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왔다
류근
가을이 왔다
뒤꿈치를 든 소녀처럼 왔다
하루는 내가 지붕 위에서
아직 붉게 달아오른 대못을 박고 있을 때
길 건너 은행나무에서 고요히 숨을 거두는
몇 잎의 발자국들을 보았다
사람들은 황급히 길에 오르고
아직 바람에 들지못한 열매들은
지구에 집중된 중력들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우주의 가을이 지상에 다 모였으므로
내 흩어진 잔뼈들도 홀연 귀가를 생각했을까
문을 열고 저녁을 바라보면 갑자기 불안해져서
어느 등불 아래로든 호명되고 싶었다
이마가 붉어진 여자를 한번 바라보고
어떤 언어도 베풀지 않는 것은 가을이
이제 막 시작됐다는 뜻
안경을 벗고 정류장에서 조금 기다리는 일이
그런데로 스스로에게 납득이 된다는 뜻
나는 식탁에서 검은 옛날의 소설을 다 읽고
또 옛날의 사람을 생각하고
오늘의 불안과
미래로 가는 단념 같은 것을 생각한다
가을이 내게서 데려갈 것들을 생각한다
가을이 왔다 처음 담을 넘은 심장처럼
덜컹거리며 빠르게,
그 누구도 따르지 못할 망설임으로
왔다
―류근 시집, 『어떻게든 이별』 (문지, 2016)
대로변 키 작은 잡초 조차
알록 달록 변신하는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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