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천 양희 - 단추를 채우면서,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오래된 가을.

opal* 2007. 10. 5. 17:46

 

 

단추를 채우면서

 

                         천 양희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 단추, 첫 연애 첫 결혼 첫 실패

누구에겐가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들다는걸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천 양희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산을 넘어 버렸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강 넘어 버렸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만 그 집까지 갔지요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

나는 그걸 위해 다른 것 다 버렸지요

 

그 땐 슬픔도 힘이 되었지요

그 시간은 저 혼자 가버렸지요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었지요

 

 

오래된 가을

 

                    천 양희

 

돌아오지 않기 위해 혼자

떠나 본 적이 있는가

 

새벽 강에 나가 홀로

울어 본 적이 있는가

 

늦은 것이 있다고

후회 해 본 적이 있는가

 

한 잎 낙엽 같이

버림받은 기분에 젖은 적이 있는가

 

바람 속에 오래

서 있어 본 적이 있는가

 

한 사람을 나 보다

더 사랑한 적이 있는가

 

증오보다 사랑이

조금 더 아프다고 말한 적이 있는가

 

이런 날이 있는가

 

가을은 눈으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보는 것

 

보라

추억을 통해 우리는 지나 간다 

 

                                                             (2005/12/9,  '퍼온글, 스크랩'에 올렸던 글)

 

 

 

1942 부산 출생
경남여고 졸업.
1966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1965 ≪현대문학≫에 박두진의 추천으로 <정원(庭園) 한때>, <화음(和音)>, <아침>을 발표하여 등단.
1996 문학사상사 주관, 제10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수상작 : 단추를 채우면서>
1998 현대문학사 주관, 제43회 현대문학상 수상 <수상작 : 물에게 길을 묻다>
2005 제13회 공초문학상 수상자 <수상작 : 시집 ‘너무 많은 입’>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평민사 1983
시집 <사람 그리운 도시(都市)> 나남 1988
시집 <하루치의 희망> 청하 1992
시집 <마음의 수수밭> 창작과비평사 1994
시집 <오래된 골목> 창작과비평사 1998
잠언시집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1998
단편 소설 <하얀 달의 여신> 1999
시집 <너무 많은 입> 창작과비평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