산한 남편을 찾아 산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달뜨기 재
내가 걷는 백두대간 12
지리산에 뜨는 달은
풀과 나무과 길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마음속 지워지지 않는
눈물자국을 비춘다
초가을 별들도 더욱 가까워서
하늘이 온통 시퍼런 거울이다
이 달빛이 묻은 마음들은
한줄로 띄엄띄엄 산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고
귀신들도 오늘은 떠돌며 소리치는 것을 멈추어
그림자 사이로 고개 숙이며 간다
고요함 속에서 나를 보고도 말 걸지 않는
고개에 솟는 달 잠깐 쳐다보았을 뿐
풀섶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고른다
밝음과 그림자가 함께 흔들릴 때마다
잃어버린 사랑이나 슬픔 노여움 따위가
새로 밀려오는 소리를 듣는다.
*달뜨기재 지리산 동쪽 웅석봉과 연결된 산줄기의 고개 이름
제석봉
― 내가 걷는 백두대간 ·12
참을성이 많은 봉우리다 있는 듯 없는 듯
넓게 펑퍼짐하게 저를 받들고 있다
아래로는 뼈다구처럼 드러난 영혼들이
저마다 다른 목소리로 솟아 올라
내 발걸음 자꾸 멈춰서 돌아보게 한다
덕을 쌓고 넓히고 베풀어
스스로를 즐겁게 하고
무엇 하나 미워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잠잠하여 마르기만 할 뿐이다
힘겨워하는 산 사람들 등을 밀어
위로 위로 올려 보내고
구름과 바람은 장터목으로 내려 보낸다
제 몸을 스쳐가는 것들
저를 때려도
그냥 그대로 앉아 있음이여
천왕봉 일출에 물이들어
내가 걷는 백두대간 14
캄캄한 칼바람 속 바위 등걸에 앉아
얼어붙은 털모자 땀고드름을 털어낸다
사람 사는 일 오고가다
더러는 모진 사연 만나는 줄이야 이미 알았거늘
새로 또 닥치는 매서운 추위
아무래도 삶은 돌아볼 겨를도 없이
저만치서 내빼는 것 뒤쫓기만 하다가
넘어져서 덜덜 떨고 있는 일 아니더냐
손발은 카니와 코도 귓볼도 내 것 아닌 것 같아
바람막이 바위 아래로 몸을 낮춘다
한결 고즈넉하다
내 여기 이르러 움츠려 있음은
내 여기 이토록 힘겹게 또는 씩씩하게
험한 길 찾아 올라와서 그대 기다리는 일
길이 나를 새롭게 만들어 사랑 맞이하는 일
온 천하 산지사방 어둠 속에서
문득 동쪽 하늘 어슴푸레 긴 가로 금
마침내 한점 붉디붉은 것 틔어 빛나더니
큰 덩어리로 떠올라
내 온몸 달아오름이여
산길에서
-내가 걷는 백두대간22
이 길을 만든 이들이 누구인지를 나는 안다
이렇게 길을 따라 나를 걷게 하는 그이들이
지금 조릿대밭 눕히며 소리치는 바람이거나
이름 모를 풀꽃들 문득 나를 쳐다보는 수줍음으로 와서
내 가슴 벅차게 하는 까닭을 나는 안다
그러기에 짐승처럼 그이들 옛내음이라도 맡고 싶어
나는 자꾸 집을 떠나고
그때마다 서울을 버리는 일에 신명나지 않았더냐
무엇에 쫓기듯 살아가는 이들도
힘이 다하여 비칠거리는 발걸음들도
무엇 하나씩 저마다 다져놓고 사라진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나는 배웠다.
그것이 부질없는 되풀이라 하더라도
그 부질없음 쌓이고 쌓여져서 마침내 길을 만들고
길 따라 그이들 따라 오르는 일
이리 힘들도 어려워도
왜 내가 지금 주저앉아서는 안되는지를 나는 안다
아름다운 돌이 불길을 다독거렸다
-내가 걷는 백두대간 61
우리나라 산골짜기 절간치고
저 숱한 난리에 불타지 않은 절 있을까마는
피아골 들머리 연곡사는 특히 많은 불벼락을 맞았다
절 앞으로 지금은 자동차들 무심하게 달려가 버리지만
옛 사람들은 구례나 화개 섬진강에서부터 걸어
이 절에서 밥 지어 먹고 다리품도 쉬었다고 한다
깊은 산속으로 쫓겨 들어가는 사람들과
산속에 숨어 있다가 허기져서 내려오는 사람들과
스스로 창검을 들었던 스님들과
싸우던 한말 의명들과 왜놈들과
빨치산들과 토벌 군경과
이 절은 오랫동안 한데 섞여 시달리느라
본디 가야 할 제 길을 여러 차례 멈추어 서서
어디 먼 곳으로만 자꾸 눈길을 주었을지도 모른다
절이 불에 타고 지어지고 다시 불타고 지어지고 해서
지금 보니 더 튼튼해진 다리로 제 길을 가고 있다
아마도 화염 속에서도 버티어냈을
저 아름다운 돌부도와 돌거북의 기세가
세속의 불을 다독거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피아골 산장에서 들은 이야기
-내가 걷는 백두대간 62
산 좋아하는 젊은 남녀가 약혼여행 삼아 지리산으로 들어왔지요 이십여 년 전 일입니다
여기 어디쯤 편편한 곳에 텐트를 치고 물도랑을 만들고자 흙을 팠습니다
한참 파내려가던 사내가 그만 기겁을 한 채 허둥지둥 산을 내려가 버렸습니다
놀란 아가씨가 흙 파던 자리를 살펴보니 사람의 뼈가 솟아 있었지요
벼엉신 나를 두고 저만 혼자 도망가? 아가씨도 주섬주섬 텐트를 거두어 짊어지고 내려갔답니다
이 골짜기에서는 풀 나지 않는 흙땅이 흔히 막영할 자리로 이용되지만 아는 사람들은 그런 곳을 피해서 치지요
이 산장만 해도 명당자리라고 하는데 돌과 바위로 뒤덮인 골짜기에 이곳만이 흙땅으로 꽤 넓습니다
산장을 지을 때 땅을 팠더니 엄청나게 많은 인골이 나와 몇 트럭이나 됐다고 합디다
난리가 날 때마다 이 골짜기에서는 이곳밖에 떼주검 묻을 곳이 없기 때문이지요
호는 泥丁
1942 광주 출생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61 <<현대문학>>에 시 <소모의 밤>, <백주>, <열차>가 추천되어 등단
1969 시집 <<이성부시집>>으로 현대문학상 수상
1978 한국문학 작가상 수상
<<영도>>, <<시학>> 동인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이성부시집(李盛夫詩集)> 시인사 1969
시집 <우리들의 양식(糧食)> 민음사 1974
시집 <백제행(百濟行)> 창작과비평사 1977
시집 <전야(前夜)> 창작과비평사 1981
시집 <평야(平野)> 지식산업사 1982
시집 <빈 산(山)뒤에 두고> 풀빛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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