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문 정희 - 겨울 사랑, 오늘, 중년 여자의 노래, 성애꽃

opal* 2010. 12. 10. 19:40

 

 

겨울사랑

 

                                   문 정희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 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오늘

 

                                 문 정희

 

그냥 나란히 서 있을 테야

푸른 새 한 마리
바람 차고 일어나

물결 위에
물결 위에 퍼덕이게 하고

하늘 아래
나는
그대와 나란히
그냥 나란히 서 있기만 할 테야

 

 

중년 여자의 노래

 

                                             문 정희

 

봄도 아니고 가을도 아닌
이상한 계절이 왔다

아찔한 뾰족 구두도 낮기만 해서
코까지 치켜 들고 돌아다녔는데

낮고 편한 신발 하나
되는 대로 끄집어도
세상이 반쯤은 보이는 계절이 왔다.

예쁜 옷 화려한 장식 다 귀찮고
숨막히게 가슴 조이던 그리움도 오기도
모두 벗어 버려
노 브라 된 가슴
동해 바다로 출렁이든가 말든가
쳐다보는 이 없어 좋은 계절이 왔다.

입만 열면 자식 얘기 신경통 얘기가
열매보다 더 크게 낙엽보다 더 붉게
무성해 가는
살찌고 기막힌 계절이 왔다

 

 

성애꽃

 

                                                문 정희

 

추위가 칼날처럼 다가든 새벽
무심히 커튼을 젖히다 보면
유리창에 피어난, 아니 이런 황홀한 꿈을 보았나.
세상과 나 사이에 밤새 누가
이런 투명한 꽃을 피워 놓으셨을까.
들녘의 꽃들조차 제 빛깔을 감추고
씨앗 속에 깊이 숨 죽이고 있을 때
이내 스러지는 니르바나의 꽃을
저 얇고 날카로운 유리창에 누가 새겨 놓았을까.
하긴 사람도 그렇지.
가장 가혹한 고통의 밤이 끝난 자리에
가장 눈부시고 부드러운 꿈이 일어서지.
새하얀 신부 앞에 붉고 푸른 색깔들 입 다물듯이
들녘의 꽃들 모두 제 향기를
씨앗 속에 깊이 감추고 있을 때
어둠이 스며드는 차가운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누가 저토록 슬픈 향기를 새기셨을까.
한 방울 물로 스러지는
불가해한 비애의 꽃송이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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