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글

박 봉우 - 휴전선, 눈길 속의 카츄사.

opal* 2007. 10. 26. 22:37

 

 

휴전선

 

                             박 봉우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저어 서로 응시하는 쌀쌀한 풍경.

아름다운 풍토는 이미 고구려같은 정신도 신라같은 이야기도 없는가.

별들이 차지한 하늘은 끝끝내 하나인데 ...

우리 무엇에 불안한 얼굴의 의미는 여기에 있었던가.

모든 유혈은 꿈같이 가고

지금도 나무 하나 안심하고 서 있지 못할 광장.

아직도 정맥은 끊어진 채 휴식인가 야위어 가는 이야기 뿐인가.

언제 한 번은 불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이여.

너도 이미 아는 모진 겨우살이를 또 한 번 겪으라는가.

아무런 죄도 없이 피어난 꽃은 시방의 자리에서 얼마나 더 살아야 하는가.

아름다운 길은 이 뿐인가.

산과 산이 마주 향하고 믿음이 없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에서

꼭 한 번은 천둥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을 알면서

요런 자세로 꽃이 되어야 쓰는가.


 

눈길 속의 카츄샤

 

                                    박 봉우


어느 집을 갈거나 어느 집을 갈거나

푸른 하늘이 나에게 준 이 길을 밟고
어데로 갈거나.

달밤이 아니라도 좋아라 별이 나지 않아도 좋아라

해바라기 무거운 목을 숙이고

꽃같은 울음을 고요히 피우시고 계실 어느 창변에 갈거나.

캄캄한 무덤에서 부활한 소복한 내가 되어 오늘만은 피를 토할 슬픔,
괴로움 속에 모아온 눈물 잊고 꽃초롱 밤 늦도록 피워놓고

이 길을 준 푸른 하늘을 이야기 하자고 가다리실 어느 집을 갈거나.

하얀 길. 하얀 벌판을 밟고 무한한 지평선에

흰 비둘기 나래의 깃발이 되어 이 기쁨을 누리자고 어느 머언 창변에까지 들리게...

산산이 부서져 버릴 유리조각이 되게 허공을 향하여 목이 터져라 울어보고 싶어라.

달밤이 아니라도 좋아라 별이 나지 않아도 좋아라

푸른 하늘이 나에게 준 이 길을 사운사운 밟고

하얀 길. 하얀 벌판. 하얀 보자기를 지나서

어데를 갈거냐.

자꾸만 가는 길 달밤보다 흰 벌판에서

붉게 피어버린 꽃처럼 울어나 보았으면...

이 길을 이 하얀 길을 고이 고이 나려주신 풍경 속에 끝없이 젖어...

밤늦도록 꽃초롱이 켜진 집을 찾아서

푸른 하늘이 나에게 준 이 길을 밟고

진실한 노래와 내 맑은 눈물을 읽어줄 하늘 같이 넓은 기슴에 안기리
안기러 가리

 

 

 

 

1934 전남 광주 출생  
       전남대 정치학과 졸업  
1956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휴전선>이 당선되어 등단  
1962 현대문학상 수상  
       <<신춘시>> 동인  

주요 저서 시집 목록
시집 <휴전선(休戰線)>    정음사  1957
시집 <겨울에도 피는 꽃나무>    백자사  1959
시집 <사월(四月)의 화요일(火曜日)>    성문각  1961
시집 <황지(荒地)의 풀잎>    창작과비평사  1976
시집 <서울 하야식>    전예원  1986
시집 <딸의 손을 잡고>    사사연  1987
시집 <시인의 사랑>    일선출판사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