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여행

5일째, 폴란드 오시비에칭(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opal* 2012. 6. 2. 22:00

 

(6월 2일 토요일)

 

슬로바키아, 반스카 비스트리차(Banská Bystrica)에 있는 호텔에서 자고 일어나 아침에 바라본 풍경.

 

위 사진 우측으로 아래 사진 두 장이 연결되는 모습이다.

어제 저녁 둘러본 성당과 시가지, 지붕만 보인다.

 

 

마른 누룽지에 뜨거운 물을 부어 불리는 동안 빵을 먹는다, 과일을 먹을 수 있어 행복한 아침, 식사 후 Lux Hotel을 나서서 폴란드로 이동.

 

슬로바키아의 반스카 비스트리차(Banská Bystrica)는 도심도 한적했거니와 변두리는 산악지대지만 평화롭게만 보인다. 

 

 

 

슬로바키아를 떠나 폴란드로 향하며 타트라(Tatea Mts.)를 지난다. 타트라는 국경지대에 위치한 알프스 산맥의  일부분 이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전원 풍경을 바라보니 내 두 발로 걷는 트레킹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 오른다.

 

정원풍경이 아름다운 슬로바키아.

 

타드라지역의 아름다운 산간마을.

 

산간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중세시대의 고성이 아직 남아 있다. 

 

넓은 도로를 달리다 도중에 공사 중인 곳이 있어 우회도로를 이용한다.

 

커다란 새들도 보이고 소들도 보이는 초원을 지난다.

 

슬로바키아와 폴란드 국경. 사진 윗쪽으로 보이는 곳이 폴란드,   

 

국경지역에서 잠시 휴식, 이곳에서도 화장실 이용료는 50C

 

 

상점에 진열된 초콜렛, 아이들도 먹는 간식을 이런 모양으로 만들다니... 

 

지나온 슬로바키아를 배경으로.

 

앞으로 가야할 폴란드를 배경으로.

 

다시 버스에 올라 폴란들 땅을 달린다.

 

 

타트라지역은 두 나라에서 모두 접하는 국경지역으로 보호되고 있다.

 

 

 

 

 

오시비엥칭 이정표, 폴란드어로 오쉬비에칭(Oświęcim), 독일어로 아우슈비츠( Auschwitz)이다.

 

 

오시비에칭은 폴란드 지명, 독일이 점령한 후 독일어로 아우슈비츠로 불렸다.

 

오시비에칭 역사驛舍.

 

점심먹은 식당,

 

국수 스프와 돈까스 점심.

 

 

꽃으로 치장된 식당 건물.

 

 

점심 식사 후 달려 '국립 오시비엥칭 벅물관'(아우슈비츠( Auschwitz,강제 수용소) 도착.

 

1947년 세워진 아우슈비츠 수용소 역사 박물관은 유네스코에 의해 1979년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 되었다.

아우슈비츠는 제1수용소와 그보다 훨씬 규모가 큰 제2 수용소로 이루어져 있다.

 

헤드셋 하나씩 받아 걸고 가이드의 설명을 듣는다.

 

1940년 4월 27일 하인리히 히믈러가 첫번째 수용소 건립을 명령했으며, 같은 해 6월 14일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송되었다. 

1941년 히틀러의 명령으로  대량 살해시설로 확대 되었으며 1942년 부터 대학살을 시작 하였다.

 

작은 '아우슈비츠 1호'에는 주로 폴란드와 독일 정치범들이 수용되었다. 1941년 10월 인근의 브제진카(독일어로는 '비르케나우') 마을 외곽에 비르케나우라고도 불렸던 '아우슈비츠 2호'를 증축했다.

그뒤 나치 친위대(SS)가 아우슈비츠 2호를, 가스로 죄수들을 처형하는 데 사용한 바데안슈탈트('목욕탕'), 처형당한 죄수들의

시체를 보관하는 데 사용한 라이헨켈러('시체보관실'), 아인에셔룽스외펜('화장막') 등을 갖춘 대규모 집단 처형소로 개발했다.

이는 모두 유럽 유대인들의 멸종을 위한 '최후의 해결책'이었다.

1942년 5월에 세워졌고 후에 '아우슈비츠 3호'라고 명명된 드보리 마을 부근의 또다른 수용소는 부근 IG 파르벤의

 대규모 화학합성 고무농장에 노동자들을 공급해주는 강제노동수용소가 되었다.

1940~45년에 모든 아우슈비츠 집단수용소의 명령권자는 친위대 대장 루돌프 프란츠 회스였다.

 

유대인들은 화물차에 실려오는 대로 선별되어 젊고 능력 있는 남자와 여자들은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지고,

노약자 및 어린이들과 그들의 어머니들은 곧바로 공동 샤워시설로 위장된 가스실로 보내 살해되었다.

강제노동자들 가운데 과로·질병·굶주림 등으로 허약해진 사람들을 주기적으로 선별하여 제거했다.

수용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의학실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의학실험의 예로는 값싸고 신속하게 불임을 시키거나 살해하는 방법,

아리안족의 수를 늘리는 방법을 찾기 위한 쌍둥이들의 시체검시 등이 있었다.

악명 높은 의사 요제프 멩겔레가 쌍둥이 부검실험을 지휘했으며 선별작업을 감독했다.

소련군이 진격해오자 아우슈비츠는 차츰 폐기되어 갔고 생존한 대부분의 포로들은 1945년 1월 17일 다하우·마우트하우젠을 비롯한

다른 독일 집단수용소로 이송되었다. 남겨진 7,650명의 포로들은 10일 뒤 이곳에 도착한 소련군에 의해 발견되었다.

 

수신기를 이용하여 가이드에게 설명을 대충 들은 후 정문을 향한다.

 

모든 수감자들이 거친 정문.

 

"ARBEIT MACHI FREI : 일하면 자유로워진다."  정문 위에 걸린 역설적인 문구로 유대인을 솔깃하게 했다.

"일하면 자유로워진다" 는 "살고 싶으면 일하라" ,  유대인들은 일을 한다는 생각으로 속고 왔으니...

 

아우슈비츠는 폴란드 남부 비엘스코주(州)에 속해있는 도시로 97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역사도시, 크라코우에서 약 61km 떨져 있다. 

 

아우슈비츠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유례없는 '인간 도살장'인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1940년 6월에 나치 친위대(SS) 총사령관 하인리히 힘믈러에 의해 세워졌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붉은 벽돌의 단층건물로 전체28동이3열 횡대로 열지어 있다.

 

이곳은 도심과 떨어져 있고 가까운 곳에 철도가 지나고 있어 수용자의 대량수송에도 효과적이라는 것이 입지선정의 이유였다.

나치는 1941년 11월 이곳에서 3㎞ 떨어진 비르케나우에 두번째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세웠다.

 

약 15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1947년 7월 폴란드 의회가 박물관으로 영구보존키로 결의하여

현재는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다. 그리고 1979년 유네스코는 이곳을 세계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인간의 가치와 이상을 지지해야 한다는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다.
폴란드는 이곳을 회복하자마자 아우슈비츠를 옛 이름인 오수비엥침으로 되돌렸다. 비참했던 역사를 더 이상 기억하기 싫다는 이유였다

 

 

 

 

 

 

 

 

오시베에칭(아우슈비츠)은 폴란드의 옛 수도 크라크프에서 자동차로 50분 정도의 거리, 이곳에 수용소를 설립한 것은 철도 교통의 요충지로

유럽의 중심지라 할 만큼  각처로 부터 수송이 편리하고 주변에 산이 없어 탈출하는 수감자들을 빨리 발견 할 수가 있기 때문이란다.

 

모래시계안에 안에 있는 가루는 유대인들의 골분이라니...

 

나치의 만행을 설명하는 인솔자와 세계에서 모여든 각 팀들.

 

 

 

 

 

 

죽음의 기차를 타고온 수감자들.죽으러 오는 줄도 모르고 많은 생필품들을 갖고 왔다.

 

현지 가이드의 설명이 이어질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 온다.

 

각 처로 부터 온 수감자들.

 

 

 

 

 

수용시설이 있는 곳과 위치.

 

 

 

 

윗층과 아랫층이 따로 구별된 독가스실 모형 구조물.

 

독일군이 사용한 2만 Kg에 달하는 독가스 통, 나치 학자들이 몇 년을 연구하여 독가스통 1개로 400명을 죽일 수 있다고 한다.

 아우슈비츠로 운송된 사람의 70%이상, 즉 노동력이 없다고 판단된 대부분 사람들이 독가스실에서 죽었다.

수감자들을 속여 목욕탕에다 대량으로 집어 넣은뒤 천장의 구멍을 통해 이 독가스를 투입했다.

이름은 '사이클론 비(B)'. 자그마한 알약 같은 형태에서 공기속으로 노출되면 가스를 내면서 급속히 기화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처음에는 쥐약으로도 많이 사용, 독일의 데게슈라는 업체가 생산해서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약 30만 마르크의 이익을 거두었다고 한다.

 

 

 

 

 

유대인 수감자들이 사용하던 안경, 나중에는 재활용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가스실로 끌려가 죽은  유대인들이 기도할때 두르던 숄(shawl), 이 줄무늬는 유대인을 상징한다. 

 

 

장애인들이 사용했던 지팡이와 의족, 사용했던 물품들.

 

가방에 들어있는 귀중퓸은 나중에 그대로 돌려주겠다며 그럴듯하게 속이고 이름과 주소까지 쓰게하고 결국은 잔인한 죽음으로 몰아갔다.  

 

학살된 이들이 입었던 옷과 신발, 신발은 밑창에 귀중품이 있을거라며 보관했고,

일부 어린이들은 생체실험의 대상으로 뽑혀 생식기가 거세되는등 온갖 만행을 당했다.

 

수감자들의 신발이나 물건 등 모든 것들이 하나의 언덕을 이룰 정도로 수북하게 쌓여 있다. 다른 방은 모두 촬영 허용,

그러나 천정에 닿도록 수북하게 쌓인, 카펫을 짜기위해 모아둔 희생자들의 머리카락이 7톤이나 되는 전시실은 촬영을 금지한다.

 

많은 사람들의 방문으로 계단이 닳았다. 

 

면도, 구두용 솔과 구두약. 그 시대에 가죽신을 신었던 부유했던 유대인들.

 

여섯번째 동에 있는 갖고온 물건을 빼았는 모습과 매맞는 모습, 수감자에세서 빼앗은 사진들,

 

수감자 1인당 앞 모습과 양 옆모습 등 3장씩 찍혀 있다.

 

팔뚝이나 몸에 수감번호를 문신으로 새겨 넣었다. 수감자들의 줄무늬 의복은 한 번도 세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쌍둥이들의 유전자 실험이나 다양한 연구를 위해 마루타처럼 여러가지 생체 실험을 당했다고 하니 얼마나 지독한 놈들인지...

 

수감 당시 60킬로그램 안팎에 이르던 건강한 여인들이 23~35킬로그램으로 줄어든 비참한 모습, 

 당시 수감자들의 하루 식사량은 1300~1700 칼로리를 넘지 않았고, 아침식사로 커피라고 불린 액체 500cc, 점심식사로는 거의 물 뿐인

썩은 야채로 만든 수프 1리터, 저녁은 300g의 검은빵과 작은 소시지와 마가린, 채소음료가 전부였다고 한다.

 

겨우 연명할 정도의 죽만 주고 12시간의 노동을 시켰다. 사진 위 우측 검은 조각상은 수용소 생존자가 나중에  만든 조각상으로

경계심과 두려움이 나타나는, 처참하게 굶주렸던 모습을 재현하였다.

 

 

수감자들의 사진은 생년월일, 이곳에 들어온 날과 사망한 날이 적혀있는데 3개월 이상을 산 사람이 없다고 한다..

 

어린아이들의 유퓸. 어린이들도 정면 사진과 양 옆 세 장의 사진을 찍되 하나는 모자를 쒸워 찍어 놓았다.  철조망안에 갇힌 사람들.

 

유대인족 씨를 말리기 위해 남자 아이들의 성기를 잘라버린 나치의 만행.

 

 

 

 

감시초소.

 

 

철조망은 수감자들이 탈줄하지 못하도록 고압 전류가 흐르게 했다. 어떤 사람은 너무 힘들어 일부러 철조망으로 달려들어 죽기도 했단다.  

 

가시 철망과 고얍전류가 흐르는 울타리,

 

기관총이 설치된 감시탑,

 

화장터 옆에 있는 교수대는 유대인을 처참하게 죽였던 수용소의 소장이 종전 후 공개 처형된 곳이다. 

 

 

 

 

대 학살이 이루어졌던 가스실.

 

천정에서 가스 사이클론빈(Cyklon B)를 투입시켰다는 가스실, 샤워를 시킨다며 들여보내 영문도 모른 채 죽어나갔다.

 

학살한 시체를 태웠던 소각로, 이곳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숫자는 아직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다고 한다.

아우수비츠가 가장 큰 수용소는 아니고, 3Km 거리에  비루니케 수용소는 아우슈비츠 보다 8배 이상 규모가 크다,

그러나 아우슈비츠 외 다른 수용소는 대부분 나치가 증거인멸하였다고 한다.

독일 뭰헨에도 모든 강제 수용소의 원형인 다카우(Dachau) 수용소가  있다.

 

처참한 광경을 보고 들은 후 밖으로 나오니 기분이 우울하다. 수감자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런 비극은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생지옥을 보고 나오니 들어갈 때 마음보다 나올 때 마음이 더 아프고 무겁다.

 

"ARBEIT MACHI FREI : 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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