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여행

로마시청, 포로 로마노 신전, 콜로세움, 개선문

opal* 2010. 6. 21. 05:39

 

코스메딘 싼타마리아 성당과 아우구스티노 광장을 둘러 본 후 로마 시청으로 이동.   

 

 

바로크 양식의 시청사.

현재 로마 시의회와 로마 시장의 집무실로 사용되는 이 건물은 전에 세나토리오(Senatorio)궁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시의회 아래 기층부는 고대 로마의 폐허이다. 그 위에 중세시대 건물이 올라서고, 흙으로 덮여있던 이 건물 위에

르네상스 시기인 1592년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선 것이다.  

시청사 앞 모습은 멀쩡한데 뒷쪽 포로 로마노쪽은 다양한 건물 상이 보인다. 땅 속에 묻힌 고대 건물을 기초로 하여 계속 지은 것이다.

 

캄피돌리오 광장

저녁에 무슨 행사가 있는지 가장자리에 펜스를 치고, 건물 앞에는 무대 설치, 광장엔 의자를 셋팅 중이라 들어설 수도, 바닥 무늬도 제대로 볼 수 없어 다른이의 사진으로 대신 한다.ㅎㅎ

 

↑청사 건물에서 보이는 모습. ↓아래는 입구에서 보이는 모습. 마당 바닥조차도 이렇게 아름답게 설계를 하였다. 

캄피돌리오 광장 -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넓은 광장. 고대 로마정부가 있었던 이 곳은 현재 로마 시청이 자리잡고 있다.

위 작은 사진 정면 건물은 로마 시청사 (Palazzo Senatorio),  광장 한 가운데는 아우렐리우스의 기마상이 있고,

왼쪽엔 카피톨리노 박물관(미술관), 우측으로 콘세르바토리 궁전이 있다. 

로마의 주요한 광장이 화려한 바로크 양식인데 비해

캄피돌리오 광장은 기품이 있는 르네상스식을 따라 조성되었기 때문에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광장으로 평가되고 있다.

세나토리오 궁전의 우측으로 가면 포로로마노 전경을, 왼쪽으로 가면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작은 상을 볼 수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ntoninus,121~180)황제의 청동 가마상.

캄피돌리오 광장(Piazz del Campidoglio)의 한 가운데 우뚝 서있는 동상의 주인은 철학자이며 통치자인 로마의 황제 이다. 

로마 황제의 기마상 중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은  석상의 주인공이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 티누스 황제로 오인되어, 그리스 로마 시절의 조각품들이 우상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져 파괴당하는 수모를 견디고 무사했다 고 한다. 

원본은 캄피돌리오 박물관안에 보존되어 있고 광장에 세워진것은 복사본이다.


가이드의 설명 들으며 메모하기 바쁜 메모녀. 그러면 뭘하나 돌아서면 다 잊는 걸..ㅋㅋ

 

캄피돌리오 (Campidoglio)

캄피돌리오는 고대 로마 발상지 (제우스 신전 위치) 로써 16C경 미켈란젤로가 광장을 설계 하였고, 현재 로마시청이 있다.
또한 고대로마 유적 박물관이 (Capitoline 광장) 위치하고 있다.
카피톨리노 언덕에 있는 광장으로 바닥이 기하학적 무늬로 장식되어 있는 이 광장은 르네상스 양식의 중후한 건물들로 둘러싸여 있다.


시청건물 바로 뒤로 이동하니 고대 로마 사회를 보여주는 로마 시내 전체가 야외 역사 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유적지가 널려있다. 

 거대한 시가지를 이루고 있던, 고대 로마 생활 터전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당시의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폐허로 묻힌 고대 로마의 심장부, 원래는 평지에 있었으나 지층이 내려앉았다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니 마치 지하 도시 같다. 

캄피톨리오 언덕과 팔라티노 언덕 사이의 저지대로 바실리카 에밀리아, 원로원, 로물루스 신전, 라피스 니제르, 사투르누스의 신전,

베스타 신전 등 많은 고대 유적을 볼 수 있다.

로마 공회장 (Foro romano) 

로마시내의 베네치아 광장과 콜롯세움 사이에 펼쳐진 큰 광장은 로마 시대 시민들의 생활 중심지였다.
포리 임페리얼 거리에서 안으로 들어섰을 때 바로 오른쪽에 서있는 원주가 에밀리아의 바실리카이다.

기원전 179년에 세워진 금융의 중심지로서 은행이 서있었으나, 410년의 서고트족의 로마 점령 때 화재를 입었고,

그 때 녹은 화폐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한다.

 

고대 로마 중심지, 포로 로마노(이탈리아어 Foro Romano) - 고대 로마 시대의 유적지,

라틴어인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의 이탈리아 발음이다.

기원전 6세기 무렵부터  293년에 걸쳐 로마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였으나,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하고 수도 기능이 라벤나로옮겨지면서

이민족의 약탈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뒤부터는 그대로 방치하다가 토사 아래에 묻혀 버렸다.

포로 로마노 발굴작업은 19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현재의 유적들은 대부분 제정 시대 이후의 것이다.

 

포로 로마노는 베네치아 광장(Venezia, Piazza, 이탈리아 수도 로마 도심지의 광장. 비토리오에마누엘레2세의 탑 북쪽에 있음)

콜로세움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대 로마의 중심부인 포룸 로마눔의 유적지 이다.

고대 로마 시절 대부분의 도시에는 스톤골룸(영어 포럼의 어원)이라고 불리는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광장이 있었는데,

이 포로 로마노는 수도 로마에 개설된 최초의 포룸이며, 가장 중요한 장소였다.

원로원 의사당과 신전 등 공공기구와 함께 일상에 필요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콜로세움, 서쪽으로 테베레 강, 남쪽으로 팔라티노 언덕, 북쪽으로 캄피돌리오 언덕이 있다. 

 

관광 수입이 많아 좋겠다는 생각도 잠시, 로마는 관광수입의 대부분이 복원에 들어간다고 한다.

파기만 하면 유물이 나오니 유네스코 조차 더이상 복원비용을 대기가 힘들다고 한다.

 

바실리카 에밀리아는 사법, 금융, 상업 등의 거래를 행하는 공공 건물로 410년에 서고트 족이 로마를 점령할 당시 화재로

일부가 소실된 건물이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치와 같이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 심하게 파손된 경우가 많았고 후대에 복원된 것도 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치는 203년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즉위 10주년을 기념하여 세웠데 중세기에 이르러서

반쯤 땅에 묻혀 이발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아치 왼쪽의 새턴 신전은 8개의 기둥으로 서있다.

새턴은 농업의 신으로 신전은 여러 번 재건되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기둥은 4세기 경에 만들어진 것이다.

 

포럼 중간 부근에 서있는 기둥은 포카스의 기둥이다. 높이 13.5m이며 세로로 홈이 파인 이 기둥은 무슨 건물의 잔해가 아니라

608년 비잔틴 황제인 포카스의 로마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물이다.
포룸 동쪽 끝 구석에는 지붕 모양이 전갈을 연상시키는 안토니누스와 파우스티나 사원이 있다.

141년에 안토니누스피우스 황제가 아내 파우스티나를 위해 세운 사원이 포룸 동쪽 중간 부근에 서있다.

티투스의 아치는 81년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그의 형 티투스와 아버지 베스파시안이 유대에서 거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19세기에 재 건축되었다. 로마에게는 승리의 기념비이지만 잔혹한 로마 관리에게 반기를 들어 항거한 유대인들에게는 쓰라린 아픔의 상징일 것이다

 

 

승리의 기념 개선문,

 

 

 

 포로 로마노 전체가 보이는 전망대. 캄피돌리오 광장의 시청사 바로 뒷쪽, 고대 로마제국의 영화를 나타내는 곳이다.

 

인물 우측, 개선문 옆으로 으로 보이는 성당, 출입문이 아래 위 1,2층에 있는데, 이 건물도 아래가 묻혀 있었다고... 

 

 

 

 

위 사진의 건물을 보면 1층(고대), 2층(중세), 3층(현대) 층마다 양식이 다르다.

오랜 세월동안 점점 땅에 묻혀 근대에와 현대식 건물을 지으며 지대가 튼튼해서 별 기초공사 없이 하다가 신전으로 보이는

중세의 기둥이 발견되고, 다시 파내려가니 고대의 건물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들을 수록 신기하기만...

 

광장 입구의 쌍둥이 석상 뒷모습.

 

포로로마노 둘러본 후 다시 로마시청으로 이동.

 

로마인들에게 가장 신성시 되었던 곳은 캄피돌리오 (Campidoglio) 언덕,

현재 영어의 수도를 의미하는' 캐피털(Capital)'의 어원이 되는 곳이다.

요새같이 높은 이 언덕에서 로물루스(Romulus)는 로마의 건국 신화를 남겼다.

당시 이 언덕에는 주피터 신전(Temple of Jupiter) 등 각 신을 모시는 신전이 25개나 있었다고 한다.

 

 

 

'ㄷ'字 로마 시청.

캄피톨리오 광장 입구에 수문장 처럼 서있는 고대 로마 시대의 쌍둥이 석상.

두 청년은 제우스(유피테르)의 아들이란 뜻으로 고대 로마인들은 디오스쿠리 또는 카스토르와 폴룩스라고 불렀다..

 

광장 입구 코르도나타(Cordonata)라고 불리는 이 계단을 설계한 사람도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 이다.

계단을 설계할 때 아래에서 위로 오를 수록 폭을 넓게 설계하여 멀리서 보면 계단이 짧아 보이게, 언덕이 높아뵈지 않게 했다.

왕이 탄 말의 보폭에 맞춰 만들고,가까이 보이게끔 설계를 했다. 역시 천재성이 돋보인다.

코르도나타의 양쪽 끝에는 디오스쿠리(Dioscuri)의 조각상이 있다

 

 

콜로세움

로마에 있는 콜로세움은 72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공사를 시작하여 8년 후인 80년에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 완공되었다.
콘크리트와 돌로 세운 이 거대한 건물은 원형 투기장 겸 극장으로 수용 인원은 6만 명이었으며, 고대 로마 유적지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최대 지름 188m, 최소 지름 156m, 둘레 527m, 높이 57m의 4층으로 된 타원형 건물이다.

로마를 상징하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으로 당시 로마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콜로세움이란 이름은 네로 황제의 거대한 동상 '콜로소(Colosso)'에서 따 온 것으로 이는 '거대하다'는 뜻의 라틴어

콜로수스(Colossus)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대형 원형 극장은 로마에만 건설된 것이 아니라 프랑스의 님므 아르르에도 있고 로마인들이 진출한 독일, 북아프리카,

소아시아는 물론 예루살렘에도 있다. 예루살렘의 원형 극장은 헤롯 대왕이 건설한 것이다.


로마에 있는 콜로세움은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 이다. 콜로세움이 완공되었을 때, 기념 이벤트로 100일에 가까운 투기(鬪技)가 열렸다.
그러나 공사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대에도 계속 이어졌고 네르바 황제와 트라야누스 황제 때에도 개축 또는 증축 공사를 하였다.

또한 여러 차례의 벼락을 맞아, 그때마다 대규모의 보수 공사가 6세기 전반까지 행해졌다.
"콜로세움이 멸망할 때 로마도 멸망하며 세계도 멸망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콜로세움이 건설되었을 때 로마는 이미 무너지기 시작했다.

 콜로세움은 지진으로 피해를 입기도 하고, 중세에는 교회나 큰 건물을 짓기 위한 채석장으로 변해 외벽의 절반 이상이 없어지는 등

몹시 훼손되었는데 18세기에 교황의 명으로 그리스도 신도들의 수난 현장으로 수복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콜로세움에는 뜨거운 햇빛으로부터 관중들을 보호하기 위해 베라리움이란 천막 지붕이 설치되어 있는데

지붕 가운데는 둥근 구멍이 뚫려 있어서 채광은 물론 환기 구 역할을 했다. 문이 사방으로 나있어 드나들기 편하게 설계되어 있다.
관중은 지정된 입구를 통해 관람석으로 통하는 층계를 올라가게 되어 있는데 이런 좌석 배정 및 출입 통제 방법은 오늘날에도 사용된다.

 

1층은 토스카나식, 2층은 이오니아식, 3층은 코린트식의 아치가 장식되어 있다.

개관은 매일 09:00∼19:00까지 일, 수요일은 09:00∼13:00까지만 관람이 가능하다.

내부에는 수천 개의 기다란 석재 기둥이 관중석의 돌들을  떠받치고 있는 불가사의한 건물이라는데

다른 곳을 먼저 보고 오느라 시간이 늦어 안에는 들어가 볼 수가 없어 유감이다.  

 

 

 

콜로세움 (Colosseum)

제정기(帝政期) 로마 시민의 오락시설로서, 여기에서는 글라디아토르(劍鬪士)의 시합, 맹수연기(猛獸演技) 등이 시행되었다.

검투사들은 오늘날의 프로 스포츠에 출전하는 선수와 다름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유명한 검투사에게 돈을 걸었다.
검투사라는 직업 자체가 로마인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으므로 유능한 검투사는 매우 많은 돈을 벌었다.
실제로 검투사로서 성공하고 은퇴한 돈 많은 주인을 부러워하는 낙서도 남아 있다.
검투사들의 인기가 어느 정도로 높았는가를 보여주는 예도 있으며, 패배자가 항상 살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검투사가 직접 쓴 낙서에서 알 수 있다. 그는 원형 극장에서 20여 번의 결투에 참가했는데 6번을 패배했다고 적었다.


로마의 그림들을 보면 어른들이 사냥에서 황소나 코뿔소에 올가미를 걸었듯이 어린이들이 산토끼를 사냥하는 장면이 나온다.
로마의 어린이들은 양이나 염소, 개가 끄는 2륜 차를 타고 놀면서 전차 경주의 기수가 되는 것을 동경했다.
이것은 원형 경기장에서 벌어진 당시의 검투나 경기가 모두 위험하지 않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대부분의 검투사는 포로, 노예, 죄인으로 훈련소에서 철저히 단련되었고 검투사들을 양성하는 전문 기관이 세워졌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이 검투사가 모든 경기에서 죽음의 결투를 한 것은 아니었다.
해안으로부터 약 29㎞ 떨어진 티베르강가에서 출발한 로마는 끊임없이 외부의 적과 싸우면서 자신의 영토를 확장한 국가이다.
그러나 국토가 확장되고 외국의 노예가 들어오면서 로마인들은 노동을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로마의 콘스탄티노 개선문(Arco di Constantino)

콜로세움의 서쪽에 있는 콘스탄티노 개선문은 높이 21m, 폭이 25m로, 3개의 아치로 구성된 로마에서 가장 큰 문이다

이 개선문은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기독교를 공인한 황제로 )가 마센치오를 격파한 기념으로 315년에 세웠는데

프랑스 파리나 마르세유 개선문의 시조가 된 문이기도 하다

 

 

 

 

 

 

 

 

고대 로마 중심지를 다 둘러본 후 성 밖으로 이동. 

 

시가지를 통과.

 

 

 

한인 식당에서 한식으로 저녁식사 후 숙소로 이동.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가 태어나 암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형제에 의해서 팔라티노 언덕에 건국되었다는 전설을 가진 로마,

로마(Roma)를 거꾸로 하면 애머(Amor)! 사랑의 도시이다.

도시 전체가 커다란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는 로마는 옛 유적을 그대로 보전한 채 현대 문명과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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