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차 5월 14일(土)
성모 발현지로 유명한 『메주고리예』로 이동 [ 약 2시간]
순례자를 위해 열려 있는 【성야곱성당】
예수님 다리에 성수가 흐르는 【청동예수상】 등 관광
♡성모발현지 순례지의 【메주고리예】
1981년 6명의 아이들에게 나타나 평화의 메세지를 전달하였다는 성모 발현지로 알려져있다.
현재까지도 전세계에서 모여드는 순례자들로 북적인다.
순례자들을 위해 매일 저녁 마사가 열리는 성 야곱 성당과 평화의 성모상,
치유의 은사가 있다는 청동의 예수상 다양한 순례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헤르체고비나 수도 였던 『모스타르』로 이동 [ 약 50분]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인 【스타리모스트】
매력적으로 깔린 돌길을 따라 【구시가지 관광】 등 관광
크로아티아의 항구도시 『시베닉』로 이동 [ 약 3시간
호텔 투숙 및 휴식
두브르브니크 아드리아 호텔에서 바라본 모습.
아침 식사 후 내다보니 어제 저녁에도 안보이던 크루즈선이 보인다.
이동하려니 또 비가 내린다. 이곳 발칸 지역에 와 버스타고 이동 중 비 내린는 경우가 여러번 있었다.
3년 전 오클랜드에서 본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크루즈선 만큼 커 보인다.
보스니아를 향해.
다리를 건너며 두브로브니크와 작별, 우리도 떠나고 정박했던 크루즈선도 떠나고.
두브로브니크는 15~6세기에 무역 전성기였다.
어제 오전 두브로브니크로 달려오며 잠시 쉬었던 보스니아 휴게소가 보인다.
해안길이가 21Km에 불과한 네움 마을로 인해 내륙국가를 면한 보스니아.
산과 바다 마을이 잘 어우러진 네움마을은 가파란 언덕과 모래사장이 있는 해변, 그리고 거대한 관광호텔등이 있다.
인접한 크로아티아에 비해 물가가 싸기 때문에 쇼핑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관광 산업과 교역은 이 지역의 경제 발전을 선도하고 있다. 크로아티아와의 월경 심사는 비교적 간단하다.
네움의 관광 산업은 거의 바닷가에 집중되어 있다. 네움 내륙 지방에는 풍부한 고고학적 역사및 때묻지 않은 자연 지대가 있다.
네움의 여름은 길고 따뜻하고, 겨울은 짧고 혹독하다. 네움은 연 일조량이 가장 많은 해안지방중 하나이고,
크로아티아인 87.6%, 세르비아인 4.9%, 보스니아 이슬람교도 4.7% 구 유고슬라비아 출신 2.1%, 기타 0.7% 등 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좁은 회랑을 통해 아드리아 해의 네레트바 해협에 있는 네웅에서 바다와 맞닿아 있으며,
이 회랑이 크로아티아 달마치야 해안 가운데 두브로브니크 북서쪽 약 40km 가량의 지역을 크로아티아 본토로부터 갈라놓았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의 역사적·지리적 위치뿐만 아니라
여러 인종으로 이루어진 국민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오랫동안 민족주의의 영토 확장 열망에 불붙기 쉽게 만들었다.
오늘 일정은 성모 발현지인 메주고리에를 먼저 들린후 헤르체고비나 수도였던 모스타르로 갈 예정 이었으나
모스타르를 먼저 들린 후 메주고리에로 가기로 한다.
크로아티아 국기가 보이는 보스니아와의 국경. 보스니아 입국.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유럽 동남부와 발칸반도 서부에 위치하며, 수도는 사라예보이다.
국민 구성은 이슬람교도(48%), 세르비아인(37%), 크로아티아인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종교 또한 이슬람교(40%), 세르비아정교(31%), 로마가톨릭이다.
동쪽으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와 경계를 이루며, 3면을 크로아티아가 둘러싸고 있다.
1918년 새롭게 건국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에 통합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1991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분리 이후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독립을 얻었다. 하지만
나라는 바로 더욱 확대된 유고슬라비아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세르비아인들은 대부분 정교회 교도로 키릴 문자를, 크로아티아인들은 로마 가톨릭교도로 라틴 문자를 사용한다.
이슬람교도들의 선조는 오랜 투르크(오스만 제국)의 지배 기간동안 이슬람교로 개종한 슬라브인이다.
로마에 정복당한 후 이 지역 대부분이 로마 제국의 달마치야 속주에 포함되었고 6세기 후반에는 슬라브인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10세기에 보스니아는 차슬라브 공이 다스리는 세르비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960년경 그가 죽은 후 크로아티아 왕국으로 넘어갔고 1018년 이후 비잔틴의 지배하에 놓였다.
12세기 헝가리 왕국은 일련의 도독(都督) 또는 총독을 통해 이 지역을 지배하기 시작했으나
이 시기동안 보스니아는 국력이 커지고 독립국의 지위를 누렸다.
1322년 보스니아인 스테판 코트로마니치가 도독으로 선출되었고 14세기 나머지 기간 동안 코트로마니치 왕조,
특히 스테판의 조카인 트브르트코 1세의 지배하에서 세르비아 왕국의 훔 속주와 아드리아 해안의 많은 지역까지 보스니아의 영토를 넓혔다.
1386년 오스만 제국인(투르크)이 보스니아를 침략했으며 수차례의 전투 후 1463년 투르크령으로 만들었다.
보스니아는 투르크의 지배하에서 경제적으로 쇠퇴해갔다.
훔 속주는 세인트 사바의 '헤르체그'(공작)라고 스스로 명명한 지배자들하에서 속주를 오랫동안 유지하였는데,
헤르체고비나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16∼17세기 투르크와 합스부르크왕가·베네치아의 끊임없는 전쟁에서 보스니아는 투르크의 중요 전초기지였다.
이 시기에 주민 대부분이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오스만 제국이 유럽에서 밀려남에 따라 보스니아에 대한 이들의 지배는 점차 부담스러워 졌고,
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교도 모두 콘스탄티노플(오스만 제국의 수도, 지금의 이스탄불)로부터의 간섭을 반기지 않게 되었다.
1877∼78년 러시아-투르크 전쟁 후 베를린 회의에서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는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투르크령이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정복지로 인정되었고 1908년 10월 7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합병되었다.
건물의 총탄 자국.
새로운 헌법에 따라 유권자를 3개의 선거인단으로 나누고
각 선거인단 내에 일정한 비율로 정교회, 로마 가톨릭교, 이슬람교의 의석을 할당했다.
이러한 결정은 증폭되고 있는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고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 출신의
세르비아계 학생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이 사건으로 제1차 대전이 야기 되었다.
모스타르지역 도착하여 하차.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는 1918년 10월 26일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의 일부로서 세르비아에 합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계 공산정권의 인종학살정책으로 극도의 고통을 겪었고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두 지역은 1946년 유고슬라비아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1989∼90년 공산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도 유고슬라비아를 휩쓴 민족주의 물결에 휘말렸다.
1991년 크로아티아가 연방을 탈퇴한 후 보스니아의 크로아티아계와 이슬람계는 다민족 공화국 수립을 요구하는
국민투표 실시에 찬성했으나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는 실직적으로 세르비아가 주도해온 유고슬라비아로부터의 독립을 반대했다.
1992년 이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내전으로 인해 황폐화되었고,
이 기간동안 각 민족들이 자신들이 차지한 지역에서 타인종을 일소하는 '인종청소'가 자행되었다.
세르비아계는 북쪽과 동쪽의 대부분을, 크로아티아계는 서부를, 이슬람계는 중부 및 북서부의 도시를 차지했다.
1995년 12월 평화협정 조인으로 내전이 끝나고 이 협정에 따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이슬람계-크로아티아계 연방과 세르비아계 공화국으로 분할되었다.
'92~'95년 내전당시 총탄 자국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보스니아 모스타르 첫 방문.
종탑이 있는 디자인이 아름다운 성당을 지나고.
모스타르 구시가지를 향하여.
전쟁의 상흔이 아직도 그대로.
비가 내리고 있어 강물이 흙탕물 이다.
모스타르(Mostar)는 헤르체고비나 지역의 가장 큰 도시로 네레트바 강에 자리잡고 있으며,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는 사라예보 다음으로 잘 알려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을 구성하는 주 가운데 하나인 헤르체고비나네레트바 주의 주도이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세르비아인도 상당히 거주하고 있었으나
전쟁 이후 대부분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으며 지금은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이 도시를 절반씩 차지하고 있다.
전쟁 후 도시는 국가적인 평등 정책 아래 다스려진 상태이다.
200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석재로만 이루어진 스타리모스트 다리 건너기.
모스타르는 네레트바 강 바로 위 다리를 지켰던 "다리 파수꾼들"을 뜻하는 mostari로 이름이 지어졌다.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동안에 다리가 건설되었고 모스타의 상징들 중 하나가 되었다.
다리는 1993년 11월 9일 10시 15분 보스니아 전쟁 기간 동안 크로아티아 방위 평의회 부대에 의해 파괴되었다.
당시 크로아티아 군대의 사령관이었던 슬로보단 프랄랴크(Slobodan Praljak)는
다리의 파괴를 명령한것에 대해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보스니아에서 모스타르를 찾은 이유는 '스타리 모스트'를 보기 위함이다.
스타리모스트는 1566년 발칸 전쟁 후 오스만 제국의 화려한 황제 '쉴레이만의 명에 따라 건설 되었다.
아치형 다리 북동쪽과 남서쪽에 탑이 2개 있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가 있다.
400 여년간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아오던 다리가 1993년 11월 9일 전쟁기간동안 크로아티아 포병대에 의해 파괴 되었다.
다리의 예술성과 역사성 외에 이민족간 화해의 상징성이 인정을 받아 국제사회와 유네스코가 적극적인 후원을 하여
2004년 7월 재건축 되어 개통 하였고, 200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 되었다.
다리의 복원과정에 원래의 다리와 가장 유사한 같은 석재와 같은 공법으로 사용키로 하고
자국내의 테넬리아석(Tenelia stone)을 오스만 공법으로 사용하는 터키 건설회사에 의해 건설 되었다.
구시가지 좁은 골목 바닥은 돌이 깔려 인상적이다.
다리를 건너면 무슬림들이 살았던 지역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터키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라 독특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돌로 장식된 바닥과 기념품 가게들이 인상적이다
전통시장에서 장신구나 악세사리 쇼핑도 하고.
보스니아 모스타르에서 현지식 점심식사.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인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
스타리 모스트(Stari Most) 는 '오래된 다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모스타르의 상징과도 같은 장소 이다.
오스만 투르크가 이 지역을 점령한 뒤 네레트바 강을 건너기 위한 다리로 1557년 건설을 시작했으며,
9년의 건축 기간을 거쳐 1566년 완공되었다.
당시에는 아치 하나로 세계에서 가장 긴 단일 구간의 거리를 연결하는 다리였으며,
석재만 이용해 만들어진 거대한 아치는 당시 오스만 투르크의 건축 기술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다리의 폭은 4m, 길이는 30m이며, 네레트바 강에서 터의 높이는 약 24m이다.
유럽을 휩쓴 여러 번의 전쟁 속에서도 건재했던 스타리 모스트는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크로아티아의 포격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후 유네스코의 지원으로 복구되었으며, 200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비가 내려 강물이 흙물로 변했다.
스타리 모스트의 명물 중 하나는 매년 7월의 마지막 일요일에 벌어지는 다이빙 대회라고 한다.
네레트바 강은 유속이 빠르고 수온이 상당히 찬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숙련된 다이버가 아니면
스타리 모스트에서 쉽게 다이빙을 하기 어렵다고.
비가 많이 내려 식사한 음식점에서 스타리모스트를 배경으로.
우리가 식사한 음식점에서 보는 조망은 다리 전체를 온전히 볼 수 있어 좋았다. 물빛이 변한 것만 빼고는.
돌 바닥이 인상적인 구시가지.
스타리 모스트 다리 위에서 기념 남기기 바쁜 관광객들.
낯선이가 찍어주겠다며 카메라를 달랜다. Thank You~
다리폭이 좁아 멋지게 직기도, 찍히기도 힘들다.
Don't Forget.(잊지 마세요.)
우리나라에서도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포스터 그림 아래 꼭 등장하는 말. "잊지말자 6.25, 상기하자 6.25"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아이를 보니 옛날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우리나라에서도 전쟁 치른 후 무슨 말인지도 모르며 미군을 보면 "기브미 조촐렛" 또는 "기브 미 껌" 을 외쳤던...
모스타르에서 나와 메주고리에로 이동.
메주고리에(Medugorje)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서남부, 치트룩시에 속한 가톨릭 교회 소교구(小敎區) 명칭이자, 교구 내에 속한 마을 이름이기도 하다.
애초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한적한 농촌이었으나, 1981년 성모마리아가 나타났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가톨릭 신도들의 순례지이자 관광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메주고리에는 슬라브어로 ‘산과 산 사이의 지역’이라는 뜻으로,
실제로 해발 200미터 높이의 산악에 위치하고 있으며, 교구 전체 인구가 약 4300명 정도다.
1981년 6월 여섯 아이들이 마을 외곽의 크르니카라는 언덕 위에서 성모 마리아를 보았다고 주장해 세계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처음 목격자는 두 명이었으며, 이후 수 차례에 걸쳐 여섯 명의 아이들에게 나타나 기도와 평화의 메시지 등을 전했다는 주장이었다.
아이들의 성모 발현 주장을 놓고 가톨릭 교회와 과학 및 의학계에서 다양한 조사가 진행되었다.
현재까지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은 부정적이다.
가톨릭 내부 법규에 따라서 해당 교구 주교가 조사하여 1차 결론을 내리게 되는데,
이곳 주교가 “초자연적인 존재의 발현으로 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다만 교황청의 직접 조사 가능성을 열어두었으나, 2006년 현재까지 교황청은 어느 쪽으로도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있다.
신도들의 메주고리예 여행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순례는 금하지만 개인적인 여행은 허락한다는 입장이다.
가톨릭 교회의 공식 입장이 성모 발현을 부정하고 있지만, 일반 가톨릭 신자들은 이곳을 성모발현 성지로 인정하는 경향이 짙다.
방문객이 많아지자 작은 산골 교구 메주고리예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현재는 주차시설과 숙박시설, 상가가 들어서 제법 관광지다운 면모를 보이고 있다.
현재 이곳을 방문하는 이들은 성모가 발현했다는 언덕뿐 아니라,
십자가의 길,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 교구 교회 및 그 앞의 평화의 성모상 등 다양한 볼거리들을 볼 수 있다.
인근 십자가산의 콘크리트 십자가도 이곳의 명물이다.
1933년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우박을 동반한 폭풍우가 멈춘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세운 것으로,
14톤의 콘크리트를 사용해 만들었으며 해발 520미터 높이의 산 위에 서 있다.
메주고리에는 여러 나라에서 오는 순례자들을 위해 다국어를 지원하고 있으며,
화장실 벽화까지도 종교적인 의미를 담아 성모 발현지로서의 면모에 충실을 기하고 있다
산악지대를 거쳐 달려와 길가에 차가 즐비한 걸 보니 가톨릭 신도들의 순례지이자 관광지인 메주고리 임을 금방 알수 있겠다.
순례자를 위해 열려 있는 【성야곱성당】
성 야곱성당 옛 본당 건물은 1892년에 건축되고 1897년 완공, 이후 붕괴 위험이 있어
1934년 공사시작, 1969년 1월 새 성전 봉헌식. 그리고 순례자들의 수호성인인 성 야곱사도에게 봉헌 되었다.
안내도.
십자가상 순례지.
이곳이 순례지가 되기까지의 가이드 설명.
위 사진 윗쪽 그림은 '십자가의 길(Via dolorosa)' 14처 중 일부 이다.
성당이나 성지에 가면 그림이나 구조물 또는 조각 등으로 14 장면을 묘사해 놓고 았다.
예수님이 본시오 빌라도로부터 판결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숨을 거두신
골고타 언덕에 이르는 동안 열 네군데 가슴 아픈 장소가 있는데, 보통 14처라 한다.
십자가의 길(Via dolorosa) 기도를 하는 신심은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다.
1처, 예수님께서 사형선고 받으심을 묵상. 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묵상.
3처, 예수님께서 넘어지심을 묵상. 4처, 예수님과 성모 서로 만나심을 묵상.
5처, 시몬이 예수를 도와 삽자가 짐을 묵상. 6차, 베로니카, 수건으로 예수의 얼굴을 닦아드림을 묵상.
7처, 기력 다하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 8처, 예수, 예루살렘 부인들을 위로 하심을 묵상.
9처, 예수, 세 번째 넘어지심을 묵상. 10처, 예수님께서 옷 벗감 당하심을 묵상.
11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을 묵상. 12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심을 묵상.
13처, 제자들이 예수님 시신을 십자강서 내리심을 묵상. 14처,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심을 묵상.
메주고리예에 있는 성 야곱 성당은 교구성당으로 2000년에 완공.
메주고리예는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에서 독립한 여섯 나라 가운데 하나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있는 작은 마을 이다.
야외에서도 미사를 볼 수 있도록 많은 의자가 준비되어 한꺼번에 5,000 여명이 미시을 드릴 수 있다.
'너릐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라는 한글도 보인다.
성 야곱성당 내부.
예수님 다리에 성수가 흐르는 【청동예수상】
청동 예수상 무릎 부근 작은 구멍에서 성수가 흘러 이물을 적셔 아픈 곳에 대면 낫는다고 하여 치유의 예수상이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성수를 받기 위해 줄을 긹게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보스니아 모스타르와 메주고리에를 둘러본 후 다시 크로아티아를 향해 고속도로을 이용한다.
최근 건설된 고속도로.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국경 통과.
크로아티아의 항구도시 『시베닉』으로 이동 약 3시간
크로아티아 시베닉 올림피아 호텔 도착.
호텔도착하니 환영의 의미로 쥬스 한 잔씩 제공.
호텔에 들어와 저녁 식사.
우리가 묵는 호텔에서 결혼식이 열리고 있어 잠깐 들여다 본 모습.
호텔 투숙 및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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