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여행

강화 교동도 화개산

opal* 2015. 8. 25. 22:11

 

 

 

 

 

 

 

경남 밀양에 있는 구만산(영남 알프스 중 운문산 옆) 산행이 잡혀 있는 날, 며칠전 부터 태풍 15호 고니가 남쪽 지방에 폭우를 동반하고 오겠다는 예보가 있었다,  아침 회원이 다 모인(태풍 예보로 불참 인원이 많다) 후 산행지를 갑자기 다른 곳으로 변경. 비는 전국적으로 다 내릴 것이라 하지만 서북쪽엔 영향이 적을 것 같아 가까운 강화도로 결정.

 

강화도는 골고루 아주 많이 다녀 봤지만, 교동은 한 번도 못가본 곳이라 첫산행지 이다. 강화도에서 석모도 다음으로 큰 섬, 예전에 창후리까지 간 김에 배를 타고 들어가보고 싶었지만 일반인들은 배를 탈 수가 없었다 석모도 보다 북쪽인 강화도의 서북쪽에 위치하여 북한 땅(황해도)과 마주하고 있는, 북한과의 경계 지역이 가깝기 때문이다. 주민 대부분은 6·25전쟁 때 황해도에서 월남하였다가 돌아가지 못하고 정착한 사람들이다. 섬이지만 간척지여서 논농사가 매우 성한 지역이다

 

2008년에 착공한 교동대교(喬桐大橋)가 작년(2014.7.1)에 개통 되었다.  강화군 양사면 인후리와 교동면 봉소리간의 연육교 이다. 민간인 출입 통제구역 이던 곳이 교동대교 개통 이후 출입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다리를 건너기 전 신고를 하고 출입증을 받은 후 교동에 들어갈 수 있다. 

 

초소에서 검문하던 군인은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내게 " 다리(교동대교)는 찍지 마세요"  한다. 다리는 군사 시설이라는데 인터넷 검색하다보면 사진이 많이 올라와 있다.  길은 왕복 2차선이긴 하지만 좁아 길 넓히는 작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

 

교동 면사무소 주차장에 차 세우고 하차하여 산행 시작. 태풍 영향으로 비는 간간히 오락가락, 바람은 시원해 걷기에 아주 좋다. 등산로가 바로 정상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일부러 화개사부터 들려 두루 살펴 본 후 정상으로 향했다. 

등산로 주변엔 여러가지 꽃들이 만발하여 향내가 온 산을 진동시키나 누리장 나무 꽃은 향이 별로다.

제일 많이 보이는 노란꽃은 처음엔 돼지감자 혹은 뚱단지라 불리는 꽃인줄 알았으나 자세히 보니 아니다.

처음 접해보는 꽃이라 나중에 알아보니 줄기에 날개가 있어 '나래가막사리'라고 한다.

나래가막사리(wingstem) : 다년생 초본으로 근경이나 종자로 번식한다.

북아메리카가 원산지인 귀화식물로 전국적으로 분포하며 도로변이나 산 가장자리에서 자란다. 근경에서 나와 군생하는 원줄기는 높이 1.5~2.5m 정도이고 전체에 약간의 털이 있다.

 

참고로 교동대교 다리 사진은 나올 때 찍었다.

 

 

교동읍성 [喬桐邑城)은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에 있는 조선시대 후기의 읍성둘레 약 430m. 높이 약 6m.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3호. 서해안의 방어를 위해 1629년에 쌓은 고을성이다. 원래 동문, 북문, 남문 등 세 곳에 문루를 갖춘 성문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남문 유량루의 홍예 부분만 남아 있다

 

고동도는 연산군(燕山君)이 유배 되었던 섬이다.연산군은 1476년(성종7) 11얼 7일 성종이 맏아들(적장자)로 출생 하였다.

당시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는 성종()의 첫번째 후궁이었으며 이후 연산군을 잉태하면서 비로 책봉되었다.

이름은 이융()이고 7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다. 서연()을 통해 세자로서 수업을 받았으며 그의 학문적인 소양은 선대 왕들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다. 1494년 성종이 사망하자 조선의 제10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국왕(연산군)은 강력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자신의 관심인 사냥과 사치를 즐겼고 국고의 사정은 나빠졌다.

1504년에는 손녀를 궁중으로 들이라는 연산군의 명을 거역하였다는 죄목으로 경기도관찰사를 지내던 홍귀달이 숙청되었다.  이 사건은 확대되어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문제로 번졌다. 

성종의 후궁인 정씨() ·엄씨()의 모함으로 윤씨가 내쫓겨 사사()되었다고 해서 자기 손으로

두 후궁을 죽여 산야에 버리는 포악한 성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모 인수대비()를 구타하여 죽게 하고,

윤씨의 폐비에 찬성하였다 하여 윤필상() ·김굉필() 등 수십 명을 살해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 등을 부관참시()하는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또 국왕의 난행을 비방한 투서가 언문으로 쓰여지자, 한글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구결()을 모조리 거두어 불태웠다.

 

한편, 각도에 채홍사(使) ·채청사(使) 등을 파견해서 미녀와 양마()를 구해오게 하고, 성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그곳을 놀이터로 삼는 등 황음()에 빠졌다.  경연()을 없애 학문을 마다하였고, 사간원()을 폐지해서 언로()를 막는 등 그 비정()은 극에 달하였다. 급기야 1506(중종 1) 성희안() ·박원종() 등의 중종반정에 의해 폐왕이 되어 강화도 교동(:)으로 쫓겨나고, 연산군으로 강봉()되어 폐위된지 두달만에 역질로 죽었다고 기록되었다.

그의 치세는 개국 100년의 조선조에 한 시대의 획을 긋게 하여, 이후 50년은 사화()라는 유혈극이 잇따라 일어나

그것은 선조 이후 다시 붕당() 및 붕당정치로 확대 악화되고, 한편으로는 임진 ·병자 등 국난으로 국운은 쇠퇴의 길을 밟게 되었다

 

燕山君墓

 해 11월 유배지에서 죽어 강화에 장사지냈다가 1512년 12월 폐비 신씨(愼氏)의 진언으로 그 이듬해

도봉구 방학동으로 천장(遷葬 : 묘를 옮김)하였다

 

교동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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