山行 寫眞

운악산 산행

opal* 2007. 12. 23. 13:03

 

운악산은 경기도의 동북 산간 지역에 위치한다. 북쪽에는 한북정맥이 북동에서 남서 방향으로 뻗어있고 남쪽에는

북한강이 동서로 흐르고 있다.
북쪽의 한북 정맥에는 경기도 최고봉인 화악산(1,468m)을  비롯해  응봉(1,436m), 촛대봉(1,125m), 가덕산(858m),

북배산(967m), 계관산(655m) 등이 강원도와 경계를 이룬다. 

한북 정맥은 포천군과도 경계를 이루는데 운악산을 중심으로 하여 국망봉(1,168m),  강씨봉(830m), 청계산(849m),

원통산(567m), 주금산(813m) 등이 솟아있다.

한북 정맥의 본줄기에는 속하지 않지만 운악산과는 조종천을 경계로 하여 명지산(1,267m), 매봉(927m), 수덕산(749m) 등이

별도의 산줄기를 이루며 뻗어있다.
운악산은 해발 935.5m로 기암과 봉으로 이루어진 산세가 아름다워 小 금강이라고도  불리워져 왔다. 또한 천연 고찰인 현등사가 잇어

그 가치를 더욱 빛내고 있다. 

주봉인 만경대를 중심으로 우람한 바위들이 봉우리마다 구름을 뚫고 솟아있고  골짜기마다 하늘을 가리는 활엽수림은

가을이면 단풍으로 물들어 만산홍엽을 이룬다.    (퍼온 글)

 

 화악산, 관악산, 감악산, 송악산 등과 함께 운악산은 경기 五岳 中의 하나이며 '현등산'이라고도 불린다.

 

 47번 국도 이용, 운주사 입구에서 하차하여 2코스 이용, 만경대, 서봉, 동봉을 올라 애기봉 쪽으로 향하다

운악 분기점에서 너덜지대로 하산, 절고개를 거쳐 현등사 입구로 내려섰다.

포천군에서 올라 가평군으로 내려섰다.

 


좌측의 1코스 등산로 외면하고, 2코스 등산로 택해 오른다. 가파른 등산로는 마사토로 되어있어 왕모래에 

뒤로 미끄러지니 처음부터 긴장감을 준다. 전에 한 번 왔던 기억도 왕모래 생각만 난다.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들은 연속적으로 밧줄을 바꿔가며 잡고 올라야 한다.



 








앞 서 가던 사람이 올라섰다 내려가기에 무턱대고 따라 올랐더니 내려 딛을 곳이 보이질 않아 혼자 낑낑...
 

사진 우측으로 보이는 바위, 남자 두 사람이 힘들게 올라가는걸 보고 올라서기를 포기하고 좌측 우회로 이용,

바위는 역시 바위, 올라가지 않고는 갈 수가 없어 또 밧줄 잡고 혼자 낑낑. 망경대까지는 계속 오르막이다.

 


밧줄잡고 오르던 곳에 철 계단이 놓여져 오르내리기가 한결 수월하다.
 

딛고 올라섰던 능선이 한 눈에. 뒤돌아 바라본 모습.

망경봉에서 애기봉 방향으로 바라본 능선. 

 

운악산 정상석 뒷면. 백사 이항복(1556~1618)의 글이 있다.

이항복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하고 위패를 모신 서원인 '화산 서원'이 경기도 포천에 있다.

백사 이항복(1556~1618)은 한음의 5세 연상이었고, 한음보다 5년 뒤에 63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한음보다 10년을 더 살았던 분이다.

한음 연보의 기록으로 보면 한음이 18세인 때 23세의 오성과 친구로서의 사귐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이 두 사람은 젊은 나이에 만나 가까운 우정을 키우면서 죽는 날까지 서로를 가장 잘 알아주던 지기(知己)였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우정과 협력 때문에 위기에 처한 나라가 건져질 수 있었다면,

이 두 사람의 우정과 지혜의 공유만으로도 한 편의 역사서가 이룩될 수 있는 멋진 자료다.

 

<이항복: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오성대감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특히 소년 시절 친구인 한음 이덕형과

기발하고 재치 있는 장난을 즐겨 많은 일화를 남겼다. 9세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면서

한 때 부랑배로 헛되이 세월을 보내기도 하였으나, 어머니의 교훈에 감화되어 학업에 열중하였다.

 

1580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589년에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예조 정랑으로서 이를 지혜롭게 수습하여 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선조와 왕비, 왕자 등을 호위하여 피난시키고 뒷수습을 하는 데 힘썼다.

 그 공으로 후에 영의정에 올랐으며, 1602년에는 오성 부원군에 봉해졌다. 그 해 성혼을 구하려다 탄핵을 받고 벼슬에서 물러났으나,

1608년에 다시 좌의정이 되어 도체찰사를 겸하고, 1611년에 우의정이 되었다. 1617년에 당파간의 세력 다툼이 일어났을때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를 내쫓자는 의견에 반대하다가 북청으로 귀양가서 다섯달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다시 벼슬이 내려지고, 청백리에 올랐다. 저서로 <백사집>, <사례 훈몽>, <북천 일록> 등과 시문을 남겼다.>

(한음 이덕형(1561~1613)은 호는 한음. 조선 중기의 문인.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과 연결되는 학자다.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당해 오성과 한음이라는 두 정치가의 충성심과 지혜 때문에

망하기 직전의 나라가 중흥(中興)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음은 현재까지의 정설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고 문학에 통달하여, 20세 때인 1580년 문과에 급제한 후 박사·수찬을 지내다가

대사성·대제학의 벼슬에 올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혼자서 일본의 사신과 화의를 도모하였으나,

일본의 불성실한 태도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후 임금을 정주로 피난시키고,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요청하여 뜻을이루었다.)

 


운악 분기점에서 가파른 너덜지대로 내려서니, 부모와 함께 온 20대 청년이

바위에서 미끄러지며 다리를 다쳐 다른 일행들에게 업혀 내려서기도... 

다져진 눈이 얼음으로 변해 바위틈을 메꾸고 있어 위험하다. 곳곳에 '추락주의' 표지판이 있다.
 



현등사 일주문을 거쳐 내려오니 멀리 명지산에서 연인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보인다.

 

이 충신단은 1910년에 설단, 1989년에 복원, 매년 11월 25일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趙 秉世 - 의정대신으로 가평에 은거하고 있다가 을사 보호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상경,

             을사조약 무효를 주장, 이 조약에 서명한 오적을 처단하고 국권고를 회복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며

            항거, 왜헌들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결고 국증 사민서'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충신.

崔 益鉉 - 을미의병운동의 대두, 오조약의 체결을 보고 통분하여 다시 의병을 봉기하여 왜구토벌에 앞장 서

             싸우다가 체포, 대마도로 이송 구금, 단식으로 항거하다 순국한 충신.

閔泳煥 - 시종무관, 을사보호조약을 보고 대한문 앞에 나가 석고대죄 하며 국권회복의 상소를 올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국민과 각국 공사에게 보내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한 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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