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을 제외한 국립공원이 4월을 마지막으로 산불 조심 기간에서 해제되어 당일코스 지리산을 찾았다.
5월, 연휴가 많은 달, 많은 산악회가 무박, 아니면 1박 2일 산행이라 피하고 싶어 당일 코스 택했다.
다른 날보다 조금 일찍 출발, 고속도로 산청 휴게소 들려 단성 IC에서 지방도로 진입하여 11시 거림 도착.
무박산행이 싫어 아침 비행기로 혼자 와 하룻밤 묵고 이른 새벽 어두운 시간에 오는 일행 만나 함께 산행 시작 했던 곳,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랬다. 백두대간 종주 시 두 번의 산행 들머리였지만 이렇게 환한 오전 시간 출발은 처음이다.
내 딛는 발걸음 가볍고 기분도 상큼하다.
바위 밟으며 오르니 계곡에서 흐르는 거센 물소리에 묻힌 새 소리가 간간히 들린다.
십 여분 지나니 땀이 줄줄, 삼십 여분 지나니 일행들이 모두 나를 밀치고 달아난다.
내 딴엔 열심히 걷는데 한계가 30분 인지 자꾸 뒤로 쳐진다.
거림에서 2.4km, 한 시간 지났어도 여전히 너덜 길. 멀어진 계곡물 소리와 새소리, 바람이 시원함을 더해준다.
꽃이 있어 렌즈 들이대니 옆에 가던 산객 둘 "이게 뭐야?" "큰 진달랜가?" 어떤이는 '연달래'라고 하지만
"산철쭉 입니다." 대신 대답 해줬다. 이마에 수건을 동여 맸음에도 얼굴에서 떨어지는 땀방울에 발등 깨지겠다.
나무다리 북해도교 건너니(12:20) 세석 2.8km 이정표, "꽃띠님~ 장터목 가실거죠?" "글쎄요, 세석까지 가보고 결정 할께요."
거림 출발하여 세석평원 거쳐 장터목에서 백무동으로 가는 코스라서 처음엔 무작정 갈 생각이었으나
한신계곡을 한 번도 가 본 일이 없어 '혼자서 한신계곡으로 가보고 싶다' 했더니 물어오는 소리다.
망가진 나무계단 가파르게 오르니 힘들지 말라고 다람쥐가 바위에서 묵은 갈잎 씹으며 재롱 떨어 주는가 하면,
머리 위에선 꾀꼬리가 아름답게 큰 소리로 노래 불러준다. 산행 시작 한 시간 반 경과, 캔음료 하나 단숨에 들이킨다.
고개 뒤로 젖히니 낙남정맥 sky line 보인다. 홈 파인 바위부터 시선을 남으로 옮긴다.
아랫부분의 봉우리들이 비슷해 삼신봉 구별이 잘 안된다. 삼신봉에서 이쪽 바라볼 땐 그 많은 봉우리 주능선 구별이 뚜렷했었다.
두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너덜 오르막, 돌 틈에 핀 연보라 제비꽃 수줍어 고개 못든다. 물 없는 계곡 지천,
이름 없는 짧은 나무다리 연거푸 세 개를 건넌다. 나무 사이 전망 좋은 바위에 오르니 외삼신, 삼신, 내삼신봉 뚜렷하게 구별된다.
머리에 입력 시킨 후 과일로 목축이고 세석교 지나니 낮은 계곡에 물 흐르며 주변 기온이 서늘하다.
길 옆으로 분홍 진달래가 만발해 있다. 세석평원의 철쭉 볼까 했더니 틀렸나보다.
산죽사이 돌 길, 일출 보려고 새벽 어둠 속에 뛰다 시피 오르던 생각난다. 경사도는 완만하나 계속되는 오르막이라 여전히 힘들다.
소나무, 전나무 섞인 숲, 낮은 진달래 위로 촛대봉이 빠끔히 보인다. 거대한 바위 아래 평원엔 붉은기가 돈다, 철쭉일까?
15분 전 오후 세 시, 세석 대피소 500m 전. 아침 차 안에서 "세석 대피소까지 세 시간 안에 올라야 장터목으로 갈 수 있습니다."
'한신 계곡으로 하산 할 생각으로 느긋하게 왔는데 장터목 가도 되겠네?' 혼자 중얼거리는데
키 작은 연보라 '처녀 치마' 발목 잡는다. 눈 높이 맞춰 앉아 한 컷 담고 일어나려니 다리에 마비 오듯 힘들다.
오르막 오래 걷다 쪼그리고 앉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산행 중에 많이 겪는 일이다.
세석 대피소 도착하니 점심식사 인파로 정신없다. 해우소에 앉아 셔터 눌렀다면 웃음 나오겠지?
그러나 눌렀다 촛대봉 아래 붉은 평전 포인트가 좋다. 잠시 둘러보고 촛대봉으로 향하니 철쭉대신 진달래가 세석평원을 치장 했다.
꿩 대신 닭도 좋다. 시선은 꽃을 향하고 발은 돌길 오른다.
커다란 바위군으로 이루어진 촛대봉, 날아갈 정도로 바람 심한 바위에 올라 이마 위로 보이는 천왕봉부터 제석, 연하, 삼신봉,
서쪽으론 대피소 위로 보이는 영신, 명신, 삼도, 반야봉에서 노고단, 반야봉에 가려 꼭대기만 살짝 보일듯 말듯한 만복대까지.
지리산 모두 둘러보며 잠시 추억에 잠긴다. 거리가 멀어도 왕시루봉, 노고단과 반야봉은 금방 알겠는데 다른 봉우리들은
헷갈려 안내판 보며 구별 하려하나 오래되어 글자가 잘 안보인다. 주 능선이 잘 보이는 곳에 앉아
경치를 반찬삼아 식사 할까 했더니 바람이 싫단다.
날씨는 잔뜩 찌푸렸어도 가시거리가 멀고 잘 보여 얼마나 감사한지, 날씨 좋은 날 왔다가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며 훼방 놀아
가까운 천왕봉도 못 본 날이 있엇다. 봉우리 봉우리 마다 담긴 추억 떠올리며 한참을 둘러 본다.
저기는 백운산일까? 그 옆엔 장안산 같고, 더 멀리 흐릿한 곳은 덕유산 인가 보다. 향적봉에서 천왕봉 바라보던 생각하며
오늘도 신선되어 북으로 멀리 보이는 구름 위의 봉우리들을 나름대로 짐작해 본다.
오늘의 백미, 지리산을 이쯤 맛보고 내려서려는데 세석 대피소에서 식사 마친 일행 올라온다.
기념 사진 남기고 손 시리다며 장갑 착용하고 장터목으로 함께 가자 하니 잠시 갈등 생긴다. 어찌 할꺼나.
장터목으로 가도 시간은 늦지 않지만, 기회 놓지기 싫어 아무래도 한신계곡으로 가야겠기에 "백무동에서 만나자" 했더니
"혼자 괜찮겠느냐?" 한다. "촛대봉아 잘 있어 안녕~~ 다음에 또 올께~~~"
세석 대피소로 도로 내려와 한신계곡 방향 등산로, 바람없는 곳에 앉아 빵과 우유로 가볍게 속 채우고 하산 시작.
병이 들어도 심하게 들었나보다. 호젓한 나홀로 산행을 즐기는 중병, 별로 고치고 싶지 않은 병이 있다.
그러나 절대로 홀로가 아니다. 나무가 있고 바위가 있고 풀과 꽃, 친구들이 많다. 변심 않고 오해 모르는 제일 친한 친구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자연이 나를 감싸주고 있으니 무서울 것 없고 외로울 수가 없다.
지리산 북부 한신계곡, 가파른 돌계단을 내려서는데 앞에서 한 사람 헉헉대며 올라선다.
여간해서 입 떼지 않는 내가 먼저 물었다. "백무동에서 오시나요? 몇 시간 걸리셨어요?"
"세 시간 반 걸렸습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시간 되세요." 너 댓살 먹은 남매를 데리고 오르는 가족을 보니 대단하단 생각든다.
돌만 있는 너덜 계곡은 가끔 어디가 길인지... 홀로 산행인 만큼 더 조심 한다.
일행이 있어도 마찬가지지만 철저하게 자신 책임하에 행동 해야 하므로. 낡은 밧줄이 매어있는 곳도 많아 가급적이면
편한 길로 우회한다. 한 동안 접히질 않아 긴 채로 갖고 다니던 스틱이 경고를 준다. 돌만 찍으며 딛으니 말 안 듣던 스틱이
갑자기 줄어든다. 주의 하라는 암시로 받아들이며 가파른 돌길을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려 딛는다.
흐린 날씨 숲 속이라 많이 어둡고 가뜩이나 길이 묘연한데 집채보다 큰 바위가 앞을 막는다.
돌 틈 사이 부서진 낙엽 찾으니 바위 옆으로 돌며 길이 있다. 철계단 내려서고 다리 건너니 발 씻는 등산객 보이고,
뒤에서 젋은 산객 한 무리 내려온다. 잘 되었다 싶어 뒤 따르니 속도 차이 많아 앞지르고 달려간다.
빛이 없어 아쉬운 대로 현호색 예쁜 모습 담고 일어서니 댓잎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들린다.
백무동은 아직 5km 남았는데 계곡물 소리가 커 빗소리가 감춰진다. 걸음걸이에 신경쓰느라 시선 반경을 가까이 잡아 그런가
지도엔 폭포 이름도 많던데 아직 하나도 못 봤다.
세석 2km, 백무동 4.5km 이정표(16:20). 활엽에 떨어지는 후다닥 소리에 냉큼 우의 걸친다.
땀에 젖는 것보다 빗물에 젖는게 나을 때 있어 웬만하연 그냥 걷겠는데 빗방울이 너무 크다.
빗물에 젖은 바위가 미끄러워 더욱 더 긴장 시킨다. 아래로 내려오며 계곡물이 많아져 소리가 우렁차다.
바람에 우의 모자가 휙 벗겨진다. '도대체 모자는 왜 이리 큰거야' 중얼거리며 모자에 신경쓰다 "어이쿠"
내 일 낼 줄 알았다. 젖은 나무 뿌리 밟아 미끄러지며 정강이를 부딪쳤다. 참을 만큼 아프니 다행이다.
계곡이 잠시 멀어졌다 다시 가까이 다가온다. 모난 돌 계속 밟으니 발가락에 쥐가 난다.
잠시 쉴 겸 목 축인다. 통기성 없는 우의는 땀을 더 흘리게 만든다. 아직 5시도 안 되었는데 사방이 어둡다.
5시까지 하산 하라 했는데 초행길이라 거리가 얼마나 남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잠시 비가 멎어 우의 벗으니 오층 폭포 앞. 전망대로 내려가 동영상 한 컷 누르고 올라서니 비가 또 쏟아진다.
다시 우의 입고 계곡 위에 걸쳐진 다리 건너니 콧노래 나온다. 비에 젖은 주변 신록이 아름답고 계곡미가 빼어나다.
단풍 계절엔 더 멋지겠다. 처음 내려설 때 가파른 돌길이 힘들어 다시 오고 싶지않은 인상 주더니
아래로 내려오니 느껴지는 맛과 멋이 다르다.
가내소. 쏟아지는 흰 물줄기 아래 짙푸른 물빛이 깊이를 말해준다. 바위가 젖어 위험하여 내려서지 않고
위에서 대강 찍으니 나무에 가려 잘 안 보인다. 안내판에 적힌 전설을 읽고 혼자 깔깔 웃었다.
12년이나 힘들게 도를 닦던 사람이 갑자기 한 순간에 여자의 유혹에 넘어 가다니...
<'옛날 한 도인이 이곳에서 수도한지 12년 되던 해 마지막으로 가내소 양쪽에 밧줄을 묶고 눈 가리고 건너던 중
지리산 마고 할매 셋째 딸이 심술을 부려 도인을 유혹하여 물에 빠졌단다.
그래서 도인은 "에이~ 나의 道는 실패 했다, 나는 이만 가네~" >하며 이곳을 떠나 '가내소'라 불리게 되었단다.
전설은 언제나 슬프고도 재미있다. 예전 마천면 사람들은 심한 가뭄이 오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도 한다.
마음으론 단숨에 천왕봉까지 올라갔다 내려올 수 있을 것 같지만 몸은 그렇질 못할테니 이 곳으로 오길 잘 했다.
중산리에서 올라 장터목 거쳐 백무동으로 하산하던 지리산 첫 산행 날, 발바닥 아프고 발가락에 쥐가 나던 일이 떠오른다.
그 날은 8시간 반을 걸으며 지루해 했었는데 오늘은 혼자라도 즐겁고 편하고 다리도 안 아프다.
계곡물과 함께하며 많은 다리 건너니 시간이 꽤 지난듯, 날이 어두어지니 카메라도 빛을 요구한다.
자꾸 흔들리며 촛점 맞추기를 거부한다. 비가 내려 오래 쥐고 있을수도 없다.
해발 630m 첫 나들이 폭포를 마지막으로 해발 540m 백무동 야영장 도착(18:15).
시인 마을 지나고 넓은 길로 나와도 날은 이미 어두워지고 빗줄기도 제법 굵다.
세석 대피소가 해발 1600m, 백무동까지 거리 6.5km, 고도차 1000 여m를 세 시간 걸려 내려왔다.
시간은 많이 걸렸으나 감상 잘 하고 다치지 않고 잘 내려왔으니 Very Good 이다.
오르고 내리는데 왕복 6시간, 촛대봉 왕복과 지리산 구경 값 한 시간 반, 모두 7시간 반 소요.
주차장에 도착하니 촛대봉에서 헤어진 일행은 아직 도착 전.
오늘 하루 또 이렇게 지리산의 추억을 만들어 두고 왔다. 즐겁고 행복했던 하루. 모든이에게 감사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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