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11월의 시 모음

opal* 2022. 11. 1. 23:30

 

11월의 시 

                                  임영준

 모두 떠나는가

 텅 빈 하늘아래
추레한 인내만이
선을 긋고 있는데
훌훌 털고 사라지는가

 아직도 못다 지핀
詩들이 수두룩한데
가랑잎더미에
시름을 떠넘기고

 굼뜬 나를 버려둔 채
황급히 떠나야만 하는가 

 


11월의 시

                                  이재곤

맺히고,
익어서
지닐 수 없을때
텅텅 비워
빈몸으로라도 울리라

다시,
또 다시 살아도
지금같을 삶이 슬퍼서
그때도 지금 같이 울리라

눈에 들여도
가슴에 들여도
채워지지 않는 삶의 한 토막
슬퍼서 너무슬퍼서

텅텅 비워
빈몸으로라도 울리라


 

십일월 

                                            이정림 


​바람에
낙엽이 흩어지고 또 날린다.
찌푸린 하늘은 할미꽃
떨어져 날리는 잎사귀마냥 모두들 바쁘다.
푸시시한 얼굴에 초겨울 그림자가 스치고
쪼달림의 모습 모습이다.

잘 익은 밤나무
밤톨 한 알 없이 다 털리고
주황색 감나무에
달랑 까치밥 한 알뿐이다.

뿌연 하늘이 멍하니 내려 보이는 빈 벌판
허허로운 허수아비
심장도 멈추었다.

소용없는 바람만이 차가워서 흐느끼고
코스모스와 들국화도 흑흑 따라서 운다.
멀거니 할미꽃도 운다.
모두들 앙상하게 남아서 운다.

 


 11월에

                                           이해인 

​나뭇잎이 지는 세월
고향은 가까이 있고

​나의 모습 더없이
초라함을 깨달았네

​푸른 계절 보내고
돌아와 묵도하는 생각의 나무여

​영혼의 책갈피에
소중히 끼운 잎새
하나하나 연륜헤며
슬픔의 눈부심을 긍정하는 오후

​햇빛에 실리어 오는
행복의 물방울 튕기며
어디론지 떠나고 싶다.

​조용히 겨울을 넘겨보는
11월의 나무 위에
연처럼 걸려 있는
남은 이야기 하나

​지금 아닌
머언 훗날
넓은 하늘가에
너울대는
나비가 될 수 있을까

​별밭에 꽃밭에
나뭇잎 지는 세월
나의 원은 너무 커서
차라리 갈대처럼
야위어 간다.

 

 11월의 나무처럼

                                              이해인

​사랑이 너무 많아도
사랑이 너무 적어도
사람들은 쓸쓸하다고 말하네요

​보이게
보이지 않게
큰 사랑을 주신 당신에게
감사의 말을 찾지 못해
나도 조금은 쓸쓸한 가을이예요

​받은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내어놓는 사랑을 배우고 싶어요
욕심의 그늘로 괴로웠던 자리에
고운 새 한 마리 앉히고 싶어요

​11월의 청빈한 나무들처럼
나도 작별 인사를 잘하며
갈 길을 가야겠어요 

 



11월의 기도

                               이임영 

 어디선가 도사리고 있던
황량한 가을 바람이 몰아치며
모든 걸 다 거두어가는
11월에는 외롭지 않은 사람도
괜히 마음이 스산해지는 계절입니다

​11월엔 누구도
절망감에 몸을 떨지 않게 해 주십시오
가을 들녘이 황량해도
단지 가을 걷이를 끝내고
따뜻한 보금자리로 돌아가서
수확물이 그득한 곳간을 단속하는 
풍요로운 농부의 마음이게 하여 주십시오

​낮엔 낙엽이 쌓이는 길마다
낭만이 가득하고
밤이면 사람들이 사는 창문마다
따뜻한 불이 켜지게 하시고
지난 계절의 추억을 이야기하는
사랑의 대화 속에
평화로움만 넘치게 하여주소서

​유리창을 흔드는 바람이야
머나먼 전설 속 나라에서 불어와 
창문을 노크하는 동화인양 알게 하소서! 

 


11월에 꿈꾸는 사랑

                                           이채 ​

 천 번을 접은
가슴 물소리 깊어도
바람소리 깃드는 밤이면
홀로 선 마음이 서글퍼라​

 청춘의 가을은 붉기만 하더니
중년의 가을은 낙엽 지는 소리
옛 가을 이젯 가을 다를 바 없고
사람 늙어감에 고금이 같거늘
나는 왜, 길도 없이
빈 들녘 바람처럼 서 있는가​

 모든 것이 그러하듯
영원한 내 소유가 어디 있을까
저 나무를 보라
가만가만 유전을 전해주는
저 낙엽을 보라​

 그러나
어느 한순간도
어느 한 사람도
살아감에 무의미한 것은 없으리
다만 더 낮아져야 함을 알뿐이다

 


햇살 공양

                                       이정모

가을 산이 자꾸 붉어지고 있다

올라야 할 허공은 더 이상 설레지 않고
바람을 타고 일어서려다 금세 무너지는 낙엽

이젠 아무도 이름 부르지 않는 영혼이
허공의 손길을 벗어나
출렁,
다음 생에 내려 앉는다

보이지 않는 공중의 손이
제 생명으로 다리를 놓는 것인지
묻지 않으니 바람도 묻지를 않는데

누가 퍼붓는지 모르면서
왜 나는 노란 평화를 햇살 공양 받으며
가난한 산의 말을 줍고 있는가

더 이상 발기하지 않는 가을 숲은
감찰나무 마지막 도토리를 뱉어내고

수많은 전생을 거쳐왔을 11월의 몸은
바람마다 피를 흘리겠지만

나는 아무도 걷어 가지 않는 파장의 이 계절을
뷹어지는 데 한생을 다 써버린
장미의 디스토피아에 두고 올 것이다

얼마간
나는 간절하지 못한 죄목으로
이 서러움의 서식지에 바쳐질 것이므로 

 


11월 안부

                                        최원정 

황금빛 은행잎이 
거리를 뒤덮고 
지난 추억도 갈피마다 
켜켜이 내려앉아 
지나는 이의 발길에 
일없이 툭툭 채이는 걸 
너도 보았거든 
아무리 바쁘더라도 
소식 넣어 
맑은 이슬 한 잔 하자 
더 추워지기 전에 
김장 끝내고 나서

 


11월

                           나태주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많이 와버렸고
버리기에는 차마 아까운 시간입니다.

​어디선가 서리맞은 어린 장미 한 송이
피를 문 입술로 이쪽을 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낮이 조금 더 짧아졌습니다.
더욱 그대를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11월 

                              오세영   

 지금은 태양이 낮게 뜨는 계절, 
돌아보면 
다들 떠나갔구나 
제 있을 꽃자리 
제 있을 잎자리 
빈들을 지키는 건 갈대뿐이다. 
상강(霜降) 
서릿발 차가운 칼날 앞에서 
꽃은 꽃끼리, 잎은 잎끼리 
맨땅에 
스스로 목숨을 던지지만 
갈대는 호올로 빈 하늘을 우러러 
시대를 통곡한다 
시들어 썩기보다 
말라 부서지기를 택하는 그의 
인동(忍冬) 
갈대는 
목숨들이 가장 낮은 땅을 찾아 
몸을 눞힐 때 
오히려 하늘을 향해 선다. 
해를 받든다

 

 



11월

                                      최갑수

​저물 무렵 마루에 걸터앉아
오래 전 읽다 놓아두었던 시집을
소리내어 읽어본다
11월의 짦은 햇빛은
뭉툭하게 닳은 시집 모서리
그리운 것들
외로운 것들, 그리고 그 밖의
소리나지 않는 것들의 주변에서만
잠시 어룽거리다 사라지고
여리고 순진한
사과 속 같은 11월의 그 햇빛들이
머물렀던 자리 11월의 바람은 또 불어와
시 몇 편을 슬렁슬렁 읽어내리고는
슬그머니 뒤돌아서 간다
그 동안의 나는
누군가가 덮어두었던 오래된 시집
바람도 읽다 만
사랑에 관한 그렇고 그런
서너 줄 시구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길을 걷다 무심코 주워보는 낙엽처럼
삶에 관한 기타 등등이 아니었을까,
시집을 덮고 고개를 들면
더 이상 그리워할 일도
사랑할 일도 한 점 남아 있지 않은
담담하기만 한 11월의 하늘
시집 갈피 사이
갸웃이 얼굴을 내민 단풍잎 한 장이
오랜만에 만난 첫 사랑처럼
낯설고 겸연쩍기만 한데

  

11월

                                       이서린

​낙엽처럼 불면이 쌓이는 날이 많아졌다
종종 새벽녘에 비가 흩뿌리는 날
생각보다 오래 살았다는 느낌에
유서 같은 일기를 두서없이 쓰기도 한다

​가끔 안주도 없이 술을 털어 넣듯 마시다
미친 듯이 밤길을 휘적휘적 걷다가
한 사람 안에 웃고 있는 또 한 사람을 생각하다
모든 걸 게워내듯 오래오래 울기도 하는

​아침이면 퉁퉁 부은 눈으로
식구들의 밥을 차리고
빨개진 눈으로 배웅을 하고
꾸역꾸역 혼자 밥 먹는, 이 슬픈 식욕
그래도 검은 커피를 위로 삼아
마당에 빨래를 넌다

​조금씩 말라가는 손목은 얇은 햇빛에 맡기고
흐르는 구름을 보다 눈을 감으면
툭, 떨어지는 감나무 잎
세상은 저렇게 떠나야 하는 것
조만간 가야 할 때를 살펴야 하는 것

​길어지는 그림자를 보며
지는 해는 왜 붉은가 생각하다가
흉터는 왜 붉은가를 생각해보는
이대로 증발하고 싶은 저무는 하늘
아직 살아 있는 내가
찬물에 손을 담고 쌀을 씻는다

 

11월

                                   고 은

낙엽을 연민하지 말아라
한자락 바람에
훨훨 날아가지 않느냐
그걸로 모자라거든
저쪽에서
새들도 날아가지 않느냐
보아라 그대 마음 저토록 눈부신 것을...

 


11월 

                                      나희덕​

바람은 마지막 잎새마저 뜯어 달아난다 
그러나 세상에 남겨진 자비에 대하여 
나무는 눈물 흘리며 감사한다 ​

길가의 풀들을 더럽히며 빗줄기가 지나간다 
희미한 햇살이라도 잠시 들면 거리 마다 
풀들이 상처를 널어 말리고 있다 ​

낮도 저녁도 아닌 시간에 
가을도 겨울도 아닌 계절에
모든 것은 예고에 불과한 고통일 뿐 ​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있지만 
모든 것은 겨울을 이길 만한 눈동자들이다 

 


11월 

                                         이외수

세상은 저물어 길을 지운다

​나무들 한 겹씩 
마음 비우고

​초연히 겨울로 떠나는 모습
독약 같은 사랑도 문을 닫는다.

​인간사 모두가 고해이거늘
바람은 어디로 가자고
내 등을 떠미는가

​상처 깊은 눈물도 
은혜로운데
아직도 지울 수 없는 이름들

​서쪽 하늘에 걸려
젖은 별빛으로 흔들리는 11월

  

11월의 나무

                                 김경숙

​가진 것 없지만
둥지 하나 품고
바람 앞에 홀로 서서

​혹독한 추위가 엄습해도
이겨낼 수 있는
튼튼한 뿌리 있어

​비워낸 시린 가지
천상 향해 높이 들고

​흩어진 낙엽 위에
나이테를 키우는
11월의 나무

 

11월의 노래

                                     김용택 

 해 넘어가면 당신이 더 그리워집니다
잎을 떨구며 피를 말리며
가을은 자꾸 가고
당신이 그리워 마을 앞에 나와
산그늘 내린 동구길 하염없이 바라보다
산그늘도 가버린 강물을 건넙니다 

 내 키를 넘는 마른 풀밭들을 헤치고
강을 건너 강가에 앉아
헌옷에 붙은 풀씨들을 떼어내며
당신 그리워 눈물납니다
못 견디겠어요
아무도 닿지 못할 세상의 외로움이
마른 풀잎 끝처럼 뼈에 스칩니다 

 가을은 자꾸 가고
당신에게 가 닿고 싶은
내 마음은 저문 강물처럼 바삐 흐르지만
나는 물 가버린 물소리처럼 허망하게
빈 산에 남아 억새꽃만 허옇게 흔듭니다
해 지고 가을은 가고 당신도 가지만
서리 녹던 내 마음의 당신 자리는
식지 않고 김납니다 

 


11月의 저녁

                                     김 억

바람에 불리우는
옷 벗은 나무 수풀로
작은 새가 날아갈 때,
하늘에는 무거운 구름이 떠돌며
저녁해는 고요히도 넘어라.

고요히 서서, 귀 기울이며 보아라,
어둑한 설은 회한은 어두워지는 밤과 함께,
안식을 기다리는 맘 위에 내려오며,
빛깔도 없이, 핼금한 달은 또다시 울지 않는가.
나의 영이여, 너는 오늘도 어제와 같이,
혼자 머리를 숙이고 쪼그리고 있어라.

 


11월을 보내며

                                정아지

어디쯤 가고 있는지
늘 목에 가시 되어
남아 있는 가을

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덩달아 통곡을 하게 하고

어디쯤 오고 있는지
내 아픈 겨울
힘들게 오르는 가파른 언덕 길

늦은 가을 국화 한 송이
눈물새 울음 배어 목이 쉬는데

어느 시간 속에 건 찾아내어
함께 있자 한다
함께 있자 한다 

 


11월의 선물 

                               윤보영

​사람과 사람사이에
정이 흐르는 11월입니다

​가을이 봄과 여름을 데리고
우리 곁을 지나가고 있다고
겨울을 데리고
12월이 가까이 있다고

​올해도
또 가지 끝에 남아있다
떨어진 나뭇잎처럼
의미없이 지나가게 될 11월

​홀로선 나무줄기에는
이미 봄이 오고 있고
​씨앗을 품고 있는 대지도
새싹 튀울 꿈어 젖어 있는

​그대와 나
그리고
우리 안에도
따뜻한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이제 차 한 잔에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시간으로 채워

​11월 마지막 날에
내가 나에게 선물하겠습니다.
그리고 행복을 선물받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윤동주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겁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에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상처주는 말과 행동을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꿔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놓은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후회없는 삶을 위하여...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겁니다.

                                                 *이 시(詩)는 중증뇌성마비 장애인 김준엽 시인의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이 원작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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