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여행

이태리, 폼페이 유적지

opal* 2010. 6. 20. 05:37

 

 2010-06-20(일)

 

 

오전

폼페이 유적

둘러보기.

오후 소렌토로 항으로 가

배타고 카프리섬 둘러본 후 나포리, 로마로

귀환.

 

 

잠에서 깨어 일어나니 아침부터 비가 내리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 아침 식사는 간단하게, 우유에 켈로그에 넣어 끝내고 폼페이를 향해 출발.

 

 

화산이 일어났던 베수비오산은 구름에 가려져 있고, 오후에 가야할 카프리 섬이 우측 멀리 바다 가운데에 보인다.

 

베수비오산(Mount Vesuvius)

이탈리아 남부나폴리의 동쪽에 있는 이중식 활화산

,  79년에

폼페이를매몰시킨 대분화 이후

8회의

폭발이기록되어 있다.

 

높이는

1,281미터였으나

대규모로 분화할때마다 높이가 많이 달라진다.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한 것은 서기 79년 8월 24일이다.

 이 참사의 목격담은

 

대(大)플리니우스의 조카

소(小)플리니우스가

미네눔의 로마 함대 사령관이었던

대플리니우스의 죽음에 대해서 묻고 있는, 타키투스에게 쓴 2통의 서신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폼페이 유적지 입구.

  화산이 폭발하기전 폼페이(Pompeii)는 로마제국의 어떤 도시보다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위락시설로 로마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높은 도시였고 농업, 상업도 발달해 있었던 부유한 도시였다고 한다.

 

 

폼페이(Pompeii)는 이탈리아 캄파니아 지방에 있는 고대 도시 이다,

나폴리에서 남서쪽으로 23km 떨어진 베수비오 산 근처에 있으며, 사르누스(지금의 사르노) 강 어귀 북쪽으로 흘러든

선사시대의 용암에 의해 형성된 돌출부 위에 건설되었다.

폼페이 시는 선사시대의 용암이 흘러나온 자리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불규칙한 형태를 이루고, 

그리스 양식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다. 도시로 들어오는 7개의 문이 발굴되었다.

 남동-북서 방향으로 뻗어 있는 중심도로인 스타비아나 가도는 도시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있는 베수비오 문(해발 44m)과

 가장 낮은 지점에 있는 스타비아 문(해발 8m)을 잇고 있다.

 

 

 

 

두 개의 홍예문(虹霓門) 중 왼쪽문은 보행자를 위한 문,

가파른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포르타 마리나는 폼페이와 바다를 연결한 문으로 나폴리만 연안의 항구도시였던

당시의 생활상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 중 하나 이다. 우측 문은 바다에서 채취한 해산물과 농산물을 운반할 때 이용하던

 마차를 위한 길로 지금도 자국이 깊게 패어 선명하게 남아 있다.

 

 

 

 

화려한 원기둥이 그당시의 영화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폼페이 광장(Foro)

폼페이의 정치, 경제, 종교생활의 중심지로 넓이 157m의 광장 주변에는 바실리카, 아폴로 신전, 마첼룸, 성당 등의 공공 건축물로 둘러 쌓여 있다. 광장의 회랑에는 응회암으로 만든 도리아식의 기둥과 이오니아식 기둥이 있다. 발굴 당시 주변에서 많은 석상들이 발굴 되기도 했다.

 

포룸의 남쪽 끝에 있는 카피톨리움 반대쪽에는 시 의회와 행정관청 관리들이 모여서 회의하던 장소가 있었다.

 중심 방의 사면이 복도로 둘러싸인 거대한

 

바실리카(basilica)는

이 도시에서 건축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건물이며,  

바실리카 양식의 그리스도교 교회당의 기원과 발달을 연구하는 데 상당히 중요하다.

 지붕이 있는 이 건물은 상품거래와 재판의 장소로 사용되었다. 서쪽으로는 폼페이의 수호신인 베누스 폼페이아나의 신전이 있다.

 

 

 

 

 

 

 

공공건물들은 대부분 3개 지역으로 나누어져서 남서쪽의 거대한 평지에 있는 포룸(광장, 해발 34m),

 남쪽 방벽 가장자리의 만이 내려다보이는 높이에 있는 삼각 포룸(해발 25m), 동쪽에 있는 원형투기장 및 체육훈련장 등으로 분류된다.
 종교·경제·시민생활의 중심이었던 포룸은 2층의 열주가 있는 현관(포티코)에 의해 둘러싸인 커다란 4각형 지역이었다.

 카피톨리누스 구릉의 3대 신인 주피터·주노·미네르바에게 봉헌된 신전이 북쪽에서 포룸을 내려다보며 우뚝 서 있다.

 동쪽에는 큰 식료품 시장인 마켈룸이 있었고, 남쪽에는 62년의 지진 후 세워졌던 라르 신(도시 수호신)의 작은 신전,

베스파시아누스 신전, 그리고 부유한 후원자인 유마키아가 세운 인상적인 모직물 제조공장이 있었다.

 

 

폼페이 제우스 신전(Tempio di Giove)

광장(Foro) 북쪽 끝에 세워진 제우스 신전은 BC 150년 과거 에트르스코 신전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것이다.

이후 로마 공화정 시대에는 폼페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단 층계가 있는 높이 3m 단상 위에 세워진 제우스 신전은

2중의 기둥으로 둘러쌓여 있다. 과거 내부에는 헤라, 제우스, 아테나으 석상이 있었으나 지금은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폼페이 아폴로 신전(Tempio di Apollo)

바실리카 왼쪽에 위치한 아폴로 신전은 BC 5C경에 그리스인들의 아폴로 제단이 있던 자리에 산니타족이 축조한 것이다.

계단과 단상, 그리고 코린트양식의 기둥은 회랑 주위에는 다이아나 흉상의 복제품과 아폴로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원래 자리했던 비너스상 등은 현재 나폴리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전형적인 고대 이탈리라 건축양식을 띄고 있다.

 

 

바실리카 옆에 있는 아폴론 신전은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에 속한다. 삼각 포룸은 폼페이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인

도리아 양식의 신전이 있는 곳이다.  삼각 포룸 동쪽에 있는 극장·체육훈련장·소극장은 BC 3~1세기에 세워졌다.

 제우스 메일리키오스 신전, 이시스 신전, 삼니움족의 옛 체육훈련장이 근처에 있다.

 

 

 

 

 

 

 

 

반듯이 누워 있는 상태에서 죽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태아를 보호하기 위해 엎드려 죽은 산모도 있다.

지구상에서 이런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자연의 일을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 인간이 지구의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 시대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도자기들.

 

 

동물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쪼그리고 앉아 있는 채 죽은 사람. 동전도 보인다.

 

 

 

 

 

 

 

 

 

 

 

 

 

 

 

 

 

 

공중 목욕탕.

폼페이의 목욕문화는 부속 시설로 맛사지실 같은 서비스 공간도 있었고, 올리브 오일을 몸에 바르고 때를 벗기었다고 한다.

 

 

공중목욕탕 천정과 벽면.

 

 

 

 

벽은 단열 효과를 낼 수 있는 이중 구조로 만들어져 있고, 부조물도 설치 하였다.

Pompeii에서는 바닥뿐 아니라 벽에도 온돌을 설치하여 이용했다고 한다.

 

 

공중 목욕탕에서 가이드에게 설명을 듣는 모습. 냉탕 온탕을 갖춘 목욕탕은 거의 무료에 가까워 로마인들의 위생에 큰 몫을 했다.  

천정은 자연채광을 할 수 있고, 벽면에 조각이 있다. 요즘의 다목적 헬스클럽 같은 기능을 갖춘 곳이다.

AD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국교로 되고나서 맨 몸을 드러내는 것을 죄악시 하고, 목욕을 잘 하지않게 되어

유럽인구를 반으로 줄인 흑사병이 유행하게되고, 악취를 줄이는 방안으로 향수가 발달하게 되었다고 한다.

 

 

 바닥엔 타일을 깔고, 타일엔 바다의 신 엡투누스가 새겨져 있다.

 

 

목욕탕 천정. 천정엔 창을 설치하여 자연광을 실내로 끌여들였다.

 

 

목욕탕 건물 바로 가까이에 있어 목욕 후 바로 먹을 수 있는 빵 굼터.

 

 

 

 

 

민간 주택들이 독보적인 이유는 적어도 400년에 걸친 가정용 주택건축의 역사를 추적하는 일이 오직 폼페이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장 초기 주택들은 제1차 삼니움 점령기(BC 4~3세기)에 세워졌다. 특히 '외과의사의 집'은 이 기간 동안 세워진 초기 아트리움(중정) 주택의 예로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가장 호화로운 주택들은 교역과 문화적 접촉의 증대로 세련된 헬레니즘 문화가 유입되었던 제2차 삼니움 점령기(BC 200~80)에 지어졌다.

 구역의 한 가구 전부를 차지하는 파우노의 집에는 2개의 아트리움과 4개의 트리클리니아(식당), 그리고 열주로 둘러싸인 2개의 큰 안뜰이 있다. 이 집의 정면은 당시의 주요건축자재인 곱게 간 누케리아산 회색 석회화(石灰華)로 되어 있다.

 

 벽은 폼페이 제1양식(구조적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회반죽에 채색을 하여 대리석으로 겉치장한 효과를 노린 것이다.

 이 집에서 발견된 유명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모자이크는 분실된 그리스의 그림을 본떠서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많은 주택들은 정교한 모자이크 바닥으로 장식되었다.

멋있는 연회장과 자녀들의 교실로 사용되었던 엑세드라(벽감)는 BC 80~AD 14년에 유행했던 폼페이 제2양식(건축적 양식)으로 장식되었다.

 삼니움 시대에 지은 집들은 대체로 낮은 아트리움을 갖는 등 규모는 더 작았으나 장식은 보다 정교했다.

 로마 제국시대에 지은 루크레티우스 프론토의 집은 자그마하지만 우아한 주택이다.

 타블리눔(응접실)은 BC 15~AD 62년경에 흔하던 섬세한 폼페이 제3양식(장식적 양식)으로 장식되어 있다.

 베티 저택은 로마 시대에 번영을 누렸던 상인 계층의 전형적인 주택으로 몇몇 방은 폼페이 제4양식(환상적 양식)으로 꾸며져 있다.

 
분수와 청동·대리석 조각들이 있는 아름다운 정원, 훌륭한 그림들, 우아한 가구가 있는 아트리움-열주식 집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전형적인 형태가 아니다. 도시 전역에는 수많은 작은 주택들도 있으며, 그가운데 많은 것이 상점이다.

 

 

파우노의 집(Casa del Fauno)

고대 로마의 전형적인 부유층 저택의 형태인 파우노의 집은 폼페이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이다.

약 4m ×110m의 넓은 대지에 세워진 이 집은 산니타족의 도시였던 폼페이가 로마에 정복된 이후

로마와의 이해관계 조정임무를 맡은 정복자 실라의 조카인 푸블리오가 살던 곳이다.

 

다양한 유적들이 발굴된 파우노의 집에서 보아야 할 것은 입구 현관 홀의 낙수받이 수조에 있는

'춤추는 파우노(목신)과 작은 정원과 큰 정원 사이의 방에 있는 모자이크 '알렉산더 대왕의 전쟁'이 있다.

두 작품 모두 복제품으로 진품은 나폴리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위 사진의 아래 부분은 매설 되었던 수도관.

 

 

파우노의 집 바닥에 그려진 '알렉산더 대왕의 전쟁'

 

 

건물 바닥 전체에 그려진 그림은 똑같은 짙은 색인데 햇빛이 직접 쪼인 아래 부분은 빛이 반사되어 희게 나타나고, 

건물 그림자로 그늘진 곳은 흐리게, 관광객들의 그림자가 있는 곳은 더 짙은 색으로 나타났다. 

 

 

 

 

베티의 집(Casa dei Vetti) - 폼페이 유적 중 가장 정밀한 발굴 작업을 거친 곳으로 알려진 집이다. 그당시 부유층 상인이던

우울루스 베티우스 레스티투우스(

Aulus Vettius Restitutus) 형제가 거주했던 곳으로 원형유지가 잘 되어 있는 곳이다.주택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경제력을 과시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들여 장식하였다. 발굴 당시 집안에서 다양한 조각과 회화, 장신구, 생활용품 등이 발견되었는데 지금도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많은 프레스코 벽화들은 당시의 호화스런 생활과 높은 예술 수준을 느끼게 한다.

 

 

야자나무 뒤 멀리 베수비오산(Mount Vesuvius)이 보인다.

 

 

그 당시 마을 건물 사이의 도로.

 

 

현재도 사용 중인 수도, 그 시대에도 무료로 사용했던 공중 수도 이다. 

 

 

 

 

 

 

빵집 등에서 밀 같은 곡식들을 갈아내는 멧돌이라고 한다.

 

 

마차가 다니던 도로.

 

 

길 바닥의 큰 돌 사이의 작고 흰 돌멩이들은 마차가 밤에도 잘 다닐 수 있도록 설치된 야광 역할을 한다고 한다.

 

 

2000년 전의 도시인데도 여러가지가 너무 정교하게 건설되었다. 

유럽땅 대부분이 석회석이 포함된 습지대이므로 바닥에 돌을 깔아 마차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만든 마차로와 보행로,  

사람들의 도로 횡단을 위한 징검다리는 그시대 사람들의 지혜로움을 엿볼 수 있다. 돌판을 높게 만들어 마차가 달릴 수 없도록 하기도 했다.

 

 

그 당시의 환락가. 폼페이는 풍요롭고 시치스럼 도시였던 만큼 매춘행위가 많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된 조각품이나 벽화도 많았다고 한다.

주인이 건물 안에 들어가 있는 동안 하인은 골목 어귀에서 기다리다 식구가 나타나면 바로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윤락가 건물, 방 안 벽에 성행위를 묘사한 그림들이 많이 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춘화들.

 

 

이층으로 된 환락가 건물, 관광객이 집 안과 골목을 가득채워 줄 서서기다리다 들어가야 한다. 

 

 

관광객들이 꽉 들어찬 환락가의 좁은 골목.

 

 

 

 

BC 80년 로마 제국시대에 지어진,  폼페이의 동쪽 가장자리에 있는 원형 경기장은 현재까지 발견된 경기장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규모는 가로 135m, 세로 104m로 약 2000여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다.  다른 경기장과 달리 출입구 계단이 모두 외부에 있다. 

로마 식민지가 폼페이에 건설된 후에 세워졌다.

 

 

 

 

경기장 입구의 조각상.

 

 

대 체육관(Palestra Grande)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가로 130m, 세로 140m의 넓은 면적에 3면이 이오니아식 원주의 회랑으로 되어 있다.

안 뜰에는 한 쪽이 경사지게 만들어진 수영장이 있으며, 청년들의 체력을 촉진시키고, 정치 이념을 펼칠 수 있는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원형경기장 서쪽에는 커다란 체육훈련장이 세워져서 삼니움족의 옛 체육훈련장 대신 사용되었다.

 

 

폼페이 유적지 관광을 마친 후 점심 식사. 와인 한 병 시켜 나누어 마셨다.

 

 

두 사람이 들어와 노래를 부르기에 식당 서비스 차원에서 불러주는줄  알았더니 다 끝나고 나서 돈을 달란다.

식사 마치고 기차 역으로 가 기차를 타고 다음 관광지인 소렌토로 이동을 하게 된다. 

 

 

오랜 세월을 화산재에 묻혀있던 비극의 도시 폼페이 유적지.

아직도 발굴 중인 폼페이 유적은 이탈리아의 관광 수입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폼페이의 유적은 사르노 강으로부터 토레안눈치아타 시로 물을 끌어오기 위해

 16세기 말에 라치비타라고 알려진 구릉 밑에 터널을 팠던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폼페이의 발굴 작업은 1748년에 시작되었고, 1763년 그 장소가 폼페이였음을 밝혀주는 비문(rei publicae Pompeianorum)이 발견되었다.

 

1,710년 농부 한 사람이 우물을 파다 금붙이 장식장을 발견하게 되면서 폼페이(Pompeii)라는 도시를 발굴하게 되었다. 그당시 나폴리 국왕 '샤를르(Charles)'의 왕비 '마리아 크리스티네(Maria Christine)'는 옛 골동품에 관심이 많은 여자였는데 그녀는 왕실 공병부대 지휘관인 '알쿠비에르(Alcubierre)'를 시켜 베수비오스 산(Monte Vesuvio)기슭을 파헤쳤다고 한다.이 발굴에서 청동 조각품 몇개를 찾아냈고 12월11일에는 ‘헤르쿨레늄 극장(Herculaneum)’이라고 새겨진 돌을 발견하게 된다.1,748년 4월1일 샤를르 왕의 명령을 받은 '알쿠비에르(Alcubierre)'는 베수비오스산(Monte Vesuvio) 기슭의 또 다른 곳을 파헤치기 시작하게 되었으며 엿새째인 4월6일에 라틴어가 새겨져 있는 돌기둥들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어 눈부신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진 돌벽이 나왔고

4월19일에는 청동제 조각들과 대리석 조각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처음으로  금화를 잔뜩 움켜쥐고 석고처럼 단단히 굳어버린 남자의 시신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얼마 뒤 원형 극장을 발견한후 기대했던 보물이 나오지 않자 발굴작업을 중단하였다고 한다

 

그러다 1860년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

가 발굴을 하게 되었다. 

 그는 발굴지 사이에 놓인 지역을 정비하고 꼼꼼히 기록했다. 폼페이를 9개 구역으로 구분하여 각 구역을 가구(街區)로 분류하고

 거리의 각 문에 번호를 매겨서 각 집의 위치가 3개의 숫자로 편리하게 표시되도록 했다.

 또한 피오렐리는 화산재 속의 시체가 분해되어 생긴 구멍에 시멘트를 부어 신체 주형을 뜨는 기법을 개발했다.

 이 기법은 고대의 문, 가구, 밑바닥의 주형을 뜨는 데도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잠시 중단되고, 1951년 다시 재개되어 아메데오 마이우리가 1924~61년에 발굴책임을 맡았다.

 

스타비아이와 그라냐노 근처의 발굴작업은 카를로 4세에 의해 처음 시작되고, 1749~82년에 12채의 별장이 발굴 되었다.

 그후의 발굴작업은 금세기가 되어서야 다시 재개되어 지금도 진행중이다.

 열주(列柱)에 둘러싸인 2개의 큰 안뜰과 목욕탕이 있는 산마르크 별장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매몰된 폼페이와 다른 도시의 발견은 유럽인의 취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발굴 소식은 고대에 대한 열광을 불러일으켜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755년 나폴리로 첫 여행을 했던 저명한 독일의 고전학자 요한 요아힘 빙켈만의 찬사와 잠바티스타 피라네시의 에칭들이

발굴을 널리 알리는 데 큰 몫을 했다.

 영국 방문객들의 '대유럽 여행'에서 나폴리, 폼페이, 르쿨라네움은 중요한 체재지가 되었으며,

당시 나폴리 왕실의 대사(1764~1800)로 있던 윌리엄 해밀턴 경은 박식한 아마추어 고고학자 겸 열정적인 안내자로서,

또 그의 2번째 부인인 엠마 해밀턴 여사는 안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미술가, 건축가, 도예가, 심지어 가구 제조업자들까지 폼페이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동시대의 내부 채색 장식은

 발굴된 프레스코에서 착안되었다. 18세기 영국 건축가들인 로버트 애덤과 제임스 애덤은 비슷한 주조(主調)의 회반죽칠을 유행시켰다.

 유명한 도예가 조시아 웨지우드는 작품 양식을 바꾸는 한편, 폼페이가 에트루리아인의 도시였던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자신의 도자기 공장을 '에트루리아'라고 이름지었다.

 프랑스에서는 폼페이 양식과 결합된 루이 16세 양식으로 퐁텐블로 궁전에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방들이 장식되었고,

 이 양식은 유럽 전역에서 유행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와 그의 제자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도 발굴에서 작품을 위한 영감을 얻었다.

 실제로 폼페이 발굴이 자극한

신고전주의

양식은 로코코 양식을 대신하여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의 예술 양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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