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여행

흑산도 칠락산, 상라산 산행

opal* 2007. 9. 8. 13:04

 

 

산행 들머리,

흑산도의 해오름 산악회 회원 한 분이 개인적으로 등산로를 개척하고, 이정표를 만들어 산행하기 편하게 안내 한다.



 

흑산도의 두 군데 해수욕장 중  한 곳  샛게 해수욕장.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1363년(고려 공민왕 12년)에  주민을 영산강 하류 남포 (지금의 영산포)로 이주 시켜 空島가 되기도 했었으나 

임진왜란 후 왜구들이 물러가며 주민들 정착.

 

출발 時에는 깃대봉 산행 예정이었는데 깃대봉 정상엔 군사 시설이 있고, 등산로 개척이 안 되어  칠락산과 상라산으로 방향을 돌린다.

 

칠락산  정상


 


산에 웬 좁은문? 하며 발을 떼어 놓으니 앞에, 아래 사진에서 보이는 작은 바위 두 개가 길을 막는다.

 

풀에 가려져 있어 잘 보이지도 않는 이 두 바위 사이로 자나가야 한다.

 

바위 옆 우회로를 이용하거나  바위 틈을 비집고 가야하는  등산로.  정비가 더 필요핟. 



걸어온 곳을 돌아본 능선

 

바위 잡으며 올라가다 큰 구렁이인 줄 알고 깜짝 놀라기도,ㅎㅎㅎ  밧줄에 매듭이 있으면 얼른 알았을 텐데.

 

밟아 보고 싶은 유혹이 생기는 능선 이지만, 흑산도 아가씨 육지 바라보듯 바라 보기만 하고,

방향을 우측으로 돌려 상라산으로  발을 옮긴다.


 

마리 마을의 전복과 우럭 양식장.

 




밧줄 잡고 수직 절벽을...

 


흑산도는 1791년(정조 15년)  김이수의 擊錚原情(격쟁원정)으로 닥나무 세금의 감면을 받은 곳.

 原情이란 개인이 원통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였을 때 이 딱한 사정을 국왕에게 직접 진소하는 문서.

이를 위해 어가가 지나가는 길목을 지키고 서 있다가 징을 쳐 하문을 기다렸다가 올리기 때문에 이를 擊錚原情이라 한다.

 

1791년 1월 18일, 섬 주민 김이수가 서울 한 복판에서 꽹과리를 쳤다. 그 소리를 듣고 노량진에서 이제 막 숭례문으로 향하려던 정조의 어가가 멈춰 섰다. 백성이 격쟁을 올렸기 때문이다. 격쟁이란 백성이 억울한 사정을 직접 왕에게 직언할 수 있는 제도였다. 방법은 왕의 행차 때 징·북·장구·꽹과리 등을 치면 발언의 기회가 주어졌다. 격쟁은 신문고와 유사하지만, 절차상 차이가 있다. 예컨대 신문고는 중앙관원을 반드시 거쳐야만 가능했지만, 격쟁은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누구나 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다. 1791년 엄동설한에 왕의 어가를 가로 막은 사람은 흑산도 주민 김이수(1756~1805)였다. 그는 왜 정조를 만나려고 했을까.

 

조선후기 흑산도는 나주목의 부속도서였다. 흑산도는 서남해역의 끝자락에 입지한 까닭에 해양방어를 목적으로 섬에 수군이 파견됐다. 그래서 흑산도는 육지 땅 나주목의 부속도서이자, 전라우수영에 편제됐다. 그러나 흑산도 주민들에 대한 실질적인 행정업무는 흑산도진의 우두머리인 진장의 소관이었다. 수군진에서는 매년 섬 주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했다. 이것으로 수군진의 운영비를 충당하는 한편, 상급관부인 우수영과 나주목에서 요구하는 각종 세금을 분담했다.

그런데 문제는 섬 주민들에게 부과되는 이중과세로 인한 폐단이었다. 이런 내용이『김이수전』에 전해온다.

이 책은 1813년에 섬 주민 김광은이 김이수의 글을 모아 엮은 것으로, 크게 5개의 테마로 구성돼 있다.

주로 18세기 흑산도 주민들이 감당해야 했던 각종 세금문제를 다루고 있다. 예컨대 기와를 만들어 육지로 운반하는 기와세(1767년),

 밤중에 횃불에 불을 밝혀 낚시로 잡아 올린 고등어세(1772년), 보리 베고 콩을 심은 밭작물에 대한 토지세(1783년),

청어잡이 배가 섬에 정박한 이래로 부과됐던 청어세(1789년), 흑산도가 닥나무 산지라는 명목으로 부과된 종이세(1791년) 등이었다.

 이 가운데 섬 주민들에게 가장 힘든 부역은 종이세였다.

 

서남해역에서 종이를 만드는 원료인 닥나무가 흑산도와 안마도에만 유일하게 분포했다. 그래서 섬 주민들은 누대로 종이를 만들어

중앙관부에 상납해왔다. 그런데 종이 상납은 절해고도 섬 주민들에게 결코 가벼운 부역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섬 주민들은 닥나무를 채취할 수는 있었지만, 이것을 이용해서 종이를 만드는 기술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종이 제작은 영암의 도갑사 승려들을 섬으로 초대해서 생산할 수밖에 없었다. 종이는 섬 주민과 승려의 분업으로 만들어졌지만, 소요되는 경비는 모두 흑산도 주민들의 몫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흑산도에 닥나무가 절종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제 섬 주민은 닥나무를 구하러 육지로 나와야 했고, 현지에서 종이를 만들어 중앙에 상납했기 때문에 체류비 또한 덤이었다. 그 결과 섬주민의 종이세 부담은 날로 늘어났다. 이런 사정을 섬 주민들은 흑산도진에 정소했고, 그 다음에 상급관부인 우수영, 나주목, 전라감영에 민원을 제기했다. 마침내 전라감사가 중앙관부에 시정을 요구했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급기야 섬 주민 김이수가 한양 천리 길을 달려가서 정조에게 격쟁을 올린 것이다(김경옥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ㆍHK연구교수)

 

상라산 등산로

 

상라산 정상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길.

용의 꼬리를 닮았다 하여 '용꼬리 고개'라 하기도 하는 구절 양장 같은 열 두 굽이 길. 위로 보이는 포구는 흑산항.

 


상라산 정상에 서면 사방으로의 조망이 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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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초도 항에서


쾌속선이라 선실 밖에 나올 수가 없어, 도초도에서 잠시 쉬는 중.

뒤로 보이는 곳이 비금도 이다.


선실 안에서




뒤로 흐릿하게 보이는 섬이 '홍도'





'흑산도 아가씨' 노래가 쉴 새 없이 이어진다.


뒤에 보이는섬은 '대장도',  소장도와 이어지는 부분의 작은 섬들이 아름답다.

'자산어보' 전망대에서



 해안도로 일주 후 다시 서 봤다.

 



흑산도에 도착하여 한 바퀴 일주한 후 점심 식사.  오후에 산행 시작.

 

봉우리에 오르니 바다가 펼쳐지기 시작, 일주하며 바라본 모습과는 또 다른 맛.


칠락산 정상.







문암산엔 군사 시설이 있을 뿐더러 그쪽 방향은 등산로가 개척되지 않아 갈 수가 없단다.

 






 왼쪽부터 걸어온 능선 줄기

 


 차가 와 기다린다며  빨리 내려오라기에 손 들어 신호 보낸 후 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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