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오세영 - 2월, 아득히, 항공 티켓, 먼 후일

opal* 2016. 2. 13. 23:00

 

 

2월

 

                                                                오세영

 

'벌써'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새해 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월,
지나치지 말고 오늘은
뜰의 매화 가지를 살펴보아라.
항상 비어 있던 그 자리에
어느덧 벙글고 있는
꽃,
세계는
부르는 이름 앞에서만 존재를
드러내 밝힌다.
외출을 하려다 말고 돌아와
문득
털 외투를 벗는 2월은
현상이 결코 본질일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달,
'벌써'라는 말이
2월만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아득히 
  
                                        오세영   
 
봄이 온다는 것은
누군가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이다.
새록새록 눈녹는 소리에
여기저기 언 땅을 밀치고 솟아나는
새 순들.

봄이 온다는 것은
누군가 흔들어 깨워준다는
것이다.
바람에
하나씩 눈 뜨는 나무의
잎새들,

봄이 온다는 것은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아른 아른 취해
아지랑이 먼 하늘 황홀하게 우러르는
꽃들의 눈빛,

봄이 온다는 것은
아득히 눈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가지에 물오르듯 아아,
초록으로 번지는 이
슬픔

 

 

항공 티켓 
  
                                                 오세영   
 
그 길을 따라
로마로
혹은 파리로 간다 하지만
인간이 때로 여로에 오르는 것은

지상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봄날 오후
하롱하롱 지던 꽃잎이 바람에 쏠려
하늘길 가듯
가을 저녁
시나브로 지던 잎새가 강물에 실려
은하길 가듯
인간이 때로 여로에 오르는 것은
그의 가슴에
밀물이 일기 때문이다.
목숨이란 지도상에 찍힌 점 하나
그 한 장의 지도를 들고
어디로 갈까
하롱하롱 져서 바람에 날리는 꽃잎같이
로마로 혹은 파리로
항공 티켓을 끊는
봄날 오후

  

                                                                                                                                                  여수 돌산대교

 먼 후일 
  
                                                                오세영 
 
먼 항구에 배를 대듯이
나 이제 아무데서나
쉬어야겠다.
동백꽃 없어도 좋으리,
해당화 없어도 좋으리.
흐린 수평선 너머 아득한 봄하늘 다시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면 ……
먼 항구에 배를 대듯이
나 이제 아무나와
그리움 풀어야겠다.
갈매기 없어도 좋으리,
동박새 없어도 좋으리.
은빛 가물거리는 파도 너머 지는 노을 다시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면 ……
가까운 포구가 아니라
먼 항구에 배를 대듯이
먼 후일 먼 하늘에 배를 대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