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괌, 동남아

일본, 대마도(ツシマ) 역사 탐방 첫날

opal* 2013. 6. 10. 21:30

 

 

 산에 가는 날 기상 시간이 04:00,  오늘은 03:00 에 일어나 부지런 떨어보지만 운행되는 전철이 없어 택시를 타고 \15.000 이나 지불.

참석하는 탐방객들이 전국에서 모이다 보니 KTX 는 개인 지출, 일반실로 할인 받아 왕복 \74,400,(조선일보에 내는 여행비는 \42만.)

집에서 간단히 요기하고 나왔는데 아침을 안먹은 일행이 있어 차 안에서 도시락 두 개를 구입하여 조금씩 나누어 먹었다.

모임 회원 중 한 사람은 일본 크루즈 여행 중이고, 또 한사람은 배멸미가 무섭다며 불참하여 조촐하게 떠날 수 있었다.

 

 

서울역에서 아침 05;30  출발하는 첫차를 타고  2시간 47분만에 부산역 도착. 

오후에 기차를 타면 밤새도록 달려 다음날 새벽에 도착하던 1960년대의 추억이 떠오르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부산역을 나와 좌측 방향에서 시내버스 이용하니 두 정거장만에 국제 여객터미날 도착 한다.

 

 

지난 달 모임 때 가까운 오끼나와라도 한 번 다녀오자고 했으나 한 사람이 사정으로 불참하겠다기에 대신 국내여행으로 예약까지 한 상태에서

여행을 며칠 앞둔 어느날 아침 일찍 모임의 막내격인 총무한테서 전화가 왔다.

"형님, 조선일보에서 대마도 답사여행 간다는데 우리 가기로 한 국내여행을 취소하고 대마도로 가면 어떨까요?"

"그것도 괜찮지,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  "형님한테 첫 전화인데 다 물어보려구요."  "난 오우케이~"

그렇게 해서 2박 3일간의 여행 일정표도 못받고 갑작스런 대마도 답사 여행이 이루어진 것이다.ㅎㅎ

 

 

부산 국제 여객 터미널에서.

 

 

간단하게 출국 수속 밟고.

 

 

부산과 대마도를 운항하는 대아  Express shipping 오션 풀라워호에 승선하여 09:30 출항. 

 

 

심하게 부는 바람으로 파도가 높아 많은 사람들이 배멀미로 고통을 겪는다. 여간해선 배멀미를 않던 본인도 두 번씩이나 구토를 했다.  

부산 출발한지 두 시간 반 만에 일본 나가사끼현 쓰시마시 남쪽에 있는 이즈하라 항 도착. 북쪽에 있는 항구는 더 짧은 시간에 도착할 수 있다.

 

 

배에서 내려 입국 신고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 멀미를 심하게 하신 P 여사님은 아직도 어질어질하다며 맥을 못추신다.

 

 

입국신고 마친 후 밖으로 나오니 일본식 건물이 첫눈에 확 들어온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었다니...일본 본토 여행은 여러번 있었지만 

대마도(쓰시마)는 첫 방문이다. 배에 갇혀있다 밖으로 나와 깨끗한 공기를 마시니 기분이 한층 업 된다. 

 

 

▲ 큰 짐은 차 편으로 호텔로 먼저 보낸다.  사진에 보이는 노란 열매는 잘 익은 비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으니... 점심 식사 하기위해 식당으로 발을 옮기며 보니 거리가 깨끗하다.

 

 

이즈하라 시가지 약도.

 

 

거리는 무척 깨끗하고 차도 인적도 드물다.

 

 

골목 건물 벽에  그려진  대마도주 아들과 덕혜옹주의 결혼식 기념 벽화. 

 

 

 

 

오동나무(キリ)와 등나무꽃(フジ)은 이즈하라읍을? 아님 쓰시마시?  그것도 아니면 나가사끼현을? 암튼 어느 지역을 상징하는 모양이다.  

 

 

점심식사로 나온 밥과 된장국, 그리고 반찬은 한 접시에 다 담긴 간단한 일식. 

 

 

점심식사 후 걸어서 탐방 시작.

 

 

수선사 가는 길에 어느집 작은 정원에 핀 아욱과 꽃.

 

 

제일 먼저 탐방한 수선사(修善寺).

 

 

이즈하라의 수선사는  서기 656년 백제의 귀족출신 비구니가 창건한 절이며,

학자이자 의병 출신인 최 익현 선생의 유해가 잠시 안치되었던 곳이다.

 

 

 

 

최 익현 선생 순국비는 수선사 절 문을 들어서면 납골당 묘역인 바로 우측 맨앞에 제일 크게 서있다.

 

의병이며 학자인 최 익현 선생의 비를 세우게 된 동기와 Behind Story 등을 설명하시는
단국대 碩座敎授인 정영호(鄭永鎬) 박사님.

개인적으로 교수님께 강의를 들은 적이 20년전,
산수(傘壽) 넘기신 연세에도 건강하신 모습을 뵈니 얼마나 좋은 일인지...
서울대 역사학과 출신으로 단국대 박물관장을 지내신 교수님은 많은 유적을 발굴하시어
20년 전에도 이미 '대마도 명예 시민' 이셨다.

 

 

 

▼ ※ 아래  사진을 클릭하면 글씨를 크게 볼 수 있음

 

최익현 (崔益鉉),  1833년(순조 33) 12월 5일 ~ 1906년 11월 17일,  조선 말기의 애국지사

 

본관 경주(慶州). 자 찬겸(贊謙). 호 면암(勉菴). 경기도 포천(抱川)에서 출생.
김기현(金琦鉉)·이항로(李恒老) 등의 문인(門人).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수봉관·지방관·언관 등을 역임하며 강직성을 드러내 불의·부정을 척결하여, 관명을 날리고, 1868년(고종 5) 경복궁 중건의 중지,

당백전(當百錢)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873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기용되자 명성황후(明成皇后) 측근 등 반(反)흥선 세력과 제휴,
서원(書院) 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하고, 호조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시 대원군의 실정 사례를 낱낱이 열거,
왕의 친정(親政), 대원군의 퇴출을 노골적으로 주장함으로써,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으나,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이듬해 명성황후 척족정권이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5조(條)로 된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려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되었으며 1879년 석방되었다. 1895년에는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이를 반대하다 투옥되었다.
1898년(광무 2)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고 뒤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의정부 찬정(贊政)·경기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상경,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借款) 금지, 외국에 대한 의부심(倚附心) 금지 등을 상소하여
친일 매국도배들의 처단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두 차례나 일본 헌병들에 의해 향리로 압송당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쓰시마섬[對馬島]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敵)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가 유소(遺疏)를 구술(口述),
임병찬에게 초(抄)하여 올리게 하였다. 단식을 중지하였으나 그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문집에 《면암집(勉菴集)》(합 48권)이 있다.

 

 

편안한 자세로 교수님의 설명을 경청하는 답사팀 일원.

 

 

비석 측면과 후면.

 비를 건립하던 1980년대 당시 일해재단에서 \천만을 받아 이곳 수선사의 땅 10평(坪)을 사서 비를 세웠으니 이 땅은 영원히 최 익현 선생 몫이란다. 비석 옆면에 한국측 대표의 한 사람으로 교수님의 존함도 보이고 땅 열 평을 매입하는데 경제적으로 도움을 준 일해재단도 보인다.

 

 

  

 

 

 

 

 

수선사 법당 안 맨앞에 최 익현 선생의 영정을 모셔 놓았다.

 

 

수선사 내부의 모습을 골고루 담아 보았다. 교수님과 함께 오지 않았으면 아마도 법당 실내를 이렇게 골고루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수선사를 나와 다른 곳으로 이동.

 

 

이즈하라 읍내를 흐르는 물, 이 물은 바닷물이며 만조시에는 높게 올라온다고 한다.

 

 

카스마끼는 대마도의 명물이라는데 우리나라에서 먹을 수 있는 콜케익처럼 생겨 가늘게 생긴 카스테라 안에 단팥이 들어있다.  

 

 

 

 

대마도의 제일 큰도시인 이즈하라의 중심가를 걸으니 면세점도 보이고, 개인이 모시는 작은 신당도, 신사도 보인다. 

일본에는 잡신이 많아 신사도 많다고 한다

 

 

조선 통신사들아 왕래 했던 곳이라 위 사진에 보이는 기둥이 곳곳에서 보인다. 큰 건물은 쇼핑센타 이다.  

 

 

100엔 샵이 있는 큰 건물 쇼핑센타엔 한글로 큼지막하게 써 놓았다. 대마도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오는 곳이다.

우리팀은 찻집에서 커피 마시며 잠시 휴식.

 

 

대마시청 건물.

 

 

봉축비 탐방하러...

 

 

가네이시 성문.

 

 

 

 

대마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가네이시 성문을 안에서 바라본 보습.

 

 

 

두 번째 탐방지인 이곳에서도 자유분방하게 앉아,  이곳 공원 땅 13평(坪)을 구입하여 비를 세우게 된 동기부터 교수님의 설명이 시작된다. 

 

 

대마도주 아들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덕혜옹주(德惠翁主) 결혼 봉축 기념비.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덕혜옹주(德惠翁主) 결혼 봉축 기념비는 쓰시마 거주 한국인인 건립했다고 한다.

 

덕혜옹주 (德惠翁主, 1912.5.25 ~ 1989.4.21)는 1912년 5월 25일 조선 제26대 왕(황제) 회갑을 맞은

고종(高宗)과 궁녀인 복녕당(福寧堂) 양귀인(梁貴人)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측실이었기 때문에 옹주(翁主)라고 호칭했다. 양씨는 덕혜옹주를 낳고 복녕당이라는 당호를 하사받았다.
덕혜옹주는 고종의 고명딸로, 세심한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고종에게는 4명의 딸이 있었지만 모두 2살 이전에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1916년 즉조당(卽祚堂)에 유치원을 개설하였고 덕혜옹주는 이곳을 다녔다.

덕혜옹주는 서녀(庶女)였다는 이유로 일본총독부에 의해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여섯 살 때인 1917년 정식으로 황적에 입적하였다.
고종은 앞서 왕세자 이은처럼 일본에 강제로 데려가거나, 일본인과 결혼을 피하려고 하였다.
1919년 일제에게 딸을 빼앗기기 싫었던 고종에 의해 황실의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약혼을

시도하였지만 실패하였고 시종 김황진은 덕수궁 출입을 금지당했으며 그해 1월 21일 고종은 갑자기 승하하였다.

 

1921년 덕혜옹주는 서울에서 히노데 소학교에 다녔다. 당시 히노데 소학교는 일본인 자제들이 다니는

학교였으며 조선인은 고관의 자재 일부가 다녔던 학교였다. 그동안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다가

이무렵에 덕혜(德惠)라는 호를 내려받았다.

 1925년 3월 '황족은 일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일제의 요구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갔다.
3월 28일 오전 10시 경성발 열차를 타고 부산을 거쳐 시모노세키(下關)까지 선박으로 갔으며

도쿄까지는 열차로 이동하였다. 3월 30일 오전 8시 도쿄에 도착하자 이방자 여사가 마중을 나왔다.


1925년 4월 아오야마에 있는 여자 학습원을 다녔는데, 항상 말이없고 급우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했다고 전해진다.

1926년 순종이 위독하자 오빠 이은과 함께 귀국하였다가 4월 25일 순종이 사망하자 국장에 참석하지 못하고

5월 10일 일본으로 떠났다.
당시 일제는 덕혜옹주가 국장에 참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1927년 1주기 때에 참석이 허락되었다.

 
1929년 5월 30일 생모인 양귀인이 유방암으로 영면하였으며 덕혜옹주는 귀국하였지만 복상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갔다.
1930년 봄부터 몽유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영친왕(英親王)의 거처로 옮겨 치료를 받았다.
증세는 조발성치매증(정신분열증)으로 진단되었고, 이듬해 병세는 좋아졌다.

 

1931년 5월 쓰시마섬(對馬) 도주의 후예인 소 다케유키(宗武志)와 정략 결혼하였고

다음해인 1932년 8월 14일 딸 정혜(正惠: 일본명 마사에)를 낳았다.
그러나 결혼 후 덕혜옹주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으며 남편과 주변사람들의 간호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1946년 마츠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결국 1955년 다케유키와 결혼생활을 더이상 유지하기 어렵게 되자

이혼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성을 따라 양덕혜(梁德惠)로 일본호적을 만들었으며 약 15년 동안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의 이혼시기에 대해서는 1951년, 1953년 설이 있지만

이방자 여사 '흘러가는 데로'에 의하면 195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외동딸이었던 정혜가 1956년에 결혼하였지만 실패하였고 3개월 뒤 유서를 남기고

일본 남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실종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현해탄에서 투신하여 자살한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덕혜옹주는 고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도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의 정치적 입지에

부정적 영향을 우려하여 귀국이 거부되었다.
마침내 1962년 1월 26일 귀국하였지만 귀국 20년 만인 1982년이 되어서야 호적이 만들어졌고,
결국 실어증과 지병으로 고생하다 1989년 4월 21일 낙선재에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金谷洞)에 있는 홍유릉(洪裕陵)에 묻혔다.

 

 

 

 

 

 

ほととぎす (時鳥·,杜鵑두견,·子規자규, 不如帰불여귀),     つばき(唾,椿·山茶, 동백나무)

 

 

 

 

세 번째 탐방지는 나가사끼 현립 대마도 역사 문화 자료관인데 월요일이라 문을 열지 않아 고려문과 조선통신사지비만 탐방. 

 

 

조선통신사를 영접하기 위해 만든 문으로 고려시대의  건축양식,

'사지키바라'성의 제 3문으로 세워진 것을 역사 자료관 입구로 옮겨 복원했다고 한다.  

 

 

 

 

조선통신사 비.

 

 

 

 

▲ 클릭하면 글씨를 크게  볼 수 있음.

 

 

경청하는 탐방객과 일행.  통신사비 옆 설명석 뒷면에도 건립위원의 한 분으로 교수님의 존함이 보인다.(↑표시)

 

 

 

 

 

 

고려문 안쪽 옆에 있는 성신지교린(誠信之交隣) 비. 조선사람을 본받자고 칭송했던 일본인 '아메 노 모리 호슈(雨森芳洲)의 비이다. 

 

 

 

 

 

 

 

 

 

 

 

 

최 익현 선생이 잠시 살았던 집터.

 

 

 

 

 

 

 

 

はち ばん ぐう(8 번 궁)신사. 홍살문을 닮은 とりい(神社じんじゃ 입구 문)가 있어 찍긴 했는데 우리와  관계가 없어 들리지는 않았다.

본궁은 큐슈에 있다고 하는데 전쟁의 신을 모시는 곳이라고 하니 침략의 야욕이 있는 곳인지도 모르겠다.

 

 

가이드에게 물으니 길이 세 개 있는데 왼쪽 길은 신을 모신, 가운데 길은 천황을, 오른쪽은 일반인을 모신 신사라고 한다.   

이곳에 일본 서기에 삼한을 정벌했다는 신공황후, 대마도주의 부인 마리아의 신사가 있다.

임란 때 조선을 쳐들어온 고니시 유끼나가의 딸이 대마도주 소요시토시와 결혼 했으나,

토요토미 편인  아버지 소서행장이 도꾸가와 이에야스와의 권력다툼에 패하자  남편은 역적의 딸이라고 부인을 버리고,

도꾸가와 막부의 가신이 되었다. 그녀는 카톨릭 신자가 되어 죽은 후 신으로 부활하여 모셔져 있다고 한다.

 

 

 

 

세  곳 탐방하고 중심가에 있는 티아라로 돌아와 잠시 쇼핑 시간을 갖는다.

 

 

선물용으로 'ミルク キャラメル'  とか 'かすまき' 등을 구입하고, 맘에 드는 색의 옷이 있어 옷도 샀다. 

일행 중 두 명은 오는 도중에 모자를 잃어 버려 모자도 사고. 요것 조것 소품들도 한 보따리ㅎㅎㅎ

 

 

쇼핑센타에서 나와 애들 처럼 장난 삼아 한 컷, 

 

 

 구경 다하고 저녁 먹으러 가는길에 비가 내리니 방금 전에 산 우비를 사용하기도.

 

 

삼삼오오 끼리 끼리 모여 앉아 푸짐한 저녁식사.

 

 

 길 옆으로 보이는 가게 이름 '친구야'가 재미있어 한 컷,

 

 

  이틀동안 묵을 숙소, 대아 호텔까지 셔틀버스로 이동.

 

 

 선물 한 꾸러미 사들고 호텔로. 

 

 

대아 호텔 앞에서.

 

 

 호텔 방에 들어와 내다보니 태극기가 보인다.

 

 

나중에 물어보니 한국인이 운영하는 대마도에서 제일 큰 호텔이라고 한다. 어쩐지 태극기가 보이더라니...

 대아 고속 해운은 일본 후쿠오카나 대마도, 우리나라 울릉도 등을 운항하는 해운회사 이다.

 

 

 다다미 방에서 바라본 일몰 후의 어두운 저녁바다.

 

 

 

 

온천에 들려 샤워 후 저녁에 다다미 방에서 Tea Time을 가졌다.

몇년 동안 여행을 여러번 같이 다녔어도 시간에 쫒기듯 다니느라 이런 여유있는 시간은 처음 갖는다. 야자 스타일로 편하게

이름 부르던 동료들, 차 마시는 동안은 갑자기 공손한 말투와 태도로 바뀌며 존댓말만 사용하려니 그것도 수행이련가 힘들다.ㅎㅎㅎ

 

 

팽주님께서 준비해온 것이라고는 오로지 대추차, 보이차, 우엉차 등 작은 용기에 담긴 차 종류만 대 여섯 가지,

주전자나 찻잔, 소쿠리 등 소품들은 낮에 쇼핑센타에서 급 구매한 것들이지만 아주 훌륭한 시간이 되었다.

위사진 아래 왼쪽에 보이는 팥이 들은 카스테라가 대마도 명물 '카스 마끼( かすまき)' 로 달고 부드러워 먹기 편하다.

 

 

대추나 우엉 등은 팽주 ㄱ ㅇ씨가 직접 썰어 덖고 말리기를 반복하며 준비했는데 우엉차는 맛과 향이 꽤 훌륭하여 인기 만점. 

이렇게 마시고 또 마시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꽃을 피웠다. 참석못한 동료들은 나중에 얘기 들으면 쫌 억울할낀데?ㅋㅋ

오늘 마신 찻잔은 각자 가지고 갔다가 다음부터는 휴대하고 다니게 된다.

본인을 포함한 두 사람은 스위트 홈으로 부탁하여 욕실이 있는 양식 침대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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