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는 왔는데 잡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놓치자니 아깝고 가자니 힘들고.
내게 그보다 더 무서운건 이 시기에 무박이라는 사실이다. 누구나 그렇지만, 내겐 더욱 더 피로는 금물이다.
달포 전 지리산의 무박 산행 때 거림까지 혼자 미리 가서 1박 했듯이 이번에도 오색으로 미리 가서 1박을 할까? 말까?
뒤 늦게 취미생활을 산행으로 바꾸고 나니 이것도 고민이 많다.
정보를 알기위해 먼저 다녀온 분께 문자를 보내니 요즘은 단풍철이라 사람이 많아 오를 수가 없으니
다음 기회에 가면 어떻겠느냐는 답이 온다. 오늘만 날이 아니고, 산은 그곳에서 항상 기다려주고 있으니 생각 잘하란다.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점점 더 힘들어질 텐데 나더러 다음 기회로 미루라고?
차라리 묻지 말걸 그랬나? 갈등만 더 보태졌으니. 혈기왕성했던 그 패기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22:00. 묵직한 마음의 각오 한 보따리를 싸들고 출발. 목 베개, 무릎담요, 등받이 쿠션을 모두 제자리에 배치시키고 잠을 청한다.
차 안의 불빛은 모두 차단시켰지만 맞은편에서 들어오는 불빛과, GPS에서 계속해서 기사님에게 들려주는 속닥거림은
어쩔 도리가 없다. 앞자리의 불편함이 이럴 때 나타나지만 맨 바닥 통로에 앉아 계시는 대장님들도 있다.
01:00. 어디쯤인지 분간도 못하게 어두운데 모두 밖으로 내 쫓는다. 빨간 토끼눈을 하고 내려서니 조각공원.
기사님께 물으니 인제란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총무님이 끓여 오신 뜨거운 누룽지탕을 호호 불어 가며...
감사히 야식을 먹는다. 한 밤중이라 먹기 싫어도 공식이니 어쩔 수가 없다.
02:00. 다시 소등시키고... 조금 더 달리니 몸이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운다. 한계령을 오르는가 보다.
어두운 한계령에 마당에 불빛에 차가 많이 보인다. 구불거리는 캄캄한 내리막 길을 새색시 걸음인냥 조심조심 내려선다.
거의 다 내려서니 선두 대장의 멘트 한마디가 나를 겁먹게 한다. “7시까지 소청에 도착하시는 분만
공룡능선으로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 시간까지 못 오시는 분은 2진대장님과 소청에서 구곡담계곡으로 하산해 주세요.“
02:40. 오색 도착. 밖에서 들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복잡함을 알린다. 차에서 내려 먼저 도착한 팀들의 줄서기에
뒤따라 들어서니 몇 발작이나 떼어 놨을까? 앞사람 모두가 걷는 게 아니고 기다리고들 서 있다.
전국에서 모인 많은 산 꾼들로 오버 페이스는 커녕 걸을 수조차 없다. 서너 발작 떼고 쉬고 서너 발작 가다 쉬고.
차라리 헤드랜턴을 끄고 기다린다. 환한 낮이라야 사람구경이라도 하지 앞사람 뒤통수도 안 보이는 어둠속이니.
03:45. 오색에서 1.3km의 제 1쉼터. 여전히 정체 현상, 어떤 이는 되돌아 가겠다고 내려서지만 길이 막혀 그 짓도 만만치가 않다.
04:30. 앞으로 가기위해 움직이는 시간보다 서있는 시간이 길다. 머리나 손에 불 하나씩을 들고
좁고 울퉁불퉁한 오르막 돌길에 빽빽하다. 제대로 걷지를 못해 추우니 겉옷을 걸친다.
05:00. 이해가 안 된다. 서너 발자국씩 가다 서 있어야 되는 이유를... 어느 팀은 가자 커니 말자 커니
서서 의견을 나누기도 한다. 얼굴도 잘 모르는 우리일행은 한 분도 안 보인다. 모두들 어디 쯤에 뒤 섞여 있을까?
좁은 길에 차례 대로 서서 올라섰으나 새치기를 하는 이도 있고, 야금야금 틈새를 비집으며 올라섰다.
이러다 7시까지 소청은커녕 대청도 못 가겠다. 가고픈 맘에 머릿 속엔 오로지 ‘7시까지 소청’만으로 꽉 차 있다.
05:45. 설악폭포 앞. 30분전의 나무계단에선 정체가 좀 풀리는 듯하더니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2.5km 오르는데 세 시간이나 걸렸다. 안내판 그림에 대청 2.5km, 이제 겨우 대청까지 거리의 반을 왔다.
06:10. 가파른 돌계단을 치고 올라와 위로 넓게 보이는 나무계단 아래에서 잠시 쉰다. 공룡능선도 이처럼 가파르고 힘들까?
랜턴을 벗어 집어 넣는다. 날은 훤해 지는데 하늘에 구름이 많다. 사람들끼리의 간격이 벌어지고 이제야 맘 놓고 움직인다.
단풍이 제법 물들었는데 빛이 없으니 별로다. 그나저나 우리 팀 일행은 다들 어디 있을까? 여태까지 한명도 못 봤으니.
06:30. 제 2쉼터. 대청은 아직도 1.3km. 이쪽으로 하산은 두 번 해 봤어도 오르는 건 이번이 처음이며,
평일에 산행하다 휴일에 나와 좋은 경험을 한다.
07:00. 어쩐다? 소청은 커녕 대청도 500m(이정표). 공룡을 못가면 대청에서 일출이라도 볼까 했더니 그도 저도 다 안 될라나?
누가 묻지도 않겠지만, 힘이 모자라 공룡을 못 갔어도 핑계대긴 좋겠다. 허기가 진다. 십 여분을 더 오르니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사진을 찍어댄다. 조망이 제법 펼쳐지니 멀리 있는 봉우리 사이에서 뽀얀 구름이 피어오른다.
07:25. 대청봉 도착. 검은 테두리 안에 붉은 글씨로 ‘1708M, 대청봉’이라 새겨놓은 돌덩이를 잡고
사진을 찍기 위해 쟁탈전을 벌이는 듯 아우성이다. 그 와중에 끼어 모르는 이에게 부탁하여 기념하나 찍고 내려선다.
파란 가을 하늘과 푸른 산과, 바다와 흰 구름과 예쁜 단풍이 참 좋다.
중청 대피소. 여기도 초만원으로 복잡. 화장실까지도 긴 줄이 늘어서있다. 시간은 이미 늦었고 에라 모르겠다.
배고픈데 더 허기지기 전에 밥이나 먹자. 조금 담아온 밥을 뜨거운 물에 한 수저 말아 훌훌 삼킨다.
08:00. 소청을 향해 다시 행군. 좁은 내리막길을 줄서서 차례대로 걷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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