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이기철 - 12월엔, 인생, 사람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다, 네 켤레의 신발

opal* 2015. 12. 5. 12:18

 

 

12월엔

 

                                                               이기철

 

한 해의 끝자락에서

지나온 첫 자락을 생각한다

그 구비 지날때마다

동행했던 자잘한

감정의 부스러기

각질처럼 남아 있는

12월의 종착역

기차를 갈아타고 가야겠지

다시 저 멀리 가려면

내가 생각하지 못한

기다림 속으로

 

 

인생

 

                                                                       이기철

 

인생이란 사람이 살아 있다는 말

눈 맞는 돌멩이처럼 오래 견뎠다는 말
견디며 숟가락으로 시간을 되질했다는 말
되질한 시간이 가랑잎으로 쌓였다는 말
글 읽고 시험 치고 직업을 가졌다는 말
연애도 했다는 말
여자를 안고 집을 이루고
자식을 얻었다는 말
그러나 마지막엔 혼자라는 말
그래서 산노루처럼 쓸쓸하다는 말

 

 

사람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다

 

                                                                     이기철

 

달걀이 아직 따뜻할 동안만이라도

사람을 사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 사는 세상엔 때로 살구꽃 같은 만남도 있고
단풍잎 같은 이별도 있다
지붕이 기다린 만큼 너는 기다려 보았느냐
사람 나 죽으면 하늘에 별 하나 더 뜬다고 믿는 사람들의 동네에
나는 새로 사온 호미로 박꽃 한 포기 심겠다
사람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다
내 아는 사람이여
햇볕이 데워놓은 이 세상에
하루만이라도 더 아름답게 머물다 가라

 

 

네 켤레의 신발

 

                                                                             이기철

 

오늘 저 나직한 지붕 아래서

코와 눈매가 닮은 식구들이 모여 앉아 저녁을 먹는 시간은
얼마나 따뜻한가

늘 만져서 반짝이는 찻잔, 잘 닦은 마룻바닥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소리 내는 창문 안에서
이제 스무 해를 함께 산 부부가 식탁에 앉아
안나 카레리나를 이야기하는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누가 긴 휘파람으로 불어왔는지, 커튼 안까지 달려온 별빛으로
이마까지 덮은 아들의 머리카락 수를 헬 수 있는
밤은 얼마나 아늑한가

시금치와 배추 반 단의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은 사람의 전화번호를
마음으로 외는 시간이란 얼마나 넉넉한가
흙이 묻어도 정겨운, 함께 놓이면 그것이 곧 가족이고 식구인
네 켤레의 신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