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종주기

44회, 34, 35구간 계속.

opal* 2006. 8. 15. 15:35

 

<44회, 34, 35구간 계속>

 

09:00. 고적대(1353.9m). 삼각점이 있고, 괘병산으로 가는 길도 있어 주의해야 할 바위 봉우리 이다. 사방으로 펼쳐진

조망은 좋으나 햇살이 뜨거워 얼른 그늘로 들어선다. 아침식사를 위해 도시락을 펼치니 때가 지나 그런지 힘들어 그런지

밥은 싫고 물만 먹힌다. 앞서가던 젊은 사람이 돌에 부딪쳐 무릎을 다쳤다며 몹시 힘들어 하는데 도움을 줄 수가 없어 안타깝다.

갈 길은 멀어 아직 반도 못 왔는데, 올라설 때의 수직에 가까운 만큼 내리막도 험하니 걱정된다.


지그재그로 매어진 밧줄을 잡고 내려서서 바라보니 앞에 바위산 두 개가 또 버티고 있다.

고산지대의 떡갈나무, 산철쭉, 싸리나무 등 싱싱한 활엽의 관목들이 터널을 이루며 뜨거운 햇볕을 가려주니 고맙기만 하다.


09:40. 천길만길 낭떠러지 골짜기 위로 멋진 모양의 바위들이 비경을 이룬다. 무릉계곡을 이루는 시작점 인가보다.

지나온 봉우리들과 앞에 있는 높은 봉우리들을 먹구름 안개가 에워싸고 있다.

시원해서 좋긴 한데 전망이 안 보이고 6시간을 넘게 걸어 그런지 아침 시간인데도 오후가 된 느낌이다.


고적대 삼거리를 지나 산비탈 오솔길 우회로로 올라 봉우리(1290m)에서 잠시 휴식. 능선 우측의 낭떠러지 아래엔

안개가 잔뜩 끼어 비라도 올 것 같다. 다시 만나는 구상나무 고사목과 어우러진 바위가 절경 이다.

안개가 점점 짙어지며 분위기를 묘하게 만든다.


10:45. 갈미봉(1260m). 이끼가 잔뜩 낀 신갈나무 고목에 다른 종주 팀이 봉우리 이름을 달아 놓았다.

오늘 구간의 절반 정도 왔다. 평소 같으면 이제 산행시작 시간인데 날씨가 어두워 마치 오후 같다.

다시 어두운 숲속으로 들어서서 밧줄을 잡고 내려선다. 마사토의 흙길에 삭정이를 밟아 미끄러지며 엉덩방아를 찧는다.


길에 돌이 점점 많아지며 너덜지대를 이룬다. 앞서가던 무릎 다친 젊은 친구가 미끄러진 자리에서 뒤이어

연세 드신 분이 미끄러지며 조금 다쳤다. 잠을 못잔 영향으로 다리에 자꾸 쥐가 난다고 하니 걱정 된다. 

후미 팀 함께 쉬며 간식 시간을 갖는다. 


11:55. 바위 틈에서 새어나오는 샘물을 만나 빈병들을 모두 다시 채웠다. 준비해 온 물 2.9리터를 거의 다 마시고

1리터도 안 남은 상태라 무겁지만 다시 비상으로 챙긴다. 자작나무 숲을 지나고, 싸리와 떡갈나무로 가려진 길을 헤치고,

노송이 군락을 이룬 숲을 지나 평지 같은 잡목 숲을 내려서니, 습지인지 길에 판석이 깔려있다.


12:35. 임도에 작은 차 한 대를 보며 이기령 도착. 백두대간에 대해 설명하는 커다란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백봉령까지가 10.1km 라니 시작하는 기분으로 걸어야겠는데 피곤해서 졸음이 온다. 산이 험해서 앞으로도 5시간 이상 걸린단다.


13:15. 상월산(970.3m). 울창한 숲을 올랐으나 고도가 많이 낮아졌다. 헬기장으로 된 주변에 노란 마타리와 흰 꽃이 많다.

내려서다 우측 나무사이 건너편으로 멋진 바위 봉우리를 본다. 발아래는 아주 깊은 낭떠러지다.

다시 급경사 오르막을 쳐다보며 칼로리 보충. 아침에 안 넘어가 남겼던 밥 한 수저를 물에 말아 후루룩 삼킨다.


13:50. 지그재그 밧줄을 잡고 힘겹게 오르니 ‘진짜 상월산’이란 코팅지가 나무에 달려있다. 멋대로 구부러진 노송 고사목이 많다.

방향은 좌측능선으로 이어지며 건너편으로 높은 산들이 안개에 가려있다.

우측이 절벽인 능선을 뱅뱅 돌아 내려섰다 다시 오르고 경사가 급한 내리막 돌길에 몇 번을 미끄러진다.

평지 같은 산속엔 산죽이 깔려있다.


14:20. 원방재 도착. "선두에게서 조금 전에 교신이 왔다"며 후미대장이 탈출을 권유한다.

중간의 탈출로 길이가 길어 무박산행을 한다더니 갑자기 웬  탈출? 모두들 의아해하는 눈치다.

"후미가 도착하려면 귀가 시간이 늦으니 탈출하라" 고했단다. 남은 길이 험난하여 후미를 생각해 주는 마음씨는 고마우나

이건 partnership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대간 종주를 이미 마치고 다시 하시는 분, 일부러 월차를 내어 나오시는 분... 등 등

백두대간 종주 산행을 시작부터 함께한 백두대간 mania 들이라 아쉬운 마음을 금치 못한다.

후미대장 포함하여 남자 네 명에 홍일점, 모두 다섯 명이다.

 

백복령까지의 거리는 7.09km, 시간은 3시간 정도, 가방에 남아있는 간식으로 칼로리를 보충한다.

가던 방향으로 좌측엔 임도가 있고 우측은 계곡이다. 어디로 얼마나 가야 차를 탈 수 있는 백복령이 되는지,

휴대폰은 물론이고 무전기 교신조차도 안 되는 산속에서 5명 모두 길을 모르니 옥신각신 설왕설래 한다.

결론이 빨리나지를 않아 시간만 지체되니 원래 대로 진행 하는 게 오히려 빠를 수도 있겠다.


<백복령까지 3~4시간, 좌측(임도) 하산 길 아님, 우측 하산 길, 100m가면 HP 전화통화 가능, 마을 있음> 원방재의 간이 의자에

누군가가 볼펜 작은글씨로 적어놓은 것을 보고 좌측의 임도를 마다하고 우측의 계곡을 따라 내려딛는다.

계곡의 바위는 이끼로 미끄럽고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는 산속은 완전히 원시림 정글이라 오르내리기에 더 지치기만 한다.

계곡은 아래로 내려설수록 수량이 많아지고 더 미끄럽고 험해진다. 간이 의자에 적힌 글이 장난인 것을 알았을 땐

이미 되돌아올라 설 수 없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다. 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바위만 딛으며 내려섰으니...


일몰의 시간은 아직 아니지만 숲속은 어두워 시간을 돌려 논다. 일행 중 한 분이 119에 연락하면 어떻겠느냐 하신다.

연세 드신 분이 가끔 미끄러지며 엉덩방아를 찧는다. 계곡에 앉아 잠시 휴식. 먹을 것도 이미 동이 난 상태,

마실 물이라도 많이 받아왔으니 망정이지 물조차 떨어졌으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몸은 지쳐가고 앞길은 알 수가 없으니 맑은 계곡물을 보며 걸어도 땀조차 씻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


16:20. 두 시간을 내려와서야 나뭇가지에 오래된 빨간 리본 하나가 눈에 뜨인다. 길이 있겠다 싶어 찾으니

낙엽과 수풀로 덮혀 마찬가지다. 계곡을 이리 건너고 저리 건너며 민가 한 채가 있는 곳에 도착하니 17:00.

이곳까지의 산행 시간이 14시간 걸렸다.

근처에 차가 있어 사람을 불러내 도움을 요청하니 고맙게도 도와주시며 택시까지 불러주어 백복령에 도착하니 18:00.

 

오늘도 해냈다는 자부심으로 뿌듯함을 느껴야 하는 이 순간, 고생 할 것 다 하고도 타의에 의해 목적지까지 종주를 못하고

언젠가는 다시 와야 할 생각을 하니 뒷맛이 씁쓸하고 개운치 않다. 속이 좁아 그럴까?

선두의 말대로 탈출하여 택시까지 타고 다녔어도 대간 길로 걸은 것보다 빠르지 않았다. 고생만 하고 결코 도움이 되질 못했다. 

언제 또 이 먼곳까지 일부러 찾아와 마저 채운단 말인가? 생각할 수록 부화가 치밀고 약이 올라 혼자 씩씩댄다.  

 

2006. 8. 15.(火) 백두대간 34구간을 종주 하다.

(댓재~두타산~청옥산~연칠성령~고적대~갈미봉~이기령~상월산~원방재~백복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