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종주기

37-1구간 다시 걷기(닭목재~화란봉~석두봉~삽당령)

opal* 2008. 2. 24. 01:03

 

  벨이 울린다. " 이번 백두대간 산행에 참석 하실 거죠?"

"글쎄요, 다른 구간에 비해 볼거리도 없고 재미도 없는 산이라... "

재미없는 산? 말 하고보니 자신이 생각해도 표현이 좀 어중띠다.

경치 좋은 국립공원이라도 되어야 한다는 걸까? 아님 한스런 역사라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걸까?

백두대간 종주 산행은 고통이 곧 즐거움이었다.  이 구간 첫 산행 땐 숲이 시원한 여름, 야생화가 많았었다.

 

지인 부친의 별세 소식에 산행 한 번 쉬니 날자가 꽤 많이 지난 것 같고 오래 쉴 수없어 가방 챙겨 나섰다.

가 보면 뭔가 또 다른 맛이 있겠지. 혼자 마음 속으로 최면 중인데 차창 밖에 눈이 날린다.

대관령이 가까워지며 내리는 양도 많아 진다. 재미없다 했더니 투정으로 들으셨나보다. 볼거리를 주신다.

 

전엔 삽당령에서 닭목재로 산행 했던 구간. 이번엔 역산행으로 들, 날머리가 바뀐다.

요즘은 어쩌다 대간 종주 산행에 참석하면 도중에 탈출하며 부분 산행을 했으나

오늘은 중간 탈출로가 마땅치 않아 종주해야 하므로 마음으로 각오 한다.

 

닭목재 도착(10:15)하니 눈이 펄펄 내린다. 동심으로 변한 들뜬 마음으로 능선을 오른다.

산죽과 진달래 꽃망울 위로 소복하다. 내려다 뵈는 세상 온통 하얗다. 모두 무죄란 고은님의 시가 또 생각난다.

그러잖아도 된비알이라 힘든데 먼저 내려 쌓인 눈 위로 새로 내리니 숙였던 머리 쳐들면 뒤로 미끄러진다.

 

40여분 오르니 멋진 노송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그냥 봐도 멋진 노송, 설경 분단장에 감탄사 연발.

뒤로 보여야 할 고루포기, 능경봉이 나무가지 사이로 어슴프레 하다.

각오했던 바쁜 걸음, 앞으로 가기는 커녕 멋진 노송과 얘기 하느라 지체한다. 이 겨울 마지막 설경이리라.

날씨 맑으면 더 멋진 모습으로 담겨 질텐데... 동심도 좋지만 빛이 없는 아쉬움이 더 크다.

 

나목으로 변한 여러 종의 교목 숲, 나무 사이 발자국 따라 걸으니 어디서 왔는지 검둥이 형제가 나타났다. 

'혹시 개가 아니면? 뒤엔 아무도 없는데...' 갑자기 무서워져 속도 내니 일정한 거리 두고 따라 온다.

개들도 눈이 좋아 나왔나 보다. 황장산 구간에선 白狗 한 마리가 한참을 따라와 배웅해 준 일도 있었다.

 

산행 시작 한 시간 화란봉(1069m)도착. 유명세가 없어 그럴까? 1000m가 넘는 고봉임에도 정상석 하나 없다.

기둥이나 표지도 없고 2년 전 여름에 보았던 어느 산악회에서 아크릴판에 적어 매단 것뿐이다.

다른 곳은 2년도 안된 기간에 표지를 새로 만든 곳도 많던데, 세로로 '강릉시 왕산면'이라 쓰인 키보다 작은

사각 막대 기둥 하나, 날개는 낡아 떨어져 없고 기둥만 다른 나무에 기대어 서있다.

花蘭峰은 대기리의 닭목재 동쪽에 목이 잘록하게 생긴 봉우리다. 꽃 모양의 산으로 부채살처럼 펼쳐진 화관이

화란봉을 중심으로 겹겹이 에워싼 형상, 활짝핀 꽃 송이를 연상케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빽빽한 교목 틈에 키 작은 상록 가문비 한 그루,
침엽으로 비록 길이는 짧지만 주제에 잎이라고 교목 나목 거부하는 눈을 혼자 함빡 뒤집어 썼다.
4, 50년전 크리스마스 카드에 그려진 설경 모습이다.

조금 더 걸으니 소나무 가지도 마찬가지, 오지의 깊은 숲 한 겨울 모습이 아름답다.

 

발자국 따라 동쪽 향해 걸으니 왼쪽에서 날아오는 눈은 나무 줄기 한 쪽을 하얗게 칠하며 지나간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온몸으로 버티는 겨울나무가 아름답다. 말 못하는 나무들도 따뜻함을 좋아 한다.

따뜻한 남쪽 향해 가지를 뻗는다. 한 쪽 간격이 넓은 둥근 물결 나이테와 따뜻함을 나누고 싶다.

군데군데 소나무가 운치를 더해준다. 우리 산 우리 숲, 소나무 더 많아지기를  소망해 본다.

 

지도에는 삼각점이 표시되어 있는데 산죽조차  눈 이불 속에 휴식하니 삼각점이 보일리 없다.

고개 들고 두리번 거리다 발자국 옆에라도 딛으면 무릎까지 빠지는건 보통,

능선 따라 간다지만 큰 잡목들로 조망이 없어 답답하다. 그래서 재미없단 소리 나왔나 보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 막바지 겨울의 멋진 설경에 취해 봉우리들을 오르내린다.

 

눈과 털이 빛나는 검둥이 형제, 두 시간째 따라온다.

줄만한 먹이가 없어 미안하니 밥이 기다리는 삽당령까지 같이 가자꾸나. 

여러 줄기 가진 커다란 신갈나무, 수명을 다 한 뿌리 하늘을 향하니 등산로가 막혔다.

아취형으로 굽은 가는 줄기에 달린 빨간 리본 흰 눈 속에 선명하다.

 

작은 봉우리 오르니 처음 참석한 일행들, 시장하다며 간식 시간 갖고 있다.

고맙게 얻어 마신 뜨거운 차 한 잔과 과일 두 조각에 힘이 생긴다. 시계 보니 오후 한 시.

산행 시작 두 시간 반, 쉬지않고 달려가는 선두 따라 걷다보면 셔터 누르는 시간이 휴식 시간이다.

늦어진 시간 만회하기 위해 내 달릴 때도 있지만 오늘은 발자국이 짧은 곡선으로 휘어져 속도를 못낸다.

 

가느다란 마른가지위에 얹힌 눈송이가 영락없는 목화송이들이다. 고 재종님의 시가 갑자기 생각난다.

키 큰 나무들도 받아주기를 거부한 눈을 작은 나무들은 겁없이 받아 이고 있다. 제 무게보다 무거운 것을.

머지않아 터트릴 잎눈과 꽃눈은 풍요함을 간직한 채 아늑함 속에 꿈꾸고 있다.

산죽들도 모두 흰 이불 속에 눕고 목이 긴 녀석들만 간간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꽃 한번 피우려고
눈은 얼마나 많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으랴

싸그락 싸그락 두드려보았겠지
난분분 난분분 춤추었겠지
미끄러지고 미끄러지길 수 백번,

바람 한 자락 불면 휙 날아갈 사랑을 위하여
햇솜 같은 마음을 다 퍼부어 준 다음에야
마침내 피워낸 저 황홀 보아라

봄이면 가지는 그 한번 덴 자리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처를 터뜨린다>

 

13:30. 산행시작 세 시간 지나 처음 만난 표지목,  키 작은 사각 기둥 열 십자 모양 나무판에

화살표와 한글 네 글자 '대용수동'뿐, 눈 덮인 설국 길 조차 없는데 거리 표시도 안되어 있다.

 

뾰족한 봉우리 된비알을 힘들게 치고 오른 석두봉 정상(982m)(13:45), 암봉으로 되어있고 아무 표시가 없다.

처음으로 조망을 접하나 흩날리는 눈으로 가시거리가 짧다.  우리가 지나온 서북쪽 경관이 조망된다.

1년 반 전엔 부산의 어느 산악회에서 매단 하얀 코팅지라도 있었는데 그나마도 없어졌다.

나목 빽빽한 숲에서만 걷다 오랫만에 탁트인 조망을 만나 배경삼아 기념 모습 담는다.

 

바위섞인 급경사 내리막 눈은 흘려 내렸는지, 바람에 날렸는지, 햇살에 녹았는지 젖은 낙엽이 밟힌다.

10분쯤 내려서서 돌아보니 금방 내려선 봉우리가 나무사이로 뾰족하다.

앞엔 뭉긋한 봉우리가 나목 사이로 보인다. 올라서니 정상의 나무들은 베어졌으나 조망은 없다.

시장기를 느껴 음료와 과일로 허기를 달랜다.(14:15) 고개를 쳐드니 하늘이 나무 사이로 파랗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눈이 그쳤다. 박달나무 줄기엔 유난히 많은 눈이 달라 붙었다. 특이한 수피 덕이다.

 

푸른 잎을 지니고도 세상 구경 못하고 눈 속에 묻힌것도 억울한데 사람들은 산죽 위로 길을 냈다.

사람들이 걸으며 눈을 털어준 산죽은 세상 구경 할 수 있으니 좋을 수도 있겠다.

 

14:30. 방화선 초지, 지금은 풀을 베어 휑하니 뚫린 직선 능선, 여름에 걸을 때 키보다 큰 억새가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말이 방화선이지 만약에 마른 억새에 불이라도 붙으면 오히려 쏘시게 역할하며 훨훨 더 잘 타겠다.

양 옆으로는 노송들이 많다. 숲 속에서 나와 푸른 하늘을 오늘 처음 본다. 흰구름 덩이가 적당히 조화롭다.

능선 언덕에 예닐 곱명이 또 자리 잡는다. 두 시간 전에 간식 먹던 팀이다.

"무슨 사람들이 먹지도 않고 달린대요? 우린 배가 고파 그렇게 못다녀요, 갖고 온것 다 먹어야 내려가요." 

준비한 과일 꺼내 함께 나눠 먹는다.

 

멋진 노송들 바라보니 갑자기 숭례문 생각난다. 이 정도 크기면 숭례문 복원에 쓰일 수 있을까?  

오랜 세월 참고 견디며 살아온 나무들, 문화재 관리 못한 고관들 행여 찾아 오더라도 불합격 판정받고 

이곳에서 오래 오래 살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푸른 하늘 쳐다보다 돌아 보니 화란봉 뒤로 넓은 설원 보인다. 선자령이 반갑다. 반대 방향으로 종일 걸었는데

거리는 겨우 이 정도? 색 짙은 소나무 뒤로 갈색 낙엽송, 군락을 이루며 색을 달리하는 화면 위로 발왕산이 봉긋하다.

왕릉 봉분같은 반원 위로 전망대도 뚜렷하다. 전에 왔을 땐 눈에 안 들어오던 모습, 숲 속의 사색도 좋지만

시각 즐겁고 바람 소리 시원하니 한 가지씩 맛을 보탠다. 그래 바로 이맛, 오감이 즐겁다.

 

직선거리 초지와 헤어져 좌측 숲으로 올라서니 작은 푯말이 있다. '대용수동, 닭목령'과 화살표 하나.

산비탈 눈 덮인 산죽사이 비좁은 눈길을 일렬로 내려선다. 내려선 봉우리 뒤돌아 본 후 다시 앞 봉우리 오르기를 반복,

특징없는 산길은 지루하다. 푸른하늘 배경으로 긴 나무줄기에 살짝 기대어 나무 만큼 큰 눈 기둥이 묘기를 부린다. 

가까이 살펴보니 수피와 밀착되지 않은 상태라 신기하다.

오후 세 시반, 산행 시작 다섯 시간 지났다. 알맞은 산행 시간 채워졌으나 더 걸어야 한다.

 

신갈나무 줄기 작은 가지 사이, 아쉬운 대로 멀리 보이는 모습이 아름답다. 잿빛 하늘 뒤에 보는 시원스런 푸른 하늘,

흰구름 조각 아래 두리봉 뒤 석병산이 보인다. 바위가 아름답고 동해까지 보이는 전망 좋던 석병산.

두 바위 봉 정상에서 손짓하며 사진찍던 추억이 오버랩 된다. 아침 차 안, 오늘은 2진 코스가 없어

혼자 삽당령에서 석병산을 다녀올까 생각도 해 봤다. 삽당령 가까워오니 지루함이 가셔져 마음 가볍다.

 

지나온 '들미골과 닭목령'이 씌어진 작은 표지목, 지도를 보며 위치를 확인한다.

송전탑 앞 도착(16:00)하니 임도와 만나진다. 봉우리 넘기 힘들다며 서너 명이 임도를 택한다. 

울타리에 매달린 리본들이 기우는 햇살에 선명하다. 임도로 갔던 사람들  럿셀이 안 되어 다시 능선으로 오른다.

 

단일 산행 하산 때는 보통 계속 내리막인데 반해 대간 길은 그렇지 않아 속고 또 속는다.

마지막 오르막이려니 생각하며 사력 다해 올라보면 앞에 봉우리가 또 보이며 오르내리기 반복.

끼니를 제 때 챙기지 못한 상태에서 만나는 오르막은 정말 고역, 지치기 십상이다.

짧은 산행하다 오랫만에 완주 하려니 힘들고 지루하다. 목에 넘기기 힘든 그러나 넘겨야 하는 대간 산행 맛.

차 달리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니 반갑기 그지 없다. 삽당령 도착하니 16:25.

도상거리 약 13.5km, 산행 소요 시간 6시간. 선두는 세시에 도착 했다니 한 시간 이상 차이 난다.

 

삽당령은 왕산면 목계리와 송현리의 분수령으로 해발 680m이다. 예전에 이 고개를 넘을 때 길이 험하여

지팡이를 짚고 넘었으며 정상에 올라 짚고 왔던 지팡이를 꽂아놓고 갔다하여 '꽂을 삽揷' 字를 썼다는 유래가 있다.

 

2008. 2. 24. 당일 산행 한 구간을 종주하다.

닭목재(680)~화란봉(1069)~1006~989.7봉~석두봉(982)~978.8~들미재 삼거리(910)~862~삽당령(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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