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모친과 막내 함께 수원 큰동생 집에서 자고, 엄마가 전에 사시던 마을에 가 보고 싶다고 하시기에
마지막이려니 생각하며 모시고 가보니 넓은 길도 새로 뚫리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느라 마을 터는 황토로 변하고
칠보산 아래 몇 동네 전체를 노란 Fence를 쳐놓아 마을엔 들어갈 수가 없었다.
지금은 이렇게 큰 다리가 놓이고 길도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차가 다닐 수 있지만 내 어린 시절 예전엔 마차가 겨우 비켜갈 정도의
좁은 폭 흙길, 여름에 비가 오면 발목까지 빠지고, 진흙이 얼어 붙는 겨울이면 마차 바퀴 자국이 움푹 패여 울퉁불퉁한 채로 얼어붙어
한참을 걷다보면 얇은 맹꽁이 운동화 신은 발바닥이 아팠던 길이다.
멀리 부곡에 있는 저수지로 부터 흘러내려오는 큰 냇물.
지금은 옆으로 넓은 길이 새로 뚫려 가로수가 심기고, 군데 군데 아파트가 들어서서 황량했던 벌판이란 느낌을 못 느끼지만
예전엔 한 시간 이상을 걸어야 집을 만날 수 있는, 집 한 채 없던 허허벌판이었다.
①②Sky line을 이루고 있는 산이 칠보산.
앞에 보이는 황토 언덕 넘어 칠보산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마을이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이다.
③작은 냇가 다리, 내 유년 시절엔 또랑 건너듯 징검다리 건너고, 아낙네들 머리에 잔뜩이고 온 빨랫감 방망이 두드리며
냇가 뚝에 기다란 광목천 하얗게 말려서 집으로 돌아 가던 곳.
④작은 냇물, 저 아래 큰 냇물과 만나는 곳에 지금은 수중보가 있어 물이 가득하다.
내 어린 시절엔 수중보도 없었고, 다리도 산에서 큰 나무를 베어다 만든 다리라 매년 여름 홍수 때만 되면 떠내려가
해마다 연중행사 치르듯 여름철이 끝날 무렵이면 새로운 다리가 놓여지곤 했었다.
어린 시절 학교에 있는 시간에 소나기라도 많이 쏟아지는 날은 교실에 앉아 있어도 공부가 되질 않았다.
갑자기 싯뻘건 황톳물이 범람하면 나이 어린 나는 혼자는 건널 수가 없어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한 시간 이상을 걸어 왔다가 냇물이 많으면 동네가 빤히 바라보여도 건너지 못한 채,
시내로 되돌아 가 커다란 다리가 있는 다른 동네로 돌아야하기 때문에 하루 해를 다보내고 어두워져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국민학교 저학년 시절엔 시내버스도 없었고, 그나마 옆동네로 다니는 시외버스도 한 시간에 한 번 올까말까 였다.
지금의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이승만 대통령 시절,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 오는 길,
냇가에 도착하니 물이 불어나 다리가 다 잠기고 상판만 무섭게 흐르는 물 속에 보이다 말다 한다.
멀건히 앞만 바라보고 걱정이 태산인데 뒤에서 옆동네 큰 남학생 둘이 오고 있고,
동네 아저씨 한 분이 불어난 물 구경 나왔다 물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삼촌 친구도 되고 친구의 삼촌이기도 한 그 아저씨는 마음에 안되었던지 상류쪽으로 가시더니 옷 벗어 우비에 싸서
새끼줄로 허리에 매고 물 흐름 따라 건너 오셨다. 남학생 둘은 새끼줄로 이어매고 건네 주시고, 다시 다시 건너와
나는 안되겠는지 냇가 둑 따라 하류로 내려가 다른 동네에 있는 다리를 건너 집까지 데려다 주셨다.
그 고마움을 못잊어 결혼 후에도 오래도록 찾아 다니다 나이 먹으며 차츰 잊혀져 갔다.
중학교 1학년 때 한 번은 마을에 딱 한 사람 뿐인 대학생, 남자 친구 형님이 무등을 태워 건네 주기도했었다.
어린 시절, 나는 늘 혼자 학교엘 다녔다.
한 동네에 사는 다른 아이들은 모두 옆 동네에 있는 국민학교엘 다녔는데 그시절 공무원이셨던 아버지께서
시내에 있는 학교에 입학시켜 주셨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시 오리나 되는 허허벌판을 한 시간 이상 타박타박 걷다보면,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옆동네 학교에 다니는 애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국민학교 1학년부터 3학년 때까지는 일주일에 한 번씩 격주로 오전, 오후반이 있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일제 시대부터 있던 역사 깊은 학교인데 전쟁을 치룬 후라 교실이 부족 했다.
아침반인 날은 아버지께서 출근하시며 자전거 뒤에 태워주셨기에 학교에 가기가 수월했는데
오후반인 날은 낮에 혼자 벌판길 걷다보면 어느때 인지를 몰라 너무 늦은 것 같아
학교에 가다말고 집으로 되돌아 오는 날이 많아 결석이 잦았다.
4학년이 되면서 오후반 없이 매일 등교하니 성적이 상위권으로 올라 첫 시험에서 1등을 했다.
선생님들께서 의아해 하시며 동학년 같은 이름을 가진 애들을 모두 교무실로 불러 시험지와 대조하며 확인도 했다.
성적순으로 자리가 정해져 있어 남쪽 따뜻한 창가 맨 앞 자리에 앉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지 몇 해 안된 그시절엔 학교에서 머리와 몸에 하얀 발진티푸스 가루약도 뿌려 줬지만,
우유를 끓여 각 반마다 나누어 주기도 했다.
점심시간이면 당번 두명이 우유를 한 통씩 들어다 선생님 책상 옆자리에 갖다 놓으면 밥 다먹은 후 우유를 먹을 때
앞으로 나갈 필요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팔만 뻗으면 먼저 먹을 수 있어 공부를 더 열심히 했는지도 모르겠다.
6학년 때는 이층에 있는 교실에서 공부 했는데 역시 남쪽 창가 자리에 앉았다. 겨울에는 햇살이 들어와 따뜻했고,
그 시절 우리학교는 운동장이 넓어 행사도 많았다. 선거 유세를 하거나 군인 나가는 사람들 소집하는 일이거나,
사람 많이 모이는 행사는 늘 우리학교 운동장에서 거행 했는데 공부시간에 몰래 커텐 사이로 내다 볼 수도 있어 좋았다.
중 고교 시절도 국민학교 때나 마찬가지로 학교 위치만 다르지 같은 시내에 있어 거리는 비슷했다.
국민학교 시절엔 삼촌 친구들이나 큰 남학생들이 등교 길에 가방을 들어주면 뛰다시피 따라다니기 바빴다.
한 시간 이상을 빠르게 걸어 학교 근처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답답해서 행보를 같이 할 수가 없었다.
그때의 빠른 걸음 습관이 어른이 되도록 빨랐고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 아니었나 생각들 때가 많다.
마을이 크고 인구 수는 많아도 여학생이 없는 동네, 옆 동네도 마찬가지로 여학생은 한 동네에 한 둘이 고작이다.
같은 동네 여자 애들은 국민학교만 졸업하면 바로 시내에서 가까운 선경직물(지금의 SK모태)로 직행 했다.
감색 교복에 하얀 카라 달고 무거운 책가방 들고 매일 아침 밝은 햇살 마주보며 벌판길 걷노라면
공장에 다니는 언니뻘이나 또래들은 밤샘 작업하고 피곤함이 가득한 초췌한 얼굴로 쪽가위 하나씩 들어있는
유니폼 주머니에 손 꾹 질러넣고 걸어오다 마주치게 된다. 아침마다 벌판길 거의 시각, 비슷한 장소에서.
"얘 ㅅㅈ야, 난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네가 제일 부럽다."
"평생 소원이 교복 한 번 입어보는 거란다."
"내가 보기에 넌 태양같다."
아침 등교길에 마주치는 동네 언니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다.
또래들은 눈치만 보며 입을 다물고 있다. 오랜 시간 지나 나이 들어서야 마음 편하게 얘기 하는 걸 들었다.
"그때는 부러웠지만 국민학교부터 시내에 있는 학교로 다녀 어려워서 감히 입이 안떨어져 말을 못했노라"고 했다.
어린 시절엔 동네애들이 그런 생각을 가진 줄을 모르기도 했거니와 생활이 달라 같이 놀 시간이없었다.
학교 가까운 애들은 집에오면 산으로 나무하러 가기 바빴고 학교가 먼 나는 늦게 와 숙제하기 바빴다.
고교 2년 때까지 전기가 들어오지않아 옆 집 석유등잔 사용할 때 카바이트나 남포불 밝히고 살았다.
친구라고는 땅과 바람, 햇살과 맑은 공기 뿐이었던, 십 여년을 하루같이 걸어 다녔던 이 벌판 길,
우리네 어렸을 적엔 나병(문둥병, 한센병) 환자도 많아 어쩌다 이 벌판 길에서 만나면 혼비백산하여 뒤로
도망치기도 여러번, 새만한 어린 가슴은 콩닥콩닥 발딱발딱 , 누굴 만나면 반가움 보다 두려움이 많았다.
고교시절 여름 비가 내리는 날은 진흙에 빠져 운동화 대신 차라리 엄마 하얀 고무신을 신고 등교를 했고,
바람에 날아가는 종이우산 대신 군용 쥬브로 만든 우비를 입고 혼자 걷다 우비폭이 좁아 가방이 당기는 것을
도깨비가 잡아 당기는 줄 알고 대낮에도 진땀 흘리며 혼났던 일도 있다. 예전엔 왜그리 도깨비에 홀린 얘기가 많았는지.
막힌 곳이라곤 한군데도 없는 허허벌판, 살을 에이는 듯한 북풍한설과 맞서서 걷기를 십 수 성상.
짙은 회색빛 하늘에서 함박눈이라도 하루종일 평펑내리는 날은 바람에 날린 눈(雪)이 눈目으로 들어가 앞을 볼 수도 없고,
눈(雪)이 논두렁을 덮으면 논 바닥과 길 높이와 같아 하얀 눈에 홀려 논 속으로 허리까지 빠지기도 했다.
학교에서 단체로 방과후 영화관 가는 날은 늦은 밤시간에 벌판길 걸을 걱정에 영화 장면이 눈에 들어오지 않으니 재미있을리 없다.
학교에 오가는 시간이 길어 집에선 겨우 숙제나 할 정도, 따로 공부한 기억이 별로 없다.
많은 시간 걸리는 오가는 길에 책이나 노트 보며 걷다보면 내용이 머리 속에 대강 들어 앉는다.
어느 시험날은 문제의 정답 보다는 공책 몇장 넘기면 중간 쯤에 빨간 밑줄 그은 곳에 있는 건데, 아니면
책 몇 단원 윗쪽에 낙서한 것이 정답인데... 등이 더 기억 나기도 했다.
전에 걷던 시골길 사진을 올리다보니 많은 추억들이 실타래처럼 엉키며 떠올라 두서없이 주저없이 끼적대진다.
십여 년을 걷던 길이 어찌 이 작은 추억 뿐이랴 마는...애깃거리 많은 유년 시절의 꿈과 애환이 있었던 이 시골 길을
나는 아직도 사랑하고 있나보다.
칠보산 골짜기로 부터 흘러 내려오는 작은 냇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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