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최 영미 - 선운사에서,귀거래사,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혼자라는

opal* 2008. 3. 21. 23:13

 

 

선운사에서

                            최 영미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歸去來辭

 

                           최 영미

 

이제 네게 남은 것은
기억뿐---
봉창 두드리는 석양만큼도
언 몸뚱아리 데우지 못하는

이제 네게 남은 것은
연민뿐---
죽은 돌멩이 하나 옮겨놓지 못하는

기억을 남기려고 사랑한 건 아닌데
연민을 남기려고 미워한 건 아닌데

사랑하다 돌아선 자리
미워하다 돌아선 자리
이리 닳아 있구나
쓸 쓸
닳아가고 있구나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최 영미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창자를 뒤집어 보여줘야 하나, 나도 너처럼 썩었다고
적당히 시커멓고 적당히 순결하다고
버티어온 세월의 굽이만큼 마디마디 꼬여 있다고
그러나 심장 한귀퉁이는 제법 시퍼렇게 뛰고 있다고
동맥에서 흐르는 피만큼은 세상 모르게 깨끗하다고
은근히 힘을 줘서 이야기해야 하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나도 충분히 부끄러워 할 줄 안다고
그때마다 믿어달라고, 네 손을 내 가슴에 얹어줘야 하나
내게 일어난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두 팔과 두 다리는 악마처럼 튼튼하다고
그처럼 여러번 곱씹은 치욕과, 치욕 뒤의 입가심 같은 위로와
자위끝의 허망한 한 모금 니코틴의 깊은 맛을
어떻게 너에게 말해야 하나
양치질할 때마다 곰삭은 가래를 뱉어낸다고
상처가 치통처럼, 코딱지처럼 몸에 붙어 있다고
아예 벗어붙이고 보여줘야 하나
아아 그리하여 이 시대 나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아직도 새로 시작할 힘이 있는데
성한 두팔로 가끔은 널 안을 수 있는데
너에게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른다

 

 

혼자라는 건

                             최 영미

뜨거운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혼자라는 건
실비집 식탁에 둘러앉은 굶주린 사내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식사를 끝내는 것 만큼
힘든 노동이라는 걸

고개숙이고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들키지 않게 고독을 남기는 법을
소리를 내면 안돼
수저를 떨어뜨려도 안돼

서둘러 순대국밥을 먹어본 사람은 알지
허기질수록 달래가며 삼켜야 한다는 걸
체하지 않으려면
안전한 저녁을 보내려면

 

 

 

서른, 잔치는 끝났다

                                 최 영미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
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
그리고 외로울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
낮은 목소리로 사랑노래를 즐겼다는 걸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다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요한 복음 2장 1절~12절, 가나의 혼인잔치 연상.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마지막 21장 22절 말씀)

 

 

 

 

1961년 서울 출생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홍익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1992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속초에서'등 8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1994년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1997년 산문집 <시대의 우울>
1998년 시집 <꿈의 페달을 밟고>
1998년 번역서 <화가의 잔인한 손>
1999년 번역서 <그리스 신화>
2000년 산문집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2000년 서양미술사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