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대첩은
1597년(선조 30) 9월 정유재란 때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명량해협(울돌목)에서 일본 수군을 대파한 해전이다.
영화가 시작되며 바로 칠천량 해전이 자막으로 잠깐 나온다.
칠천량 해전(漆川梁 海戰)은
정유재란 때인 1597년(선조 30) 7월 15일 원균(元均)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과 벌인 해전이다.
칠천량 자막을 보는 순간 작년 가을 거제도 여행하며 '맹종죽 테마파크 산책 시 산 정상에 올라 내려다보며
바다 건녀 칠천량(漆川梁)에 대해서 얘기해주던 가이드의 설명이 갑자기 떠올랐다.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칠천량(漆川梁)은 경남 거제시 하청면 실전리와, 거제도 서북부에 위치한 칠천도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하청면 어온리 사이의 해협을 말한다.
2000년 1월 칠천도 장곶과 실전 사이의 이 해협에 길이 425m의 칠천대교가 가설되었고, 이 다리 아래 부분이 ‘칠천량 해협’이다
송진포 실전과 칠천도의 어온리 물안마을 사이의 해협은 정유재란 때 조선의 수군의 유일한 패전지로 회복불능의 패전을 기록하고,
삼도수군통제사 원균도 전사하였다.
1597년 7월 7일 선조 30년 조선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이끄는 주력함선 300여 척과 일본 수군의 함선 1000여 척이 맞붙어
10일간 계속된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거북선과 판옥선 등 157~288 척이 격침되고 다수의 수군이 수장되었다.
칠천량해전은
임진왜란·정유재란 가운데 조선 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이다.
임진왜란 중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일본은 1597년 1월 다시 조선을 침범했다.
일본은 지난번 조선 침범이 실패한 것은 바다를 제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해
먼저 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을 제거하려는 이간책을 꾸몄다.
당시 조정에서는 중신들이 당쟁에 휘말려 이순신을 하옥하고 원균을 수군통제사로 임명한 상태였다.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부산 근해로 유인해 섬멸하려고 일본의 이중첩자인 요시라(要時羅)를 시켜 유혹했다.
이에 도원수 권율(權慄)은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과 상의해 원균에게 출전명령을 내렸다.
원균은 무모하게 출전해 보성군수 안홍국(安弘國) 등을 잃고 되돌아왔다.
그리고 한산도의 본영(本營)에 앉아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이 웅천(熊川)을 급습하도록 하였다.
배설이 전선(戰船) 수십 척을 잃고 패하자, 권율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원균을 태형(笞刑)에 처한 뒤 다시 출전하라고 명하였다.
원균은 부산의 적 본진(本陣)을 급습하려고 삼도 수군 160여 척을 이끌고 한산도를 출발하였다.
7월 14일 원균은 부산 근해에 이르러, 이 사실을 미리 탐지한 적들의 교란작전에 말려들어 고전하였다.
더욱이 되돌아오던 중 가덕도에서 복병한 적의 기습을 받아 400여 명을 잃었다.
원균이 칠천량(지금의 거제시 하청면)으로 이동하여 무방비 휴식 상태에 있을 때 적은 조선 수군을 기습할 계획을 세웠다.
도도(藤堂高虎)·와키사카(脇坂安治)·가토(加藤嘉明) 등 수군 장수들이 7월 14일 거제도 북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15일 달밤을 이용해 일제히 수륙양면 기습작전을 개시하였다.
이에 당황한 원균과 여러 장수들은 응전했으나 적을 당해낼 수 없어 대부분의 전선들이 불타고 부서졌다.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충청수사 최호(崔湖), 조방장(助防將) 배흥립(裵興立) 등 수군장수들이 전사하였다.
원균도 선전관 김식(金軾)과 함께 육지로 탈출하였다.
그러나 원균은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경상좌수사 배설만이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남해 쪽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삼도 수군은 일시에 무너지고 적은 남해 일원의 제해권을 장악해 서해로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우키타(宇喜多秀家)·고니시(小西行長)·모리(毛利秀元) 등은 쉽게 남원 및 진주 등지로 침범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7월 21일 원균과 함께 탈출하다가 원균은 죽고 겨우 살아 나온 김식에게서 패전 보고를 듣고 크게 놀라
백의종군(白衣從軍)하고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해 수군을 수습하게 하였다.
작년 여름(2013년 7월) 섬 여행시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가 있는 목포 고하도에 갔을 때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후
1597년 10월 하순에서 다음 해 2월 중순, 고금도로 옮기기짜지 107일 간을 도하도에서 주둔 했었다는 강 교수님의 설명이
생각나는걸 보면 괜히 다닌것만은 아닌가 보다. 진도 대교 옆 울돌목 해변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세워져있다.
명량대첩(鳴梁大捷)
1597년(선조 30) 9월 정유재란 때 조선 수군이 명량에서 일본 수군을 쳐부순 싸움. 이 싸움으로 조선수군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일자진 공격은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사용한 해상 전술로 횡렬 일자로 늘어선 진형을 말한다
이순신이 통제사(統制使)에서 물러난 뒤 원균(元均)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일본 수군과 대전했으나
다대포(多大浦) 칠천곡(漆川谷)에서 대패하여 해상권을 상실하였다.
원균의 패전으로 같은 해 백의종군(白衣從軍) 중인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패전 후 남은 13척의 전선과 수군을 정비하여 닥쳐올 전투에 대비하였다.
왜군에게 대패하여 얼마남지 않은 조선수군의 전력을 우려하자 당시 이순신은 선조에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함이 남아있습니다."라고
비장한 각오의 장계를 올렸다.
8월 왜선 8척이 해남의 어란포(於蘭浦)에 출현하자 이를 격퇴하고, 진(陣)을 진도(珍島) 벽파진(碧波津)으로 옮겼다.
9월 7일에는 서쪽으로 이동하던 왜선 55척 중 호위 적선 13척이 어란포에 나타나자, 한밤중에 이순신이 선두에서 지휘하여 적선을 격퇴시켰다.
다시 적의 함대가 어란포에 들어온다는 보고를 받고 9월 15일에 벽파진에서 우수영(右水營)으로 진을 옮긴 뒤 장병들에게
“必死則生, 必生則死(필사즉생 필생즉사)”라고 말하고 필승의 신념으로 적의 내습을 기다리고 있었다.
9월 16일 왜선 133척이 어란포를 떠나 명량으로 공격해오자, 13척의 전선과 군사를 정비하여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가 지휘하는 왜선 31척을 격퇴하였다.
이 싸움으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명량대첩(鳴梁大捷)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원균(元均)이 거느린 조선 수군은 대부분 패하였다.
이에 그 해 7월 22일 유성룡(柳成龍) 등의 간곡한 건의로 다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된 이순신은
휘하 군사들의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그러나 당시 군중에 남아 있던 쓸만한 전선(戰船)은 겨우 12척에 불과하였다.
여기에 일반 백성들이 나중에 가져온 한 척이 더해져서 13척이 되었다.
이때 일본 수군은 한산섬을 지나 남해안 일대에 침범하면서, 육군의 육상 진출과 동시에 서해로 진출하려 하였다.
따라서 이순신은 서해 진출의 물목이 되는 명량을 지키기 위해 이진(利津)·어란포(於蘭浦) 등지를 거쳐 8월 29일 벽파진(碧波津 : 전라남도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으로 이동하였다.
일본 수군은 벽파진에 있는 조선 수군에 여러 차례 야간 기습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우리 측의 철저한 경계망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적의 정세를 탐지한 이순신은 명량을 등 뒤에 두고 싸우는 것이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는 9월 15일 조선 수군을 우수영(右水營 :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으로 옮겼다.
다음 날인 16일 이른 아침 일본 수군이 명량으로 진입하였다.
일본 수군의 진입 사실을 알게 된 이순신은 출전령을 내리고 최선두에 서서 명량으로 향하였다.
그 때 명량의 조류는 거의 정조시기(停潮時期)였으며 일본 수군의 전선은 133척으로 확인되었다.
이순신은 명량으로 들어서면서 일자진(一字陣)을 형성해 일본 수군의 수로 통과를 저지하려 하자, 일대 혼전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조류는 서서히 남동류(南東流)로 방향을 바꾸어 흐르기 시작했으며, 일본 수군은 이순신이 타고 있는 전선을 포위하려는 기세였다.
매우 위급한 순간, 이순신은 뒤에 처져 있는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중군(中軍) 김응함(金應諴) 등에게 적진으로 돌진하게 하자,
전투는 절정에 이르렀다. 또한, 방향을 바꾸어 흐르기 시작한 조류는 소수의 전선이 활동하는 조선 수군에 비해
많은 전선을 거느리고 있는 왜군에게 상대적으로 불리하였다.
협수로에서의 불규칙한 조류 분포로 인해 서로의 진형(陣形)과 대오(隊伍)가 붕괴되고 있었다.
격전중 이순신의 전선에 동승하였던 투항왜인 준사(俊沙)가 적선을 내려다보며
“꽃무늬 옷을 입은 저 자가 바로 안골포해전(安骨浦海戰) 때의 일본의 수군장수 구루시마(來島通總)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이순신이 김석손(金石孫)을 시켜 그를 끌어올린 뒤 목을 베어 높이 매달자, 이를 본 일본수군은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다.
이에 전투의 기세를 잡은 조선 수군은 현자총통(玄字銃筒)과 각종 화전(火箭)을 쏘면서 맹렬하게 공격하였다.
녹도만호 송여종(宋汝悰)과 평산포대장 정응두(丁應斗) 등 여러 장수와 병사들이 적선 31척을 분파하자 일본 수군은 물러나 도주하고 말았다.
이 해전의 승리로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10배 이상의 적을 맞아 협수로의 조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그들의 서해 진출을 차단함으로써 정유재란의 대세를 조선군에게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게 하였다.
한편, 열세한 병력을 지휘한 이순신은 위장전술로써 피난선 100여 척을 전선으로 위장해 뒤에서 성원하게 하였다는 것과,
철쇠(鐵鎖)를 협수로에 깔아서 적선을 전복시켰다는 기록도 일부 전해오고 있다.
해남 명량대첩비
전라남도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에 있는 1597년(선조 31) 에 이순신이 왜군을 명량에 유인하여 무찌른 대첩을 기념하는 비.
1688년 건립. 보물 제503호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수군은 한 번이라도 패하면, 수로의 주도권을 놓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해 있었으므로,
해협과 만을 낀 수륙 합동 작전을 위한 유인작전과 공방전을 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임진왜란의 주요 해전의 배경이 된 곳은 이러한 좁은 해협과 거센 물길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육지와의 사이에서 바다의 폭이 가장 좁아지는 곳이기 때문에 지금은 대부분 교량이 가설되어 있다
해협 | 해전 | 교량 | 교량길이 | 연결지 | 소재지 | 별칭 |
---|---|---|---|---|---|---|
칠천량(漆川梁) |
칠천량 해전 |
칠천대교 |
425m |
거제시 하청면 실전리 - 거제시 하청면 어온리 |
경남 | - |
견내량(見乃梁) |
한산 해전 |
거제대교 |
740m |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 -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 |
경남 | - |
노량(露梁)해협 |
노량 해전 |
남해대교 |
660m |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
경남 | - |
명량(鳴梁)해협 |
명량 해전 |
진도대교 |
484m |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
전남 |
울돌목 |
노량해전(露梁海戰)혹은 노량대첩(露梁大捷)은 임진왜란 당시 1598년(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이순신이 이끈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수군이 노량해협에서 일본의 함대와 싸워 크게 무찌른 대첩으로서, 이순신이 전사한 해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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