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안 도현- 철쭉꽃, 간절함에 대하여, 연탄 한 장.

opal* 2008. 5. 8. 21:06

 

 

철쭉꽃

 

                       안 도현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철쭉꽃이 피었습니다
열일곱 살 숨가쁜 첫사랑을 놓치고 주저앉아서
저 혼자 징징 울다 지쳐 잠든 밤도 아닌데
회초리로도 다스리지 못하고
눈물로도 못 고치는 병이 깊어서
지리산 세석평전
철쭉꽃이 먼저 점령했습니다
어서 오라고
함께 이 거친 산을 넘자고
그대, 눈 속에 푹푹 빠지던 허벅지 높이만큼
그대, 조국에 입 맞추던 입술의 뜨거움만큼

 

 

 

간절함에 대하여

                                    안 도현

금강 하구를 가로지른
거대한 배수갑문, 그 한쪽에
강물을 조금씩 흘려 보내는 조붓한 물길이 있다
魚道라고 하는데,
영락없이 강물의 탯줄이다
강으로 오르고 싶은 물고기는 오르게 하고
바다로 내려가고 싶은 물고기는 내려가게 한다
5월, 내려가는 물고기는 보이지 않고
거슬러 오르고자 하는 것들이 거기 가득했다
더 높은 곳에서 봤더라면
버드나무 잎을 따다
몽땅 뿌려놓은 것 같으리라
숭어떼였다!
바다를 뚫고 억센 그물을 찢을 때 생긴
상처투성이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주둥이부터 꼬리까지
하나같이 무엇이 간절한
눈부신 숭어떼
큰놈 작은놈 할 것 없이
대가리를 강물 쪽으로 대고
오로지 거슬러 오르는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날개를 찰싹 접고 꼿꼿이 서서
꼼짝을 하지 않고 숭어떼를 노려보는
잿빛 새 한 마리
그 긴 부리의 간절함은
또 무엇이었던가!

 

 

연탄 한 장

 

                           안 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군가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이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 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히 으깨는 일

눈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