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에서 김포 변두리로 이사하며 카페를 오픈한다고 지인이 초대장을 보내 왔기에 동생과 함께 했다.
전 같으면 차 갖고 단숨에 달려 가련만 운전하기 싫어 대중교통 이용하려니 좀 불편하다.
서울 낮기온이 34.8℃, 버스 기다리느라 아스팔트 도로 중앙 차선 버스 승강장에 서 있으려니
복사열까지 합하여 체온보다 더 높은 한증막에 들어선 기분, 땀이 줄줄 흐르며 옷이 금방 푹푹 젖는다.
강화도로 향하는 냉방 잘 된 버스에 오르니 금방 땀이 식는다.
김포 지나는 동안 소나기가 내리기도 했으나 잠깐 내리다 멈추고 다시 햇볕이 쨍쨍 내리쬔다.
버스 정류장에서 가까워 찾기가 쉬웠다. 이사 떡과 수육으로 점심식사 대신하고 새로 오픈한 기념으로 맛있는 커피도 주문.
회원들 손으로 직접 뜬 작품들.
운영하던 뜨게질 공방과 카페를 함께 운영한단다.
열정을 갖고 시작하는 주인에게 오래도록 잘 되고 번창하기를 바라며 인사하고 나왔다.
먼 곳까지 갔다가 바로 집으로 돌아가기엔 아쉬운 마음이 들어 차 내린 곳에서 다시 버스에 올라 강화도로 향했다.
강화대교 건너 버스 터미널로.
70년대 초부터 40 여년 동안 강화도엘 드나들었어도 대중 교통을 이용한 적은 서너번 될까말까 정도다.
강화도는 구석구석 돌아다녀 가보고 싶은 곳도 별로 없지만,
터미날에서 내려 두 달전(2017.6.28) 개통한 석모대교나 건너볼까 했는데 시간표를 보고 바로 포기했다.
전에는 외포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가야했던 석모도를 지금은 자동차로 갈 수 있게 된 것인데,
뜨거운 낮시간 이라 석모도 가서 걷기도 힘들겠고, 버스 배차 간격이 너무 길어 기다리기 지루해 포기하고,
다른 곳 어디 갈 곳 없을까 찾아보다 평화 전망대가 보여 2번 순환 버스에 올랐다.
2번 버스에 올라 출발 시간 기다리는데도 한참이 걸린다. 다음에도 버스 이용하게 되면 도움 될까하고 행선지마다 번호대로 담아 보았다.
석모도 다닐 때 들렸던 외포리.
평화전망대를 오가는 버스는 1번과 2번 버스가 있는데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돌고 있다.
2번 버스는 외포리부터 들린 후 창후리 쪽을 거쳐 전망대로 가므로 시간이 많이 걸린다.
평화전망대를 먼저 가고 싶으면 1번 버스를 이용하면 더 빨리 도착 할 수 있다.
평화 전망대로 가는 길엔 군인들이 바리게이트를 치고 지키고 있다.
본인이 제적봉(평화 전망대 있는 곳)엘 처음 갔던 일은 90년대 초, 지인의 도움으로 갈 수 있었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은 갈 수 없는, 산꼭대기에 군 시설인 OP(Observation Post, 전방 관측소) 하나 있던 곳이다.
처음 찾았을 때 본인의 느낌을 말했던 일이 떠오른다. "풍광이 좋은 곳을 보면 '와~ 좋다' 해야 하는데,
조선시대 같으면 꼭대기에 정자 하나 짓고 풍류객들이 모여 시나 짓고 해야할 장소인데
지금은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현실이 슬프다고" 했던....
제적봉은 강화도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 보고 있는 곳이다.
북한 땅까지의 거리가 2Km 정도로 가까워,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김포 애기봉 전망대나 파주 오두산 통일 전망대 처럼
지금은 전망대 건물을 지어 일반인 출입이 가능해졌으니 다녀온지 20 여년만에 다시 찾는 것이다.
평화전망대 앞 버스 승강장 도착, 차에서 내려 언덕길 오르기.
현위치는 강화도에서 최북단, 전에는 현지 주민이 아니면 출입이 힘들었던 곳이다.
평화 전망대는 입장권이 있어야.
OP 하나 달랑 있던 곳, 20여년 만에 다시 와보니 지하1층 지상4층 규모에 전면을 유리로 전망 좋은 근사한 건물이 우뚝 서있다.
3층 북한땅 조망실
전방으로 약 2.3㎞ 해안가를 건너 흐르는 예성강, 개성공단 등을 볼 수 있는 모형이 있고,
평화 전망대 건물 3층. 관람객이 모이면 해설사가 해설을 해준다.
강화도 북쪽은 북한의 황해북도 개풍군에 해당 된다.
건물 안에서 유리창 통해 촬영한 북한 땅 모습.
건물 안에서 찍으면 유리창이 얼비쳐 밖으로 나와 찍은 좌측 모습.
수영을 잘하면 헤엄쳐서도 건널 수 있는 넓이 이다.
아래 사진으로 갈 수록 위치도 좌측에서 우측으로 보이는 모습이다.
2년 전(2015.08.25)엔 강화도 서북쪽에 있는 섬, 교동도 새로 놓여진 다리를 건너 화개산에 올라 북한 땅을 보았었다.
이곳 평화전망대 건물은 2008년에 개관 하였고, 교동대교는 2014년 7월 1일 개통 되었다.
우리나라도 다리 건설 실력이 많이 발달되어 지금은 웬만한 섬엔 모두 다리가 놓여진다.
석모도에도 이미 두 달전 개통 되었고, 무의도에도 한창 건설 중이다.
통일이 되면 이곳이나 김포 애기봉 등에도 북한 땅과 이어지는 다리가 놓여질텐데 그게 언제 이루어 질지...
날씨 좋을 땐 멀리 개성에 있는 송악산이 보인다고 했는데 오늘은 ... 보이질 않는다.
전망대 우측에서 바라본 모습들을 순서대로.
줌으로 좀더 가까이 당기니 건물도 보인다.
보기엔 평화롭고 눈에 익은 들판인 우리 땅인데.... 강만 건너면 되는데.... 갈 수가 없는 곳이 이라니...
맨 우측으로 보이는 곳이 강 폭이 좁아 북한과의 거리가 가장 짧은 곳이라고 한다.
지척에 두고 서로 쳐다만 볼 뿐, 왕래 할 수 없는 현실이 마음 아프다.
건물 위에서 내려다 본 정문과 마당 모습.
2층에 위치한 전시실에는 강화의 국방체험과 북한의 도발, 남·북한의 군사력 비교, 통일정책을 볼 수 있는
북한으로의 여행을 경험할 수 있는 영상시설을 통해 볼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북한땅을 내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3층에 있지만 2층에도 있다.
2층 전시장.
북한 돈과 밖에 만든 망배단
북쪽으로 보이는 북녘땅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밖에 걸어 놓은 모습,
아래 사진은 위 그림 우측으로 연결되는 모습 이다.
"저~기가 북녘땅 이드래요."
건물 지하층과 4층은 군부대 전용시설이며,
1층에는 강화특산품과 북한의 특산물 등을 판매하는 토산품 판매장과 식당, 관리사무실, 통일염원소,휴게실 등,
2층에는 고성능 망원경과 전쟁의 참상과 흔적을 볼 수 있는 전시실,
3층에는 이북의 온 산하가 한눈에 가까이 볼 수 있는 북한땅 전망시설과 스크린 시설이 있다.
전망대를 둘러보고 나와 다시 터미널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배차 간격은 길으나 다행히도 버스가 빨리 와 주었다.
서울에서 강화도를 잇는 48번 국도는 아직도 인화리까지 직선도로화 공사 중인 곳이 보인다.
강화성 서문을 지나 시가지에 들어오니 "고려궁지가 보고 싶은데 우리 차에서 내려 더 보고 갈래요?" 하기에 하차.
허름한 구조물에 심도직물 마크가 보인다. 70년대에 거래했던 회사 마크라 기억이 난다.
고려시대 궁지 찾아 왔더니 퇴근 시간이 지나 승평문이 닫혀있다.
굳게 닫혀진 승평문 대문 사이로 안을 촬영해 보았다.
오늘은 시간이 늦어 볼 수 없고 다음에 기회 만들어 다시 와 봐야 할 곳으로 점찍어 두고 다른 곳으로 이동. .
가는 곳마다 유적지가 많아 강화도는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불린다.
고려시대 고종 홍릉 묘가 강화읍 국화리에 있어 30여년 전인 80년대에 답사 하기도 했다.
더운 날씨에 돌아다니느라 땀을 많이 흘려 옷이 푹 젖었다.
성공회 강화 성당(사적 제 424호, 1900.11.15 건립)은 현존하는 한옥 교회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아래에는 경복궁 후원 양식처럼 꾸며 놓았다.
성당 아래에는
경복궁 후원처럼 아미산(峨嵋山, 교태전(交泰殿)의 후원에 조성한 가산(假山)을 꾸며 놓아
화담(담장), 굴뚝, 화계(계단을 만들고 꽃을 심는), 연못(현재 물은 없음), 괴석 등이 보인다.
※. 참고로 경복궁 교태전 뒷뜰 아미산 굴뚝은 보물 제 811호 이다.
아미산은 중국에 있는 산 이름 이다. 보타산, 구화산, 오대산과 함께 중국 불교 4대 명산 중 한 곳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이름을 상징적으로 붙인 것이다.
성공회 성당도 문이 닫혀 안에는 못들어가 밖에서 들여다보기만 했다.
위에서 찍은 성공회성당 사진을 빌려왔다.
한옥 형태로 불교 사찰에 가까운 모습으로 ‘외삼문-내삼문-본당-사제관’을 일렬로 배치했다
여기도 기웃 저기도 기웃하는 동안 동녘하늘엔 어느새 달이 떠올라 있고, 서녘하늘엔 노을이 붉다.
성공회 성당에서 멀지않은, 강화 경찰서 뒤에 철종 생가가 있다. 시간은 늦었지만 지나가는 길이라 대강 둘러보기로.
용흥궁(강화읍 관청리 인천유형문화재 제20호)
조선 후기 철종(1831∼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 19세까지 살던 집, 원래는 민가였지만 임금이 된 후 지금과 같은 건물을 세웠다.
탁본을 많이 한 듯,
대문 앞 골목이 좁은데다 자동차 몇 대가 주차되어 있어 넓게 찍기가 힘들다.
좁은 골목 안으로 난 대문은 닫혀있어 이곳도 안채는 둘러볼 수 없었다.
철종(哲宗)
1831년 전계 대원군(全溪大院君)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조선왕조 제 25대 왕이 되었다. (재위 기간 1849~1863)
이름은 이원범(李元範).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恩彦君)의 손자,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는 헌종과 이원범 두 사람뿐이었다.
1844년(헌종 10) 형 회평군 명(懷平君 明)의 옥사로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 왕족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고 농사를 짓고 살았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 純祖妃, 金祖淳의 딸)의 명으로
갑자기 궁중에 들어와 헌종의 뒤를 이어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봉영의식(奉迎儀式)을 행한 뒤 6월 8일덕완군(德完君)에 봉해졌다.
이어 이튿날인 6월 9일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에서 관례(冠禮)를 행한 뒤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정조의 손자, 순조의 아들로 왕위를 계승, 이 때 나이 19세였다.
농사 짓고 살며 나이가 어려 정치에 어두워 1852년부터 대왕대비 순원 왕후가 수렴청정을 했으며,
1851년(철종 2) 9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明純王后)로 맞아들였다.
장인인 김문근은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어 왕을 돕게 되니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또다시 계속되어 강화도령은 자기 나름대로의 정치를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그렇게 안동 김씨 세력에 의해 번번이 좌절을 겪게 되자, 결국 향락에 빠져 살다 건강이 나빠져 1863년에 세상을 떠났다.
철종은 ‘강화 도령’이라고 불렸다. 왕족이지만 왕족의 지위를 누리지 못한 처지를 빗댄 표현이다.
혈육으로는 궁인 범씨(范氏) 소생의 영혜옹주(永惠翁主)가 있어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에게 출가했을 뿐 후사가 없었다.
묘호는 철종(哲宗), 능호는 예릉(睿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 원당리에 있다.
용흥궁은 지나는 길에 둘러보고, 버스 터미널을 향한다.
지인의 카페 오픈 축하해 주러 갔다가 강화도까지 가 여기저기 둘러 본 후 날이 어두워진 후에야 강화도를 떠난다.
지금은 우회도로가 생기고 길도 많이 넓어졌지만, 예전에는 가족들과 강화도에 가 하루 보내고 귀가 시에는
좁은 도로에 정체현상으로 시간이 많이 걸려 일부러 저녁까지 먹고 늦은 시간에 귀가하곤 했었다.
강화대교 건너 맛집으로 소개해준 집 들려 저녁식사까지 마친 후 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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