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분
이 병률
그러기야 하겠습니까마는
약속한 그대가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날을 잊었거나 심한 눈비로 길이 막히어
영 어긋났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
봄날이 이렇습니다, 어지럽습니다
천지사방 마음 날리느라
봄날이 나비처럼 가볍습니다
그래도 먼저 손 내민 약속인지라
문단속에 잘 씻고 나가보지만
한 한 시간 돌처럼 앉아 있다 돌아온다면
여한이 없겠다 싶은 날, 그런 날
제물처럼 놓였다가 재처럼 내려 앉으리라
햇살에 목숨을 내놓습니다
부디 만나지 않고도 살 수 있게
오지 말고 거기 계십시오
풍경의 뼈
이 병률
단양역 지나
단성역 네 평 대합실에는
온실에 들어선 것처럼 국화 화분이 많습니다
정 중앙에 탁구대도 있고
연못도 있고
역기도 있고
자전거도 들여다 놓고
잉꼬도 두 쌍
늙은 쥐도 두 쌍
물고기도 두 쌍
살아 있는 것들은 다 짝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上行 두 편
下行 한 편
열차 시간표 빈칸에는 적요만이 도착합니다
물 끓는 난로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역무원 두 사람이
희끗희끗 내리는 눈송이에 고개를 돌리고 있다는 사실도
이 속절없는 풍경 안에 넣어야 할까요
사랑의 역사
이 병률
왼편으로 구부러진 길, 그 막다른 벽에 긁힌 자국 여럿입니다
깊다 못해 수차례 스치고 부딪친 한두 자리는 아예 음합니다
맥없이 부딪쳤다 속상한 마음이나 챙겨 돌아가는 괜한 일들의 징표입니다
나는 그 벽 뒤에 살았습니다
잠시라 믿고도 살고 오래라 믿고도 살았습니다
굳을 만하면 받치고 굳을 만하면 받치는
등뒤의 일이 내 소관이 아니란 걸 비로소 알게 됐을 때
마음의 뼈는 금이 가고 천장마저 헐었는데
문득 처음처럼 심장은 뛰고
내 목덜미에선 난데없이 여름 냄새가 풍겼습니다
바람의 사생활
이 병률
가을은 차고 물도 차다
둥글고 가혹한 방 여기저기를 떠돌던 내 그림자가
어기적 어기적 나뭇잎을 뜯어먹고 한숨을 내쉬었던 순간
그 순간 사내라는 말도 생겼을까
저 먼 옛날 오래전 오늘
사내라는 말이 솟구친 자리에 서럽고 끝이 무딘
고드름은 매달렸을까
슬픔으로 빚은 품이며 바람 같다 활 같다
그러지않고는 이리 숨이 찰 수 있나
먼 기차소리라고 하기도 그렇고
비의 냄새라고 하기엔 더 그렇고
계집이란 말은 안팎이 잡히는데
그 무었이 대신해 줄 것 같지않은
사내라는 말은 서럽고도 차가워
도망가려 버둥거리는 정처를 붙드는 순간
내 손에 뜨거운 피가 밸 것 같다
처음엔 햇빛이 생겼으나 눈빛이 생겼을 것이고
가슴이 생겼으나 심정이 생겨났을 것이다
한 사내가 두 사내가 되고
열 사내를 스물, 백, 천의 사내로 번지게 하고
불살랐던 바람의 습관들
되돌아 보면 그 바람을 받아먹고
내 나무에 가지에 피를 돌게 하여
무심히 당신 앞을 수 천년을 흘렀던 것이다
그 바람이 아직 찬란히 끝나지 않은 것이다
당신 이라는 제국
이 병률
이 계절 몇 사람이 온몸으로 헤어졌다고 하여
무덤을 차려야 하는게 아니듯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찔렀다고
천막을 걷어치우고 끝내자는 것은 아닌데
봄날은 간다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인 나를 잊는다 하여
불이 꺼질까 아슬아슬해 할 것도
피의 사발을 비우고 다 말라갈 일만도 아니다
별이 몇 떨어지고 떨어진 별은 순식간에 삭고
그러는 것과 무관하지 못하고 봄날은 간다
상현은 하현에게 담을 넘자고
약속된 방향으로 가자 한다
말을 빼앗고 듣기를 빼앗고 소리를 빼앗으며
온몸을 숙여 하필이면
기억으로 기억으로 봄날은 간다
당신이, 달빛의 여운이 걷히는 사이 흥이나고 흥이 나
노래를 부르게 되고,그러다 춤을 추고,
또 결국엔 울게 된다는 술을 마시게 되더라도, 간곡하게
봄날은 간다
이웃집 물 트는 소리가 누가 가는 소리만 같다
종일 그 슬픔으로 흙은 곱고 중력은 햇빛을 받겠지만
남쪽으로 서른 세 걸음 봄날은 간다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서울예전 문창과 졸업, 파리 영화학교 ESEC 수료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좋은 사람들> , <그날엔> 당선
현재 '시힘' 동인
현재 MBC FM 이소라의 음악도시의 작가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당신은 어딘가로 가려 한다> 문학동네 2003
바람의 사생활
<내용소개>
비장한 그리움과 기다림의 시어들이 절제된 감성으로 빛나는 이병률 시인의 두번째 시집.
가 닿을 수 없는, 말해질 수 없는 것들을 함부로 이야기할 때 그리움과 기억의 원형은 훼손되고,
사실은 왜곡되게 마련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시편들.
섣부른 감상을 뛰어넘어 한 생애의 쓸쓸함과 어긋나기만 하는 인연에 대해 천착하면서
기다리고 견디는 법을 극지까지 다다르는 여행과 풍경들을 통해 눈부시게 형상화해낸다.
이병률은 헤어짐의 풍경, 공기, 기미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노래하면서
‘헤어짐을 짓는’ 시인이다(신형철).
단독자의 외로움을 품고 쉬지 않고 길을 떠나는 시인이 들려주는
시의 갈피마다 생과 사에 걸친 사랑과 이별, 기다림, 침묵이 적막하고 쓸쓸하게 녹아 있다.
제1부_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봉인된 지도 . 나비의 겨울.무늬들. 저녁의 습격.
아주 넓은 등이 있어. 잠시.고양이 감정의 쓸모. 아무것도 그 무엇으로도.
점심(點心) . 아직 얼마나 오래 그리고 언제. 뒤돌아보기보다는.
겹. 저녁 풍경 너머 풍경. 탄식에게.
제2부_거인고래
사랑의 역사 . 외면. 묵인의 방향.
한 사람의 나무 그림자 . 거인고래. 달에게 보내는 별들의 종소리.
견인. 절벽 갈래 바다 갈래. 파도.
독 만드는 공장의 공원들은. 피의 일.
여전히 남아 있는 야생의 습관. 황금포도 여인숙.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바람의 사생활. 시취(屍臭).
제3부_꽃들의 계곡
뒷모습. 물의 말. 동유럽 종단열차.
아무것도 아닌 편지. 소년들. 꽃들의 계곡.
관계의 사전. 통. 미행.
섬광이다 . 순정. 장미의 그늘.
인디언 써머 . 아무도 모른다 . 약속의 후예들.
제4부_서쪽
검은 물 . 당신이라는 제국.
한뼘 몸을 옮기며 나는 간절하였나. 강변 여인숙.
서쪽. 어두운 골목 붉은 등 하나 . 희망의 수고.
내 일요일의 장례식. 동백 그늘. 별의 각질.
돼지 . 시장 거리. 대림동.
이병률-버티고 버티다 쓰는 ‘슬픔의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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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감정의 끝에는 슬픔이 있다. 기쁨·증오·분노·사랑이 그 극단에 이르면 인간은 결국 슬퍼진다. 이것은 소설가 은희경의 말이다(‘비밀과 거짓말’). 빼어난 시가 노래하는 것들이 그 ‘극단에서의 슬픔’이다. 한 순간의 달뜬 감정을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다. 그냥 좀 내버려 두었다가, 그것이 슬픔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내가 내 마음의 세입자나 되는 듯 적요해질 때, 그때 쓰는 것이다. 그러니 정말 어려운 일은 시를 쓰는 일이 아니라 시를 쓰지 않고 버티는 일이다. 1967년에 태어나 1995년에 시인이 된 이병률은 버티고 버텨서 슬픔이 눈물처럼 투명해질 때 겨우 쓴다. . . . 그는 여행에 들린 사람이기도 하다. 십여 년의 여행 기록을 모아 산문집 ‘끌림’을 펴내기도 했다. 로망을 팔아먹는 흔해빠진 여행 산문집이 아니다. 그 책은 오히려 범속한 나날들을 지극하게 감당한 사람에게만 홀연히 떠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그의 시들도 결국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지금 내가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일상에 충실하기 때문이 아니라 일상에 충분히 지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 홀연히 떠나면 그것은 그저 무책임일 뿐이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일도 그와 다르지 않다. 이러구러 봄날이 다 가는 동안 우리는 끝내 이 서울을 떠나지 못했구나. 님은 삐쳐 있고 꽃들은 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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