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문화,여행)

전시) 간송문화(澗松文華)전

opal* 2014. 8. 7. 23:30

 

성북동에 있는 간송 미술관엘 다녀온지가 꽤 오래되어 소장품들의 기억이 흐릿해진 참인데 

미술품들이 시내 한 복판 동대문 운동장터에 지은 DDP로 나들이를 나왔다기에 일부러 찾았다.  

1부 전시는 차일 피일 미루다 기회를 놓쳤기에 이번엔 달포 전부터 미리 약속을 해놓았다. 

 

올 봄 3월부터 1부가 전시 되었고, 이번 2부에 전시된 작품은 삼국,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 고미술 국보와 보물, '훈민정음' 등 총 100여 점이다.

 

 20代의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

 

간송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서예가 오세창 선생을 만나 문화재에 대한 식견을 길렀다.  이후 일제 식민 통치를 겪으며

우리 문화재가 국외로 반출되는 것을 우려해 1920년대 부터 자비로 국보급 서적 서과,자기,불상 등을 사들이기 시작, 수집에 몰두 하였다.

 

보화각은 간송 선생께서1930년대 초반부터 기획하시고 1938년에야 준공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사립미술관이다.

보화각은 삼국시대부터 근∙현대까지의 우리나라 고미술이 보존되고 연구된 고미술사학의 요람인 동시에 위창 오세창, 춘곡 고희동,

삼불 김원룡, 혜곡 최순우, 수묵 진홍섭, 초우 황수영, 박길룡, 청전 이상범 등 우리나라 근대기에 문화∙예술계의 총아들이 모여서

사상과 세계관을 교류하던 집결지이기도 했다. 간송 사후인 1971년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되었다. 

 

 40대의 간송


오늘 보게되는 '2부 보화각' 전시에서는 간송 선생이 수집한 유물 중 각 분야별 최상의 명품들이 대거 출품되었다.

이정, 이징, 윤두서, 정선, 심사정, 김홍도, 신윤복, 장승업 등 조선 최고의 화가들이 그려낸 걸작과 송설체의 안평대군,

석봉체의 한호, 동국진체의 이광사, 추사체의 김정희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명필들의 글씨가 한자리에 펼쳐진다.

또한 <금동삼존불감>, <계미명금동삼존불입상>등 삼국시대 불상과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 등

고려와 조선의 도자는 한국 공예의 진수를 보여주며, 「훈민정음」, 「동래선생교정북사상절」, 「동국정운」, 「금보」등은

모두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희귀 전적들로 조선시대의 융성했던 문화를 실체적으로 보여준다.

명실 공히 ‘빛나는 보배를 모아둔 집’ 보화각의 유물 중에서 가장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백미만을 엄선한 최상의 명품전이다.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명품들과의 만남은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긍과 감동을 전해주고,

나아가 세계인들에 한국 문화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기회가 될 것이다

 

보화각 정초석 탁본, 위창 오세창 글.

 

다른 전시장에서는 자주 듣던 오디오가이드를 이용하지 않고, 이번엔 도슨트(Docent)의 안내 대로 따라다니며 해설을 들었다.

 화요일, 목요일 | 11:30, 13:30, 15:30, 17:30,       수요일, 금요일 | 11:30, 13:30, 15:30, 17:30, 19:30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제일 먼저 달려가 설명해준 첫작품이  아래 그림인 황묘농접 이다.

김 홍도(金 弘道) - 황묘농접(黃猫弄蝶 = 노란 고양이가 나비를 놀리다)

대지가 연록색 풀로 가득차고, 바위 밑에는 패랭이 곷이 활짝 피었다. 봄과 여름이 교차하는 계절,

땅과 하늘이 모두 햇볕에 물들어 노란 기운이 감돈다. 화창한 봄날, 긴 꼬리를 가진 검푸른 제비나비가 꽃을 보고 날아 들었다.

 

봄빛 닮은 누런 고양이가 고개를 돌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본다. 여차하면 발을 뻗어 잡아보려는 심산,

이를 알아챈 나비는 딱 도망가기 좋을 만큼의 거리를 두며 날고 있다. 그 모양새가 마치 고양이를 약올리는 것 같다.

 

늦봄의 평화로운 풀밭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을 단원 김 홍도가 화폭에 옮겼다. 이처럼 단원의 그림은 단순한 사실묘사를 뛰어넘어

대상들의 상호 교감을 극대화 시키고, 나아가 그림을 보는 사람을 그림 속으로 끌여들여  동화시키는 매력이 있다.

 

이 그림은 누군가의 환갑을 위해 그린듯 하다.

예로부터 고양이는 70노인을 상징하고, 나비는 80 노인을 상징한다. 화면 중앙에 있는 패랭이 꽃은 꽃말이 청춘이다.

그 옆 바위는 불변의 상징이고, 화면 앞쪽 제비곷은 구부러진 꽃대의 모양새가 등긁개를 닮아 여의화(如意花)라 부른다.

 

이런 상징성에 주목하여 이 그림을 보면,

 "일흔, 여든 살이 되도록 젊음 변치않게 장수하시고, 모든 일이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기 바랍니다"라고 읽혀진다.

환갑을 맞은 분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의미를 가진 그림이다. 내용만 좋은 것이 아니라 그림의 정취와

아름다움이 이토록 빼어나니 최고의 선물이 되었을 것이다.

 

 

겸재 정선(鄭敾)  압구정(狎鷗亭)

현재 현대,  한양 등 고층 아파트 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강남구 압구정동 일대의 모습이다.

잠실쪽에서 서북쪽으로 흘러오던 한강 줄기가 꺾어져 서나마으로 흐러 가는데 그 물 모퉁이를 이루는 언덕 위에 높이 세워진 것이 압구정이다.

 

압구정에 올라서면 한양을 둘러싸고 있는 명산들을 한 눈에 조망 할 수 있었다.

이 그림에서도 압구정동 일대와 강 건너 옥수동, 금호동 일대가 한 눈에 다 보인다.

그 뒤로 보이는 짙은 초록빛 산은 남산이고, 멀리로는 삼각산 연봉들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다.

 

경치가 빼어난 곳이라 권문세가들이 탐내어 별장을 짓고자 했다. 압구정을 처음 지은 사람은 한명회다. 그는 수양대군의 심복이 되어

김종서와 안평대군 등 조정대신과 왕자들을 죽이고 수양대군으로 하여금 어린 조카 단종으로 부터 왕위를 빼앗게 한 인물이다.

세조와 성종대를 거치며 최고 권신으로 세상을 농락하던 한명회는 만년에 이곳에 별장을 짓고,

명나라 문인 예겸에게 압구정(갈매기와 친하게 지내는 정자)이라는 이름을 받는다.

 

위 그림에서도 규모가 제법 큰 정자가 언덕 위에 덩그렇게 지어져 있는데 이 그림이 그려지던 때는 누가 압구정 주인이었는지 확실치 않다.

정자가 있는 언덕 아래 층층히 이어진 강변 구릉 위로는 기와집과 초가들이 마을을 이루듯 들어서 있다.

이 중에는 당시 서울 대가집들의 별장이 상당수 섞여 있을 것이다.

싱그러운 초여름 어느 맑은날 그린듯, 산과 나무가 온통 청록빛으로 물들어 있다.

맑고 상쾌한 초여름 강변의 계절감을 화사한 색채와 담백한 필치로 잘 묘사했다.

대담한 구도와 굳센 필치로 활달한 기상을 드러내던 겸재의 금강산과는 또다른 매력을 지니고 있다.

 

겸재가 65세 무렵에 그린 그림으로 겸재의 다양한 화풍을 엿볼 수 있다. 화면 우측 상단에는 '천금물전' 즉

'천금을 주더라도 남에게 주지말라'는 내용의 도장이 찍혀 있다. 겸재가 찍은 것이지, 아니면

 후대 이그림을 소장하고 있던 사람이 찍은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그림을 얼마나 아끼고 사랗했는지 알 수 있다.

 

 

김홍도(金弘道마상청앵(馬上聽鶯 : 말 위에서 꽤고리 소리 듣다)

 

녹음방초 무성하고 온갖 꽃이 만발하는 늦봄, 화창한 날 젊은 선비가 문득 말에 올라 나섰다가 길가 버드나무 위에서

꾀꼬리 한쌍이 회답하며 노니는 것에 넋을 빼앗긴 채 서서 바라보는 장면을 사생해 낸 그림이다. 

버드나무는 간결하게 처리하여 한겉으로 몰아 놓고 선비 일행을 큰 길 가운데로 내세운 채 나머지는 모두 하늘로 비워 둔

대담한 구도를 하고 있다. 김 홍도의 동갑내기 친구 화훤인 이 인문이 제화 시를 다음과 같이 읊었다. 

 

"아릿다운 사람이 꽃 밑에서 천 가지 소리로 생황을 부는 듯하고, 시인의 술동이 앞에 황금 귤 한 쌍이 놓인듯 하다.

어지러운 금북이 버드나무 언덕 누비니, 아지랑이 비섞어 봄강을 짜낸다."

 

꾀꼬리를 바라보는 선비의 시선에 어울리게 잡은 구도와 제시의 글씨까지 농담을 적절히 섞어가며 시선의 화면 구도에 조화 시켰다.

단원의 원숙한 필치와 천재적인 조형 감각을 엿볼 수 있는그림으로 단원 풍속화를 대표할만한  걸작이다.

 

 

장승업(張承業), 삼인문년(三人問年:세 사람이 나이를 묻다)

 

'삼인문년'리안 그림 제목은 소동파가 지은 '동파지림(東坡志林')에 수록된 내용으로 세 신선 노인이 서로 나이 자랑을 하는 이야기이다.

장승업이 이런 내용을 소재로 해서 도석화를 그렸다. 세 노인이 서로 손짓해가며 나이 자랑을 하고 있는데 세 노인의 복장은 옷깃의 색상에 차이를 두어 구별하였다. 위에는 구멍뚫린 기괴한 바위와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파도가 넘실대는데 상전벽해를 상징하는 내용일 것이다.

 

가운데 오른쪽에는 예닐곱 개의 선도를 매단 복숭아나무 한 그루가 솟아나 있고 한 노인이 손으로 이를 가리키고 있다.

그 아래에는 동자 하나가 바위에 상체를 개댄 채 딴청을 피우고 있는데 아마 복숭아를 훔칠 기회를 노리는 동방삭인 모양이다.

천부의 기량으로 전통회화의 대미를 장식했다고 할 장승업이 공들여 완성한 신선도이다. 그림 아래 오른쪽에 '오원'이란 관기과 인장이 있고

위 오른족에 동농 김가진이 쓴 삼인문년도라는 제명이 있으며 위 왼쪽에는 1914년에 오원의 제자인 심전 안중식이 쓴 제발이 있다.

 

"이는 장오원 선생이 중년에 그린 것이다. 인물과 나무, 바위의 필법과 채색은 신운이 생동한다고 할 만하다.

그 평생 그린 인물이 적지 않지만 이폭과 같은 것은 많지 않을 것이니 참으로 보배라 할 수 있다.

선생이 돌아가신지 벌써 18년이 되었다.  이제 이그림에 글을 쓰다가 술잔을 기울이며 휘호하시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추사 김정희(金正喜), 고사소요(高士逍遙, 뜻 높은 선비가 거닐다),

 

 

우리가 추사 김정희의 이름은 기억하는 것은 추사체라 부르는 독특한 서체에 힘입은 바가 크지만,

추사의 학문과 예술세계는 쉽게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고도 깊다. 추사는 유교와 불교, 역사는 물론 금석학(金石學),

천문지리학(天文地理學)에도 조예가 깊고, 시문서화(詩文書畵)에 두루 능했던 대학자이자 예술가였다. 또한

폭넓은 식견과 안목으로 자타가 공인하는 당대 제일의 비평가이자 감식안이었다. 그런데 추사는 정작 자신이

직접 붓을 들어 그림을 그리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묵란화를 제외하고는 손에 꼽을 만큰 남아있는 작품이 희소하다.

 

이 고사소요는 단출한 소품이지만, 추사 회화세계의 지향과 본질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작 중 하나이다.

한 명의 선비가 사색에 잠긴 모습이다. 단정하게 갈무리한 머리와 정갈한 옷매무새에서 고사의 청수(淸秀)한

내면 세계가 엿보인다. 길가 좌우에 자리한 소나무와 전나무, 바위도 고사를 닮아 담박하고 단아하다.

 

전체적으로 옅은 먹과 짙은 먹을 번갈아 쓴 마른 붓질은 소슬한 정취가 감도는 쓸쓸하고 황량한 느낌의 그림을 추구했던

추사의 회화적 지향에 부합되는 기법이다. 나무와 토파, 바위의 묘사 등 추사의  대표적인 산수화로 이야기 되는

 '세한도'와 유사하다. 그러나 전체적인 필치와 구성은 그보다 한결 원숙해 세한도 이후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본인도 딱 마주치는 순간 세한도를 보는 듯한 착각을... ㅎㅎ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의 미인도(美人圖, 18세기),

 폭 40여 cm, 세로 1m여 길이.

 

혜원(1758년, 영조 34년생)의 본명 가권(可權)은 미인도에 찍힌 도서로 알아냈다고 한다.  

 

한양의 풍류생활을 주도하던 어떤 아리따운 기생의 초상화 이다.

가체를 사용한 탐스런 얹은 머리에 젖가슴이 들어날 만큼 기장이 짧아지고 소매통이 팔뚝에 붙을 만큼 좁아진 저고리를 입고

속에 무지개 치마릉 받쳐 입어 열두 폭 큰 치마가 머선발과 왼쪽 겨드랑이 근처에서 흘러내린 두 가닥 주홍색 허리끈은

풀어헤친 진자주 옷고름과 함께 대장부를 뇌쇄시키기에 충분하다.

 

저고리깃과 겨드랑이는 옷고름과 같은 진자주 빛으로 회장을 대고, 끝동은 치마와 같은 쪽빛으로 회장을 대어

삼회장으로 멋을 부린 것도 도시의 세련된 옷차림이다.

두 손으로 묵직한 마노 노리개를 만지작거리며 앳된 둥근 얼굴에는 열망을 가득 담고 있다.

물오른 앵두처럼 터질 듯 붉게 부푼 입술이 말할 듯 아니하며 그윽한 눈빛은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다.

어쩌면 신 운복이 마음 속에 두고 있던 기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신 윤복은 다음과 같은 제화시를 곁들였다.

"화가의 가슴 속에 만가지 봄기운 일어나니, 붓끝은 능히 만물의 초상화를 그려내 준다. "

 

그림에 대한 내용은 전에도 익히 들은바 있어 그림만 자세히 보려는 것인데 

그림 색이 화려하지 않을 뿐더러 조명이 어두운데다 멀리 떨어져서 보려니 해설사의 설명이 더 필요하게 느껴진다.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1754-1822), 파적도(破寂圖, 18세기 작, 종이 바탕에 담채, 크기는 22.5×27.1㎝,

 

이 그림은 어느 한적한 농가의 앞뜰에서 일어난 한 순간의 정경을 담은 그림으로, 병아리를 물고 달아나는 고양이와 당황하여 날개치는 어미닭,

혼비백산하여 달아나는 병아리, 그리고 병아리를 안뺏아기려하는 주인 부부의 거의 본능적인 모습 등을 실감나게 그렸다.

 

구도면에서도 달아나는 고양이에게 시선을 쏠리게 하고, 달아나는 고양이의 시선은 이와 교차시켜 양편의 긴장감을 유발시키고 있는 점 등은

매우 절묘하여, 화면 전체에 흐르는 해학적 분위기 창출 등은 그의 독자적인 풍속화 세계의 정수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단오 풍정, 혜원 전신첩.  국보 제 135호.

 

이 그림은 단오날 추천(그네타기) 놀이를 나온 한 때의 여인네들이 시냇가에 그네를 매고 냇물에 몸을 씻으며 즐기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그넷줄을 드리울만한 거목이 있고, 맑은 물이 굽이쳐 흐르는 곳이라면 당시 서울에서야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정릉이나 성북동 골짜기는 물론, 삼청동이나 인왕산 계곡을 비롯하여 남산이나 낙산 주변 여러 골짜기들이 이런 놀이에 적합했었다. 

 

그림에 나타난 곳은 어디인지 모르나 당시로서는 깊은 계곡이어서 인적이 없는 곳이라 여인들이 웃을 벗고 냇물에 들어가 즐길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바위틈에 숨은 동자승 둘이서 이 기막힌 풍경에 희희락락 즐거워 어쩔 눌 몰라하니 혜원은 화면의 촛점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그네 뛰는 여인에게 화려한 의상을 입히고, 머리 손질하는 여인에게는 큰 다리머리를 모두 풀어놓았다. 노랑저고리 다홍치마 로도

선정적 분위기인데 백설같은 속곳들이 반 넘어 내 보이는 것은 반라의 여인들에게서 보다 더 짙은 감정을 느끼게 한다.

 

계집종인 듯한 여인이 유방을 드러내 놓은 채 옷보따리를 이고 오는 것으로 화면은 상하 연결이이루어져 혼연한 생동감을 불러 일으킨다.

 

 

쌍검대무, 혜원 전신첩 국보 135호,  18C 후기

 

세력있는 귀족이 장악원(掌樂院)이 악공(樂工)들과 가무에 능한 기생을 불러다가 즐기는 장면이다.

악공과 기생의 수효로 보아 이 놀이가 보통 규모는 아닌데, 이를 즐기는 사람들은 오직 주인 대감과

그의 자제낭관(子弟郎官 : 자제와 부하관리)인 듯하니 일가의 세도가 어지간한 모양이다.

 

혹시 혜원을 키원 준 어느 풍류 재상집에서의 한 때인지도 모르겠다. 화면 구성에 있어서 일체의 배경을 거부하고

검무하는 광경만 전면에 가득채운 대담성을 보였으나, 주제 표현에 조금도 군색함이 드러나지 않으니

이는 인물의 포치(초치 : 분포하여 배치함)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시각의 촛점이 되는 검무기(劍舞妓 :칼춤 추는 기생)들은 의상에서 청홍(靑紅)이 강렬한 대조를 보이면서 화면을 압도하는데,

주인을 비롯한 악공들이 이를 중심으로 둘러 앉음으로써 화면의 비중은 평형을 이룬다.  그런데 검무기의 날렵한 동작에서 오는

율동감은 관객들의 도취된 몸짓과 악공들의 신바람나는 연주에 혼연일치를 보여 아연 활기를 띤다.

 

이렇게 놀이에 참석한 인물들의 심리를 궤뚫어 순간의 동작을 화폭에 그대로 옮겨 담을 수있다는 것은

아무리 화가의 예리한 안목이라 하더라도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작자 혜원이 이런 세계에 얼마나 익숙했던가를

잠작할 수 있는데, 인물들이 하나같이 극도로 세련된 차림을 보이는 것도 혜원의 주변을 보는 듯하여 흥미롭다.

 

 

화재(和齋) 변상벽(卞相璧), 자웅장추, 18C 후기

 

변상벽(1730~?)은 닭과 고양이 그리고 사람의 초상을 그리는데 따른 사람이 없었다는 진경시대 대표 초상화가이다.

영조대왕의 어진(御眞)도 두 차례나 그려서 그 공으로 전라도 곡성(谷城) 현감을 재내기도 했었다.

흑갈색 암탉이 병아리 아홉 마리을 거느리고 풀밭에서 먹이를 찾고 있다. 어미 닭이 벌레 한 마리을 잡아 부리에 물고 꾸꾹 거리며

새끼들은 불러 모으는 모양이다. 새끼들이 어미 곁으로 모여들자 공연히 따라나온 수탉이 덩달아 허세로 풀밭을 헤집고 쪼아대며

더 큰 소리로 꾹꾹 대어 가장의 위세를 과시하려 든다. 병아리 한 마리가 그에 속아 돌아서지만 곧 허세인 줄 알고 말똥이 바라보고만 있다.

 

수탉은 남빛으로 햇빛에 반사될 만큼 짙은 검은 색에 두 가닥 꼬리가 길게 나 있는 조선 고유종인데 맨드라미 꽃송이처럼

탐스러운 주먹 벼슬을 하고 있다. 허세를 부리노라 목털을 부풀리고 날개깃을 벌리니 더욱 위풍이 당당하다.

귀밑의 흰 벼슬은 아래 위의 붉은 벼슬과 선명한 대조를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 고유종의 표시이다.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 "푸른 수탉과ㅏ 누런 암탉이 7~8마리 병아리를 거느렸다. 정교한 솜씨 신묘하니

 옛사람도 미치지 못할바이다.(靑雄黃?, 將七八離, 精工神妙, 古人所不及)"라고 했다.

 

또한 후배 화가 마군후(馬君厚, 1750년경~?)는 "흰털 검은뼈로 홀로 무리 중에 우뚝하니, 기질은 비록 다르다하나

5덕(德)이 남아 있다. 의가(醫家)에서 방법ㅇㄹ 듣고 신묘한 약을 달여야겠는데, 아마 인삼과 백축롸 함께 해야

기이한 공훈을 세우겠지.(白毛鳥骨獨超群, 氣質?殊五德存, 聞道醫家修妙藥, 疑同蔘?策奇勳)"  라며 농 섞인 제사를 달았다.

1973년 3월 28일 경성미술구락부(京城美術俱樂部) 경매에서 간송이 구입해 들인 것이다.

 

 

겸재 정선(鄭敾), 서과투서(西瓜偸鼠 : 수박과 도둑쥐)

 

겸재 정선(1676~1759)의 그림은 졍취보다는 기세를 중시하고, 감성보다는 이성에 호소하는 면이 강하다. 그런데 이 그림은

소재와 기법이 서정적이고 섬세하여 다분히 여성적인 미감을 보여준다. 이 그림을 보고 겸재보다는 조선의 대표적인

 여류화가 신사임당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분명 겸재의 그림, 그것도 70대 후반 노년기에 그렸다.

 

들귀 한 쌍이 큼지막한 청수박을 훔쳐먹고 있다. 수박 속은 벌써 여러날 들락거닌듯 연분홍빛으로 곪아 있고,

이제 막 긁어낸 조각들은 선홍빛으로 싱싱하다. 직접보고 사생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표현들이다.

수박 속에 들어가 먹고있는 쥐와 밖에서 머리를 쳐들고 망을 봐주는 다른 한 마리 쥐의 묘사도 정확하고 세밀하다.

눈동자와 자세를 통해서 쥐의 심리상태까지 읽어낼 수 있을 정도이다. 화면구성 또한 허술함이 없다 화면 중앙제 주제인 수박과

쥐를 배치하여 집중도를 높이고, 연록색의 덩굴을 동감있는 형태로 올려놓아 크고 짙푸른 수박 덩어리의 둔중함을 완화 시켰다.

 

또 한 화면 오른쪽에 붉게 단풍든 바랭리풀과 아래쪽의 푸른빛 달개비꽃 한 무더기를 호응시켜 화면을 한결 대채롭고 자연스럽게 꾸며냈다.

 

사생과 구도, 색감의 조화까지 어느 하나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다. 연암 박지원은 "겸재는 여든이 넘어서도

도수가 높은 안경을 쓰고 촛불 아래에서 세밀한 그림을 그렸는데 털끝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라고 했다.

박지원이 말한 세밀한 그림은 아마 이 서과투서와 같은 그림이었을 것이다. 겸재 나이 여든이면 무엇하나 부러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국중 최고의 대가였다. 노대가의 눈 속에 비친 주변과 일상은 이 그림과 같이 따뜻하고 풋풋하며 생명력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그래서 한없이 사랑스럽고 정겹다.

 

 

완당, 추사 김 정희(金 正喜)  명선

 

명선(茗禪)이란  '차를 마시며 선정에 들다'. 또는 '차를 만드는 선승(禪僧)' 이란 뜻이다.

추사는 '명선'이라 쓴 큰 글씨 좌우에 이 글씨를 쓰게 된 사연을 직접 썼다.

"초의(草依)가 스스로 만든 차를 보내왔는데, 몽정(夢頂)과 노아(露芽)에 덜하지 않다. 이를 써서 보답하는데,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의 필의로 쓴다.  병거사(病居士)가 예서로 쓰다." 라는 내용이다.

 

초의는 추사와 30세에 만나 42년간 금란지교(金蘭之交)를 나누었던 동갑내기 승려 친구 이다.

두 사람은 신분이 달랐지만 학문가 예술, 그리고 다도(茶道)로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초의는 추사의 글씨를 지극히 좋아했고,

추사는 초의의 차를 누구보다도 아끼고 사랑했다, 그래서 추사는 무시로 초의에게 차를 보내줄 것을 당부하고 재촉했다.

 

"나는 스님을 보고 싶지도 않고 또한 스님의 편지도 보고 싶지 않으나 다만 차와의 인연만은 차마 끊어버리지 못하고

쉽사리 부수어 버리지도 못하여 또 차를 재촉하니 편지도 필요없고 다만 두 해의 쌓인 빚을 한꺼번에 챙겨 보내되

다시는 지체하거나 빗나감이 없도록 하시는게 좋을 겁니다. "

 

농담 섞인 협박으로 두 사람의 격의 없는 우정을 잘 보여주는 편지 글이다. 추사는 50대 무렵 벼슬살이에 뜻을 접고

병거사(病居士)를 자처하며 과천에 있는 별장에서 은둔해 있었다. 험난하고 고단한 시절, 좋은 차를 마시는 것은

추사에게 더할나위없는 즐거움이자 위안이었다. 이때 초의가 차를 만들어 보낸다.

초의가 보낸 차는 천하 제일의 명차로 불리는 중국 사천성의 몽정차와 강소성의 노아차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추사는 그 보답으로 '명선' 두 자의 글씨를 써서 초의에게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추사는 이 글씨를 쓰면서 한나라 때의 비석인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의 글씨를 참고했다. 백석신군비는 중국 하북성 백석산 산신(山神)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

 

추사의 스승인 옹방강은 백석신군비에 새겨진 글씨를 극찬했고 추사도 무척 좋아 했다. 추사는 네모 반듯하고 굳센 필치의

백석신군비 글씨가 지닌 특징을 정확하게 파악한 후 장중함과 졸박함을 더하여 한 차원 높은 경지를 승화 사켰다.

현존하는 추사의 글씨 중 규모가 가장 크며, 필치 또한 탁월하다. 그래서 50대의 글씨지만 추사 글씨를 대표할 만한 명작으로 꼽힌다.

 

 

추사, 예서대련 1856년작.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 훌륭한 모임은 부부(夫婦)와 아들딸 손자"라는 뜻이다.

작은 글씨로 쓰여있는 글을 해석하면 "이것은 촌 늙은이의 제일 가는 즐거움이다. 비록 허리춤에 한 말(斗)이나 되는

큰 황금인(黃金印)을차고, 음식이 사방 한 길이나 차려지고 시중을 드는 첩들이 수 백명 있다 하더라도

능히 이런맛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행농을 위해 쓴다. 칠십일과 (七十一果)" 라는 내용이다.

 

추사는 철종 7년인 1856년 10월 10일 돌아가는데 이 글은 추사가 돌아가시기 두 달 전쯤인 8월에 썼으리라 생각 된다.

71세의 과천에 사는 노인이라는 의미의 '칠십일과'라는 관서가 그 증거이다.

졸박하고 천진해 조금의 속기도 찾아볼 수 없는 필체는 추사 만년기 글씨의 특징이다.

죽음을 앞둔 대학자의 진솔함과 추사체의 진면목이 집약된 절품이다.

 

 

탄은(灘隱) 이정(李霆), 풍죽(風竹: 바람에 맞선 대) 

 

탄은 이정(1544~1626, 명종9~ 인조4)은 조선 중기의 묵죽화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섭(仲燮), 호는 탄은(灘隱). 세종의 현손으로 익주군(益州君) 이지(李枝)의 아들이다.

석양정(石陽正: 正이란 조선 때 비교적 가까운 왕손에게 준 작호로 정3품 堂下에 해당함)에 봉해졌다. 뒤에 석양군(石陽君)으로 승격되었다

세종대왕의 고손을 태어난 왕실 출신 문인화가이다. 그는 사군자,특히 묵죽화에 전념하여

한국최화사상 최고의 묵죽 화가로 평가 받는다. 이 풍죽은 그의 묵죽화 중에서도 백미라 할만한 작품 이다

거친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대나무가 거센 바람을 맞아 요동치고 있다. 흐린 먹으로 그린 마치 그림자처럼 보이는 후면으로

여린 대나무는 바람에 치여 쓰러질 듯 얽혀있고 댓잎들은 찢겨나갈 듯 나부낀다. 바람이 얼마나 강하게 부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진한 먹으로 처리한 전면의 대나무는 댓잎만 강한 바람에 나부낄 뿐, 튼실한 줄기는 탄력있게 휘어지며 바람에 맞서고 있다.

이 그림의 주인공이다.

간결한 화면 구성, 극명한 흑백과 농담의 대비,굳센 필치로 인해 화폭 전체에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것 같은 패앵한 긴장감이 흐른다.

화면의 집중도를 높이고 대나무의 기세를 분산시키지 않기 위해, 바위나 흙의 묘사를 자제하고 최대한 간결하게 처리했다.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 한 느낌을 받을만큼 엄정하고 강렬하다. 고난과 시련에 맞서는 선비의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풍죽의 의미를

이만큼 잘 살려낸 작품은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탄은 이정은 선조에서 인조 시기를 살았던 문인이다. 조선전기 사회가 저물고 후기 사회가 열리는 격변기였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건실성과 역동성, 대규모의 전쟁과 같은 절체 절명의 위기에서 비롯된 절박함과 비장함,

그리고 전란을 극복해 낸 긍지 등을 이 풍죽에 온전히 녹여 냈다. 더구나 그가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칼을 맞아 오른팔이

잘려나갈 뻔한 시련을 겪었던 사실을 떠올린다면, 이 그림에서 흐르는 고고함과 강인함은

단지 붓끝의 기교로 얻은 수 있는 경지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은  현재 우리나라 오만원권 지폐 뒷면, 매화 뒤로 흐릿하게 나타나고 있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 68호

높이 42.1cm, 입지름 6.1cm, 밑지름 16.5cm

 

짧고 좁은 목과 반구(盤口)형의 구연부, 당당하게 벌어진 어깨에서 굽까지 내려오는 유려한 S자 곡선을 지닌 고려식 매병이다.

굽은 얕고 낮게 깎았으며 바닥에는 태토받침의 흔적이 남아 있다. 굽바닥을 제외하고 짙은 회청색의 유약을 씌웠는데 빙렬이 세세히 남아 있다.

 

문양 구성은 주문양대에는 운학문을 가득 시문하였다. 흑백으로 상감된 이중 원문(圓文) 안에는 상공을 향해 날아가는 학을,

원 밖에는 지상으로 내려오는 학을 배치하였다. 학의 형태는 크기와 형태가 거의 유사하고 여백에는 영지형 구름을 배치 하였다.

구연부 아래에는 연꽃을 백상감으로 시문하였고 저부에는 가늘고 길쭉한 이중 연판문대를 흑백상감으로 둘렀다. 연판 아쪽에는

백색의 원 안에 흑색의 점을 찍은 연주문(蓮珠文:구슬을 꿴 듯이 작은 원을 동그랗게 연결한 문양)을 베풀어 화려함을 더하고 있다.

 

이 매병의 주문양인 운학문은 장수를 상징하는 것으로 고대의 신선사상과 관련이 있다.  중국에서는 이미 위진남북조시대부터

처음 등정하여 당대(唐代)에는 주로 동경이나 금속제 합의 장식 문양으로, 대개 도교적인 문양소재와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송대(宋代)에 들어서는 벽화나 금속기 및 도자기에도 운학문이 등장하였다.

 

고려청자에서 운학문은 12세기 상감청자 초기부터 꾸준히 등장하였다.  초창기에는 넓은 여백으로 서로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는

두 세 마리의 커다란 암, 수 학 사이로 같은 크기의 영지형(靈芝形) 구름이 시문 되었다. 13세기 이후에는 점차 학과

구름의 크기가 줄어들고 대신 그 수가 증가하면서 여백도 축소 되었다. 학의 표현도 일정한 크기와 형태로 정형화 되었다.

흑백의 이중 원권 안에 학과 구름 을 시문하는 형태는 주로 13~14세기에 나탄난다. 이 매병은 13세기 중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그 질로 보아 고려시대 최고급 청자를 제작하였던 강긴이나 부안 지역의 요장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청화백자양각진사철채난국초충문병, 국보 264호

높이 42.1cm, 입지름 4.1cm, 밑지름 13.3cm, 18C후기.

 

조선조기부터 중국의 화려한 청화백자나 알록달록한 오채 그릇이 유입되어 중외에 파다하게 퍼졌지만, 절검(節儉)을 중시했던

조선의 왕실과 사대부들은 약간의 장식이 있는 소박한 느낌의 백자 사용의 전통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경시대 (숙종~정조) 들어 수요층의 기호가 변화하면서 조선백자에도 절제된 화려함이 시도 되었다.   

백자에 두 가지 이상의 안료를 사용하여 장식한다든가 문양을 양각이나 투각으로 조각하고 그 위에 채섹을 가하여 한껏 멋을 낸 것들이었다.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은 이러한 시대 상황을 잘 반영하는 수작이다. 목이 길고 몸체가 달항아리처럼

둥그런 유잭색의 병으로 산화코발트, 산화철, 산화동 등을 모두 안료로 사용하여 청색, 갈색, 홍색으로 장식하였다. 

먼저 푸른색을 내는 청화는 산화코발트가 주원료로 중국에서 수입하여야만 사용이 가능했다. 청화의 색상은 온도에 민감해서

 밝은 청색에서 검정색까지 다양하기 때문에 적당한 발색 온도를 찾기 위해서는 오랜 연구와 실험이 절대적이다.

 

다음 국내산인 철화백자에 사용되는 산화철 역시번조온도 및 번조시간, 번조 분뉘기에 의해 그 색상이 크게 달라 징다. 

 17세기 이후 등장한 붉은 색조의 동화는 산화동이나 탄산동이 주원료로 실제 사용할 때는 보조제와의 혼합과 유약의 두께 조절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처럼 이 세 가지의 안료는 모두 성질이 달라 소성 온도와 가마 분위기에 따라 발색이 좌우되어

제작에 있어 상당한 기술이 요구된다. 이런 복잡하고 고난도의 소성 과정 대문에 이 작품처럼 제대로 구현된 작품은

극히 일부로 명품이라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백자의 주제 문양인 초충도는 겸재 정선의 초충팔폭도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전체 구도는 둥그런 병의 몸통에

우측으로 비스듬히 올라간 국화문과 좌측으로 가느다랗게 뻗은 세 줄기 난초가 주를 이룬다. 양각으로 처리한 국화는

동화로 채색되었으며 국화 줄기와 잎은 철화로 장식 되었다. 난초는 청화로 장식 되었는데 그 발색 또한 상당히 선명하다.

 

공간을 구획하는 선이나 종속 문양대가 없으며 대형의 병임에도 목 위로는 문양이 시문되지 않아 번잡하지 않다.

국화의 좌측 상단에 동화로 채색된 곤춛은 여백을 메워 잘 짜여진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초충문은 그 의미상으로 볼 때

길상문의 일부에 속하고 채색에 있어 화려하고 장식적인 것이 특징이다. 또한, 전체 화면 구성상 생명이 잛은 곤충이나

일년생 국화가 주문양을 차지한 것은 자손 번영과 영원한 생명을 우의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유백색(유백색) 유약이 전면에 시유되어 단정한 느낌을 주며 굽다리에 내화토를 받쳐 구운 흔적이 발견되었다.

1936년 간송 선생이 경성구락부 경매에서 일본인 골동상과 수장가들을 제치고 지켜낸 조선 후기 도자를 대표하는 명작이다.

 

실물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혼을 빼엇길 정도로 ... 개인적으로 오늘 관람한 미술품 중 가장 갖고 싶은... 욕심나는? 물건이다. ㅎㅎㅎ

 

청자압형연적, 국보 74호, 12C전기.

높이 8.4cm, 길이 12.8cm

 

오리의 모습을 형상화한 연적은 여러 점이 전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이 작뭄은 고려 상형 청자 제작 기술이 절정일 때 제작 되었다. 오리는 꼬인 연꽃 줄기를 입에 물고 있으며 균형 잡힌 통통한 몸매이고

두 발은 몸통 밑으로 감추었다. 오리의 등에는 연잎과 연봉오리가 얹혔는데 연잎 부분에 물을 넣을 수 있는 입구를 만들고

연봉오리로 뚜껑을 만들어 살용성과 심미성을 동시에 만족 시켰다. 물을 따르는 출수구는 오리 주둥이 오른편에 붙어 있지만,

현재는 손상되어 원형을 확실히 알 수 없다. 깃털 등 세부까지 소홀함이 없이 매우 셈세하고 사실감 있게 묘사하였다.

 

유색은 맑은 비색으로 전면 시유하였는데, 유약이 고인 부분은 더욱 푸르게 보여 미감을 증가시키고 있다. 바닥에는

건조시에 사용된 규석받침이 네 개 발견된다. 이 작품과 같은 청자오리형 연적이 출토된 가마터는 강진 용우리, 부안 우천리 등이

 있으며 이들 유적에서 발견된 편들을 통해 오리형연적제작 방법을 알 수 있다. 흙으로 오리를 빚고 태토가 반쯤 건조 되었을 때

오리 몸체를 가로로 길게 절단한 뒤 속을 파내었다. 그 뒤 두 부분을 다시 정교하게 접합하여 세부묘사를 하여 마무리 하였다.

 

오리가 미술품의 주제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 전으로 한국 뿐 아니라 아시아와 유럽 등지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청동기시대 세형동검의 손잡이 장식을 거쳐 삼국과 통일산라시대 부장용 토기에서 오리를 형상화한 뚜껑이나

 그릇이 발견 되었다. 이때의 오리는 장식적 혹은 주술적 상징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 청자연적처럼

고귀함과 군자를 상징하는 연꽃과 가내평안과 부부 화합의 길상적의미를 지닌 오리가 만나 문인을 상징하는 연적으로 제작되면서,

문인 그 자체나 문인들의 소망인 장원급제를 포괄적으로 상징했던 것으로 보인다.

 

 

청자원형연적, 국보 270호,  12C전기

높이 10cm, 몸지름 6cm,

 

고려시대에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러 동식물의 형태를 형상화한 상형청자가 만힝 만들어 졌다.

이 가운데 원숭이이 형태로 제작된 고려청자는 소수인데, 대부분 인장이나 묵호, 연적의 형태로 제작되었다.

이런 청자들은 고려시대 귀족들이 원숭이를 애완용을 길렀다는 사실이나 그 길상적인 의미르 고려해볼 대

문인 귀족들의 책상에 놓여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가운데 이 작품은 조형성이 우수한 작품이다.

 

이 연적은 새끼를 품고 있는 어미 원숭이의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어미 원숭이의 머리 위에는 지름 1.0cm정도의 물을 넣는 구멍이,

새끼 원숭이의 머리에는 지름 0.3cm의 물을 따르른 구멍이 각각 뚫려있다. 모자 원숭이의 몸체는 간략하게 표현하였고 손가락과

발가락은 칼로 조각하여 도드라지게 하였다. 어미 원숭이의 얼굴은 이목구비를 모두 조각하여 원숭이의 형상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어미 원숭이는 쪼그리고 앉아 두 팔로 새끼를 받쳐 안고, 새끼는 왼팔을 뻗어 어미의 가슴을 밀고 오른손은 어미의 얼굴에 갖다대고 있다.

보는사람으로 하여금 모자간의 애틋한 정은 느끼게 한다. 어미 원숭이의 눈과 코, 새끼 원숭이의 눈은 철채로 까맣게 칠하여 생기를 부여하였다. 잔잔한 기포가 있는 맑은 비색의 유약을 시유하되 바닥은 시유하지 않았다. 어미 원숭이의 엉덩이에 4개, 양 발에 1개씩의 내화토를 받쳐 구웠다.

원숭이는 고려 혜종 연간 도교가 크게 유행하면서 고려청자에도 원숭이가 석류와 결합하여 장수을 상징하거나, 

원숭이가 서식하는 무릉도원을 연상시키는 도교의 상징 소재로도 사용되었다. 또 원숭이를 뜻하는 한자인 '후(후)'와

제후의 '후(侯)와 발음이 같은 데에서 배배봉후(輩輩封侯: 대대로 고관대작이 된다)'즉 대를 이어 높은 지위에 오르기를 바라는

 길상의 의미가 덧붙여졌다. 흔히 새끼 원숭이가 어미 원숭이 등에 업혀있는 도상으로 나타나는데  이 연적 역시

 모자 원숭이가 함께 등장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길상적 의미를 담고 있을 것으로 생긱된다.

 

 

청자기린형향로, 국보 65호, 12C전반

높이 20cm, 밑지름 11.5cm

 

짐승 얼굴 형상 3개의 다리로 받쳐진 낮은 원통형의 몸체 위에 고개를 돌려 앉은 기린이 조각된 뚜껑이 덮여있는 향로 이다.

몸체 측면에는 음각으로 구름 문양을 시문하였는데 여러 개의 짧은 곡선 윤곽선을 그리고 구름의 중심에서 아래쪽으로

 몇 개의 선을 그어 마치 여러 개의 구름이 위로 피어나는 듯하다. 몸체의 날개에도 세 송이의 구름이 시문되었다.

기린이 앉아 있는 대좌 옆면에는 뇌문(雷文:네모진 소용돌이 형태의 문양)을, 대좌 윗면 복판에는 여의두문(如意頭文울 듈렀다. 

 

기린은 머리를 쳐들고 있는데 네 개의  발톱과 등 뒤에 붙인 소꼬리, 곱슬한 갈기와 수염, 부러져서 전체 형태를 알 수는 없으나

사슴뿔처럼 생긴 한 개의 뿔, 벌린 입 사이로 보이는 뽀족한 혀 등 세부까지 매우 정교하다. 기린의 눈은 음각으로 조각한 뒤

눈동자를 철화로 마무리하였다. 구름으로 장식된 몸체 위에 올라앚은 기린의 입으로 향의 연기가 나오게 하여

마치 서기(瑞氣)를 토해내는 듯한 효과를 노렸다. 몸체의 바닥에는 4개의 규석받침 자국이 남아있고 뚜껑 역시 내부에 4개의

규석받침 자국이 남아있어 번조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유약에는 약간의 유빙렬(釉氷裂)이 나타나 있지만 유색은 전형적인 비색이다. 일찍이 선화봉사고렫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서긍(徐兢)과 태평노인(太平老人)등의 중국 문인들이 극찬한 아름다운 비색이 이 향로의 유색이 아닐까 여겨진다.

 

고려시대 향로는 뚜겅에 사자(獅자), 용, 기린,오리, 원앙 등의 다양한 동물을 상형으로 조각하여 부착하고 그 입에서

 연기가 나오도록 하였다. 이 향로의 모델인 기린(麒麟)은 수컷을 기麒, 암컷을 린麟  이라 하여 예로부터 왕도(王道)가 행해지면

나타나는 신성한 동물로 알려져 있다. 그 모습은 몸통은 사슴 같고 이마는 이리와 같고 꼬리는 소와 같고 발굽은 말과 같다고 하였다.

또 이마에 뿔이 하나 돋았는데, 그 끝에 살이 붙어 있어 다른 짐승을 해치지 않으며 초목을 밟지않는다 하여 인수(仁獸)라고 하였다.

삼국시대에는 기와에 조각되었으며 고려시대 동경의 뒷면에도 새겨져 있다. 고려청자에서는오로지 향로로만 제작 되었다.

 

이 향로의 몸체와 유사한 청자삼족형 향로는 강진 삼흥리, 용운리 10호,11층, 사당리 및 부안 유천리 등에서만 발견되었다.

이 밖에 중국 절강성(浙江省) 사룡구(寺龍口) 월요지(越窯址)에서도 삼족 향로가 발견되어 고려청자 삼족향로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다. 사룡구요 출토의 삼족향로 중 기린유개향로와 같이 짐승발 형태 의 다리가 달리고

뭄체가 원통형이며 전이 넓게 벌어지는 형태는 복송 초기부터 남송시기까지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다.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 국보 66호, 12C후기

높이 37.2cm, 입지름 1.5cm, 밑지름 8.9cm

 

'정병(淨甁)은 맑은 물을 담는 병이다'는 의미이다.  승려가 두타행(頭陀行: 심신을 맑게 하기 위한 승려들의 고행)을 따날 때

반드시 지녀햐 하는 열여덟 가지의 지물 중 하나이며 불전에 정수를 공양하는 공양구 이다. 또 자비를 상징하는 관음보살의 지물이다.

고려시대 정병은 금속기와 도자기로 모두 만들어졌는데 그 조형이나 장식소재가 거의 유사하다.

 

이 정병은 반듯한 조형과 비색의 유색이 그대로 느껴지는 수작이다. 병은 환대(環帶)가 부착된 기다란 목과 옆구리에 별도의

주입구가 달린 몸체로 이루어졌다. 병의 어깨는 풍만하게 벌어졌다가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다 외반하는 형태다.

몸체 어깨 한쪽에 작은 주입구를 부착하였는데 주입구의 구연부 형태와 고리 모양의 귀가 달려있는 것을 보아 원래 

뚜껑이 있었을 것이나 남아있지는 않다. 긴 목 중간에는 환대를 두고 환대 윗목은 팔면으로 되어 있다.

물은 어께의 주입구를 통해 닫고 침대를 통해 따라냈던 것으로 보인다. 기형이나 세부 표현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국보 제 92호 청동은입사포유수금문 정병(靑銅銀入絲蒲柳水禽文淨甁)과 같은 금속기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문양은 첨대에는 위에서부터 운문, 선문, 당초문을 시문하고 환대의 윗부분에는 운문을, 목 부분에는 간략하게 표현된

 모란을 앞뒤로 한 송이씩 시문하였다. 몸체에는 버드나무와 갈대가 서 있고 원앙이 한가로이 헤엄치고 있는 연못이 있다.

연꽃은 꽃잎이 작고 가늘어 소박한 느낌을 주며 몸체에 비해 머리가 큰 원앙의 눈은 유일하게 흑상감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물가 풍경은 고려시대 금속기나 청자에 자주 나타나는 문양 소재로 회화적이고 서정적인 느낌을 준다.

 

 

금동삼존불감국보 73호, 11C

대웅전 안에 석가 삼존상을 모신 형태의 소형 원불(몸에 지니고 다니며 소원을 비는 불상) 이다.

소형 대웅전은 불감이라 부르는데 이 건물을 통해 당시 대웅전 건축양식을 짐작할 수 있다.

삼존불상은 석가여래을 주불좌상으로 문수, 보현 양대 보살이 협시하고 있는 형태이다.

 

 

계미 명금동 삼존불 입상국보 72호. 563년

 

 광배 뒷면에 '계미 11월 정일 보화가 돌아간 아버지 조귀인을 위해 만들다' 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앞에 이름이 붙은것,

6세기 초반부터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호신불로 유행하던 금동 삼존불상이다. 가운데 주불 입상과 좌우에 보살 입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국보 70호.

 

룬민정음은 크게 예의(例儀) 와 해례(解例)로 나누어져 있다.

예의는 세종이 직접 지은 글로 한글을 만든 이유와 한글의 사용법을 간략하게 설명 하였다.

해례는 정인지(鄭麟趾)와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강희안(姜希顔), 이개(李塏), 이선로(李善老) 등

세종을 보필하여 한글을 만들었던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용례를 상세하게 설명한 글이다.

 

우리가 국어시간에 배웠던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되는 글은 예의의 첫머리에 있는 서문을 우리말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흔히 '훈민정음 언해본' 이라 부른다. 서문을 포함한 예의 부분은 무척 간략해 '세종실록(世宗實錄)'과 '월인석보(月印釋譜)' 등에 실려

전해져 왔지만, 한글 창제 원리와 용법이 소상하게 밝혀져 있는 해례는 세상에 젼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 예의와 해례가 모두 실려있는 훈민정음 정본이 1940년에 발견 되었다. 그것이 이 '훈민정음 해례본' 이다.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 중 가장 집요하고 악랄했던 것은 우리말과 글에 대한 탄압이었다.

한 나라와 민족의 정신을 담는 그릇은 바로 언어와 문자이다. 말과 글이 사라진다는 것은 새계를 바라보는 고유이 관점, 즉

독자적인 세계관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제는 진정으로 우리말과 글이 사라지길 바랐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제에게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러나 간송은 각고의 노력과 엄청난 대가를 치루며

'훈민정음 해례본'을 품었다. 그리고 수년간 비밀리에 지켜오다 해방 후 조선어학회 학자들을 불러 세상에 공개하여 한글이

 인체의 발음기관을 상형화한 사실을 명확하게 밝혀낼 수 있었다. 이로써 고대글자 모방설, 고전(古箭) 기원설, 범자(梵字) 기원설,

 몽골문자 기원설 심지어는 하장실 창살 모양에서 유래 되었다는 설 등, 해례본이 없었던 시절 제기된

한글의 창제 원리에 대한 허무맹랑한 주장들의 일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에 실린 정인지의 서문에 의하면 1448년 9월 상순에 썼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늦어도 음력 9월 10일에 

이 책이 출판된 것으로 추정되어 이책의 출판일을 기념하여 한글날이 제정 되었다.

 

인류 역사상 문자가 그 만든 목적과 유래, 사용법, 그리고 창제의 원리와 세계관을 명확히 밝혀 만들어진 예는 없었다.

훈민정음이 뮤일무이하다. 따라서  훈민정음은 비단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와 문하의 전개에서도

엄청난 성과이자 족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한글의 위상과 의미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훈민정음 해례본' 이다.

 

1962년 12월 해례본은 국보 제 70호로 지정 되었다. 그리고 1997년 10월 유네스코 게계 기록 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이 해례본은 단독 진열장에 보관 되어있고 조명은 어둡고 거리가 멀어 글씨를 직접 보기는 힘들고 해설사의 설명만 듣게 된다.

 

 

동국정운(東國正韻), 국보 71호, 1447년,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라는 뜻으로 중국의 음운에 관한 책인 홍무정운에 대비되는 것이다.

우리나라 한자음을 바로잡아 통일된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편찬 되었다.

이 책은 91운 23자모의 체계를 세워 분류하였는데, 이는 훈민정음의 초성체계와 일치하고 송나라이 36자모와는 다르다.  

우리나라의 한자음을 기준을 한 것이나 일부 국어의 현실음과 어긋나는 것이 있어 주로 불경 언해에 사용되다가

16세기에는 사용이 전면 폐지 되었다.

원래는 6권 6책이 활자본이지만 현재는 1권과 6권만이 전해진다. 이 책의 권수에는 서문과 목록이 있고,

권1은 46장으로 되어 있으며 권6은 44장으로 되어있다.

 

 

현재 심사정(玄齋 沈師正), 촉잔도권(蜀棧圖圈)

 

촉은 지금의 사천성(四川省)에 해당되는 지역인데,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어 예로부터 험하고 풍광이 뛰어나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당대 시인 이백(李白)은 '촉으로 향하는 길은 하늘을 오르기보다 힘들다'라고 말했으며 

당 현종(玄宗, 재위 712~755)은 피란길에  보았던 그 아름다움을 못잊어 당대 제일 명화가인 이사훈(李思訓, 651~716)과

오도현(吳道玄, ?~755)에게 그려오게 했다.

 

조선 남종화의 대가인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이 축도를 그렸다. 처음부터 등장하는 험준한 산들은

 촉도의 관문을 의미하는데 앞으로 전개될 수많은 기암고봉(奇巖高峰)들의 시작에 불과하다 .  워낙 길게 이어지는 그림이라

중간 중간에 각각의 요소로 풍경을 마무리 지으며 다음의 풍경과 구별하여 자칫 지루해 질 수 있는 화면 구성을 자연스럽게 이어주고 있다.

숨악힐 듯 이어지던 험준한 산과 깊은 계곡물의 신비로운 조화는 드넓은 강물이 나타나 숨을 고르며 끝을 맺는다.

 

8m가 넘는 장대한 화면의 끝에는 권말 상단에 '무자년 중추 이당(李唐)의 촉잔(蜀棧)을 방한다.

현재(戊子中秋 倣寫 李唐 蜀棧, 玄齎)' 라는 관서를 남겼다. (본뜰 방)

심사정이 52세 대인 1768년(영조44) 8월에 송대의 대화가인 이당(李唐)의 필법에 따라 그렸음을 말하는 내용이다.

 심사정은 이 그림을 그린 다음해인 영조 45년 (1789) 5월 15일에 63세로 돌아간다.

화가로서 쌓아왔던 일생의 모든 역량을 남김없이 쏱아 부은 절필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그림은 간송이 1936년 당시 서울에서 큰 기와집 한 채 값이 1,000원 할 때 5,000원을 주고 구입한 뒤

일본에 보내 6,000원을 들여 복원한 것이라 한다.

 

조선시대 그림 중 가장 긴 그림이다.  그림이 길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또는 해설사의 얘기를 듣느라

우루르 우르르 몰려다녀 전체를 한번에 감상하기가 힘들다. 

기회가 되면 혼자 가서 여유있고 호젓하게 다시 한 번 구경해 봐야 겠다. 화운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버금가는 그림이다

 

아래 사진은 위 촉잔도권(蜀棧圖圈),  좌우 길이가  8m가 넘는 그림이라 너무 길어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보았다.

두루말이 그림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보는 것이라 위 그림 오른쪽 그림부더 아래로 내려가면 왼쪽 부분이 된다.

 

(※. 아래 그림들은 클릭하면 조금 더 크게 볼 수 있음)

아래 그림은 위 그림 왼쪽으로 이어지는 모습들 이다.

 

네 부분으로 나눈 이 사진 한장의 그림 실제 길이는 2m가 넘는다.

 

 

▲  맨아래 그림은 전체 길이의 맨 왼쪽 끝부분이 된다.

 

▲ 건물 내부 벽에 그려진 국보 제 135호 월하정인(18세기 신 윤복) 앞에서.

 

혜원 미인도 앞에서.

 

전시장 안에 전시된 그림은 직접 촬영할 수가 없어 오늘 본 그림 몇 점과 해설사의 설명과 함께 간송미술관에서 옮겼다.

그림은 작아 크게 펀집하고 글은 복사가 안되어 漢字까지 일일이 한 자 한 자 쓰느라 오타도 생기고... 애고 힘들어라... ㅎㅎ 

  

'Story(문화,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나를 찾아줘'  (0) 2014.12.11
영화) 명량  (0) 2014.08.14
영화) 천번의 굿 나잇  (0) 2014.07.03
진안 문화탐방 일정표  (0) 2014.06.28
영화) 차가운 장미  (0) 2014.0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