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여행

바티칸 박물관, 시스티나 성당

opal* 2010. 6. 21. 05:38

 

   2010-06-21(월)

▷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인 바티칸 박물관 (수신기 제공)

▷ 미켈란제로의 최후의 심판이 전시된 시스티나 예배당

 ▷ 카톨릭  총본산인 성베드로 대성당

▷ 로마의 상징인 대형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외관)

▷ 고대로마의 생활 중심지였던 포로로마노(외관)

▷ 동전을 던져 사랑을 나누는 트레비 분수 등 관광.

 

 

숙소를 출발하며.

오늘은 아침 일찍 서둘렀다. 기상도 빨리하고 식사도 일찍 끝냈다. 유럽 관광의 절정인 로마를 관광하기 위해서다.
 민소매나 반바지 차림은 입장을 불허한다고 한다. 엄숙하고 신성한 성령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밖에서 얼마를 기다려야 입장할 수 있을런지, 일단 빨리 도착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란다.

 

 

上-이탈리아인 버스 기사 젤라르또씨 와 가이드 김 ㅁㅅ씨. 로마에 입성하려면 티켓팅을 해야 한다. 下-로마시 경계와 기차역 아우렐리아.

 

바티간 박물관에 들어가기위해 건물 밖에서 몇 줄로 늘어서있는 관광객들. 이곳은 언제나 이렇게 붐빈다고 한다.

 

세계 각처에서 모여든 사람들 속에 함께 섞여 차례를 기다린다.

 

 

도로변이라 시끄럽고, 사람들이 많아 통제가 힘드니 수신기가 제공되어  이어폰을 귀에 꽂고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다. 

성당 안에서는 가이드의 설명이 제한되는 모양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워낙 많다보니 안에선 더 정신이 없을 것 같다. 

 

시스티나 소성당 내부의 그림은 (천장화, 벽화) 촬영할 수 없고, 사람들이 많아 자칫 일행을 잃어 버릴 수도 있다며

 밖에서 줄 서서 기다리는 동안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그림을 펼쳐들게 한 후 설명하는 현지에서 만난 가이드의 안내 설명을 듣는다.  

천지창조 3셋트, 아담과 이브 3셋트, 노아 이야기 3셋트, 최후의 심판 등 천당과 지옥 그리고 연옥 등에 있는 400여명의 인물까지 

하나 하나가 다 의미있는 인물이라며 설명하고, 등을 구부리고 있는 화가 미켈란젤로 자신도 화면 아래 한 쪽에 그려 넣었다는 설명, 

교황과의 일, 다른 화가들과의 갈등 등까지 자세히도 설명을 해 준다. 유머러스하게 웃겨가며 기다리는 시간 지루하지 않게.

오늘 처음 만난 키 작은 현지 가이드, 노란우산으로 우리 팀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일행에게 그림 들게 하고, 재미있게 설명을 해준다.  

 

 

 

 

 

위 그림 중 위 우측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구부리고 있는 사람이 화가 자신이다. 위 좌측 사진엔 오른 쪽아래에 조그맣게 표현되어 있다.

 

거리의 악사 앞에 가이드 Kim이 서 있고, 줄은 여간해서 줄어 들지 않는다. 

기다리다 지친 꼬마들은 근쳐 피자집에 들어가 먹고 나오기도 한다.  

 

드디어 박물관 입구.

바티칸은 세계에서 인구와 면적이 제일 작은 국가이며, 교황이 다스리는 시국 이다.

교황은 카톨릭 교회의 수장이며 로마 교구의 주교, 바티칸 시국(市國)의 원수이다.

뒤로 보이는 저 담이 경계인 국경이 된다. 안으로 들어가면 바티칸 시국.

 

 

바티칸 박물관 입장권과 솔방울 광장의 관광객.

下左- '천체 안의 천체'라는 작품으로 실제로 돌아가게 만들었다고 한다.

 

바티칸 박물관 내 솔방울 광장에서.

 

많은 사람들 속에 떠밀려 다니다 시피하며 구경을 해야 한다.  

일방통행으로 진행하며 입구와 출구가 달라 일행을 잃어버리면 찾기도 힘들다.

 

수없이 많은 조각상과 천장화, 돔.

 

머리가 셋인 뱀 메두사의 목을 잘랐다고 하는 페르세우스, 우리나라 시골집 안마당 같은 분위기의 정원 둘레에 조각품이 많다.

 

 

 

下,左 - 라오콘(Laocoon) 군상.

기원전 1세기 중엽에 제작된 대리석 조각. 라오콘이 두 아들과 함께 큰 뱀에게 교살(絞殺)되어 죽을 때의 괴로운 모습을 나타낸 것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일화 중 트로이의 사제였던 라오콘은 트로이 전쟁당시 그리스가 트로이 성 안에 몰래 가져다 놓은 목마를

파괴해야 한다.'고 신기를 누설해 이에 분노한 여신 아테나가 보낸 뱀에 아들들과 함께 몸이 감겨 죽는다는 일화를 작품화한 것이다.

헬레니즘 시대인 기원 전 100년 전후에 만들어진 작품이 1506년 로마 에스퀼리노 언덕에서 미켈란젤로에 의해 발굴되어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 물건 이다.

 

관람객이 많아 관람은 커녕 사진하나 제대로 찍기도 힘들다. ㅎㅎ 

 

 

 

 

조각작품마다 이름이 있는데 이름을 잊었다.

 

下,右 - 벨베데레의 토르소(Torso).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인 남자 누드 상(像)의 파편(높이 159㎝).

네스토르의 아들인 아테네의 조각가 아폴로니오스의 서명이 들어 있어서 오랫동안 BC 1세기의 것으로 생각되었다.

지금은 아폴로니오스가 2세기의 원품을 모사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작품의 동적인 자세는 미켈란젤로의 힘찬 조각 양식을 발전시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그 뒤로 마니에리스모 시대나 후기 르네상스 시대 및 바로크 시대의 많은 미술가들이 이것을 깊이 연구하였다

인체의 머리와 팔, 다리를 제외한 몸통만을 표현한 작품을 토르소라고 한다. 

미켈란젤로가 '신의 작품'이라 평했다는 이 조각은 원래 머리와 팔다리가 있었던 건지, 본래 위치는 어떤 곳이었는지...

논란이 많은 작품으로 유명하다.

 

 下,左- 가운데, 로마 시대의 조각상들을 배경으로 누워 있는 네로 황제의 욕조. 右- 돔 천장

 

모자이크 바닥.

 

 

 

 

 

 

양탄자에 섬세하게 그려진 인물화.

 

 

착시 현상을 일트킬 정도로 마치 양각된 것처럼 보이는 평면 그림.

 

카펫에 수놓아진 이 그림은 예수님 눈이 어느쪽에서 보아도 나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도록 그려졌다.

 

 

 

무아노의 천장벽화

16세기말에 무씨아노와 그의 제자들이 3년에 걸쳐 이탈리아 전역을 그려 놓은 것이다.

120m에 걸쳐 긴 복도에 전시되있는데 16세기의 역사 기록과 지도 작성법을 볼 수 있다.

고대와 현대의 이탈리아 모습을 1580년의 프레스코로 그렸다.

현재 인공위성으로 그린 지도와 거의 오차가 없을 만큼 정밀하고 정확하다고 한다.

 

 

 

로마의 옛 지도.

 

 

화려하기 그지없는 천정화의 일부분.

 

 

 

 

 

 

 

 

 

 

 

 

 

↑벽에 걸어논 안내판 화살표 위 그림이 말해주고 있다. 

 

드디어, 그토록 찬사를 아끼지 않는 시스티나 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이 그림을 보고자...

미켈란젤로의 천지 창조 중 '아담의 창조'그림이 위 사진 가운데 보인다.

밖에서 한참 동안 가이드에게 설명 듣던 '천지 창조' 천정화가 있는 시스티나 성당에 들어 섰다.

사진 찍지 말라기에 그냥 구경만 하고 있었더니 웬걸?  세계 각 처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안되겠다 싶어 카메라 꺼내 조명 터지지 않게 설정 후 몇 컷 찍었다.

조명 설정을 안하니 실내라 빛이 부족해 흔들린다. 감도를 높혀 찍었더니 색감이 별로 좋지 않다.   

그림을 제대로 보려면 이리 저리 옮기며 서있는 자리에서 한 바퀴씩 뱅뱅 돌아가며 보아야 한다.ㅎㅎ 그림이 가로 세로, 뒤죽 박죽.

 

시스티나 성당 천정에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지창조'

미켈란젤로가 활동하던 르네상스 시대에는 프레스코 기법

(건물의 벽돌을 쌓고 그 위에 회반죽으로 벽을 마감하면 벽면이 다 마르기 전에 프레스코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법)

으로 많이 그렸다.  선생은 그리고 제자는 뒤에서 절구에 물감을 갈아댄다.

요즘같이 다양한 페인트가 없던 시절의 미켈란젤로나 라파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등 당대의 예술가들은 이런 기법으로 벽화를 그렸다.

 

르네상스 시대의 대가인 미켈란젤로, 살아생전에는 본인이 조각가라 불리워지기를 원했다.

당시의 조각적 기법들은 사실적 기법을 이루어졌고 그 기법 그대로 천지창조가 그려졌다.

미켈란젤로는 그림에서 인체의 작은 근육의 표정 하나도 놓지지 않고 그렸다.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이 그려진 시스티나 성당 내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은 그림 내용이 위로 부터 네 부분으로 구분된다.

위쪽 1부에는 천사들,  2부는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12사도와 순교한 성인들로 이루어진 천국,

3부는 연옥. 천사들의 나팔소리가 죽은 자들을 깨워서 심판을 받게한다. 좌우에는 천국과 지옥으로 가는 장면,

4부는 지옥 모습. 그리스도 오른 쪽 아래에 사람 엎드려 있는 사람이 있다.

일그러진 얼굴 모습을 하고 있는 이는 미켈란젤로 자화상 이다.

 

미켈란젤로는 천정화 '천지 창조'를 먼저 그리고 몇 년 후 벽화 '최후의 심판'을 그렸다.

 

 

 

 

창문을 제외한 벽면과 천정에 마구마구 그려진 성화들.

 

 

 

 

시스티나 예배당 

건축가 조반니 데 도르티의 설계로 1473년 착공, 1481년에 완성하였다.

건물 자체는 깊이 40.5m, 너비 13.2m의 장당()을 높이 약 30m의 요면() 궁륭천장(窿)으로 덮고,

좌우에 고창()을 배열한 평범한 것에 불과하나, 내부의 벽화와 천장화()는 르네상스 회화의 보고()임을 드러내고 있다.

 

본당()의 완성에 이어 교황 식스토 4세는 피렌체와 움브리아의 대표적 화가를 불러

좌우 벽면에 《모세의 생애》와 《예수의 생애》 등 도합 12점의 벽화를 제작하도록 명령하였다.

보티첼리를 중심으로 D.기를란다요  P.디코시모, L.시뇨렐리  페루지노, 핀트리코 등이 3개년에 걸쳐 그린 이들 그림에는

성기() 르네상스의 도래가 가까운 젊은 이탈리아 회화의 싱싱한 감각이 넘치고 있다.

 

그 뒤 얼마간의 시기를 두었다가 미켈란젤로에 의한 유명한 천장 그림의 제작이 시작된다.

1508년 당시 교황 율리우스 2세로부터 이 대역()을 명령받은 그는, 먼저 화필로 넓은 천장에 기둥과 인방() 등의

건축적인 구조부분을 그리고, 이렇게 하여 만들어진 틀 안에 여러 장면을 그려 넣는 수법을 썼다.

 이런 식으로 1512년까지는 천장 중앙부에 《창세기》를, 그 주위에 《12명의 무녀()와 예언자》를,

삼각형 모양의 요면벽()과 반월형 벽면에 《그리스도의 조상》을, 그리고 네 모퉁이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각각 그렸다.

 

1534년 그는 다시 바울로 3세의 위촉으로 정면의 제단화()를 그렸다.

벽면전체를 상하 4층으로 나누어 7년에 걸쳐 위에서부터 천사,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심판의 장면, 묵시록의 7천사,

리고 맨 아래층에는 지옥을, 지난번의 고전적 작풍과는 다른 격렬한 터치로 표현하였다.

이 회화의 완성으로 최초의 12점의 측벽화()와, 미켈란젤로의 고전적 화경()을 말하는 천장화,

그리고 앞으로 닥칠 바로크 회화의 선구적 역할을 하는 제단화,

바꾸어 말하면 성기() 르네상스를 중간 시기로 하는 전후 세 시기에 속한 작품이 이 성당 안에 모이게 되었다. 

 

교황 식스토 4세가 성모 마리아에게 바친 바티칸 시국(市國)안에 자리한 성당으로 교황 선거 회의가 진행되는 장소이다.

당시의 정치적 혼란을 반영하여 성당과 성채(城砦)의 기능을 겸할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성당 내부 대리석 제단을 기준으로 벽화 '최후의 심판'이 정면에 위치하며,

왼쪽은 '모세의 일생', 오른쪽은 '그리스도의 일생'이 그리스도와 모세의 일생을 주제로 하여 각각 6개의 벽화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미켈란젤로가 제작한 천장화가 유명한데, 천장화 '창세기'는 9개의 직사각형 틀 속에 구약성서의 천지창조 일화를 주제로

'빛과 어둠의 분리' '해와 달의 창조' '물과 땅의 분리' '아담과 이브의 창조' '원죄와 낙원으로부터 추방'

 '노아의 제물' '노아의 대홍수' '술취한 노아' 등이 그려져 있다.  이는 시대를 초월한 미의 극치를 이룬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의 제작년도는 1508년~1512년.

 

1508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Cappella Sistina) 의 천장화를 그리는 일을 맡겼다.

화가는 4년 동안 계획하고 그려 나갔다.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천장 아래 세운 작업대에 앉아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천장에 물감을 칠해나가는 고된 작업이었다. 이로 인해 목과 눈에 이상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혼자서 4년 만에 이 대작을 완성하였다.

 

이 천장화는 성서의 〈천지창조〉의 순서와는 반대로 노아에 관한 3가지 이야기, 즉 입구 쪽에서부터 그려졌는데, 완성까지는 4단계를 거쳤다.

첫 번째 단계는 2개의 곡면 벽화에 그린 3가지의 노아에 관한 이야기와 8명의 나체상으로 1509년 9월 15일에 완성되었다.

두 번째 단계는 '아담과 이브의 원죄와 낙원 추방'과 '이브의 창조', 4명의 나체상, 두 명의 예언자', 4개의 삼각형 벽화',

2개의 곡면 벽화로 1510년 8월에 완성되었다.

번째 단계는 '아담의 창조', '하늘과 물의 분리', '달과 해의 창조', '빛과 어둠의 창조' 등의 4가지 이야기와

8명의 나체상, 5명의 예언자, 4개의 삼각형 벽화, 2개의 곡면 벽화로 1511년 1월과 8월 사이에 완성되었다.

네 번째 단계는 나머지 모든 원형 벽화로 같은해 10월부터 1512년 10월 사이에 완성되었다.

그려나간 순서에 따라 화면은 점점 단순화 되어 갔다. 높은 곳에 그려지는 천장화의 특수성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림은 1512년 완성되어 같은 해 만성절인 11월 1일 제막식을 가졌다.

그후 500여 년 동안에 이 벽화는 여러 차례에 걸쳐 덧칠과 복원작업이 이루어졌다.

1982년에는 일본의 한 방송사의 후원으로 최첨단 기법을 동원한 복원작업이 9년에 걸쳐 실시되어 그림을 덮고 있던 때와

후대에 이루어진 덧칠이 제거되어 본래의 색채와 형태가 되살아났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Michelangelo Buonarroti, 1475.3.6~1564.2.18]

이탈리아의 조각가·건축가. 르네상스 회화, 조각, 건축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산 피에트로대성당의 《피에타》,《다비드》,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 등이 대표작이다

  

카프레세 출생.13세 때에 기를란다요(Ghirlandajo)에게 입문하고, 조각을 위한 인체 해부에도 전념하였다.

 1492년 메디치가의 로렌초가 죽은 후, 프랑스군이 침입하자 볼로냐로 피난, 거기서 J.d.퀘르치아의 조각도 배웠다.

바티칸의 산 피에트로대성당에 있는 《피에타Pieta》를 프랑스 추기경의 의뢰로 완성한 것은 1499년경이다.

1501년 피렌체로 돌아와, 시청으로부터 《다비드》의 대리석상을 부탁받아 1504년에 완성하였다.

1504년 피렌체 시청에 《카시나의 싸움 Battle of Cascina》의 벽화를 의뢰받아,

건너편 벽면에 《안기리의 기마전》을 그리게 되어 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경쟁하였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이듬해 율리우스 2세에게 불려 로마로 가서, 그 기념 묘비를 만들게 되었다.

그런데 브라만테가 산 피에트로 대성당의 개축에 착수한 이래, 율리우스 2세가 냉담해지자,

이에 성이 난 그는 피렌체로 돌아와 다시 《카시나의 싸움》 제작에 전념하였다.

   

1506년 레오나르도도 화고(稿)를 완성, 벽화를 착수하였으나, 쌍방 모두 진전이 없던 중에 중단되고 말았다.

1506년 말 미켈란젤로는 다시 율리우스 2세에게 불려가, 볼로냐에서 화해하고, 1508년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를 위촉받았다.

벽화에는 경험이 없다고 사퇴하였으나, 허용되지 않아 적대자 브라만테의 간계를 물리치면서 제작을 시작하였다.

일은 진척되지 않고, 보수도 지불되지 않고, 형제들로부터는 금전을 강요당하고, 교황과도 충돌하는 악조건하에서 1512년에 완성하였다.

《천지 창조》 《인간의 타락》 《노아 이야기》의 3장 9화면을 구약 내용의 순서와는 반대로 그리기 시작,

그 화면 사이에 예언자나 천사(使)나 역사()를 배치하고, 복잡한 모습을 부여하여, 묘사된 대리석상 같은 인간군상을 부각하였다.

천장화 완성의 다음해에 율리우스 2세가 사망,

 

《저녁》과 《낮》의 두 남성상(미완성)과 《성모자상》(미완성)은 르네상스 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그 후 메디치가()의 전제군주 알렉산드로와 반목하여, 메디치가 묘묘를 미완성의 상태로 둔 채 1534년에 피렌체와 영원히 결별하여

로마로 옮겼다. 그 해 새 교황 바오로 3세로부터 시스티나 성당의 안쪽 벽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고 다음 해부터 혼자 착수,

고생 끝에 6년 후인 1541년에 《최후의 심판 Last Judgment》을 완성하였다.

 

그리스도가 ‘성난 그리스도’로서 거인처럼 군림하여, 천국에 오르는 자와 지옥으로 떨어지는 자가 좌우로 크게 회전하는 군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 구도()와 동적 표현은 르네상스의 고전 양식을 해체하여 격정적인 바로크 양식의 추이()를 보였다.

그 제작 중, 독신이었던 그가 교양 높은 페카라공() 미망인 비토리아 코론나를 알게 되어 영혼의 위로를 받게 된 것은

유명한 에피소드인데, 이 부인도 타계하여, 그는 다시 고독해졌다.

1542년에는 바티칸궁의 파올리나성당의 장식도 위촉받아 《바울로의 개종》과 《베드로의 책형(磔)》을 1550년에 완성하였다.

 

그 사이에도 《피에타 Pieta》의 군상을 3체()(피렌체 대성당, 팔레스토리나, 론다니니)나 만들었고,

르네상스로부터 초기 바로크에 이르는 89세의 오랜 예술적 생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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