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여행

6-2,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 구시가지, 천문시계와 카를교

opal* 2012. 6. 3. 21:30

 

(6월 3일 일요일)

 

 

왕궁을 둘러본 후 구시가지를 둘러보기위해 Tram(도심 전차) 기다리기. 

 

트렘과 티켓,

 

두 정거장인 짧은 거리를 Tram으로 이동하여 하차. 

 

신시가지.

바츨라프 광장 남쪽 끝에 보이는 3층 건물은 프라하 국립 박물관(Prague National Museum)이다.

5년(1885년~1890년)에 걸쳐 지은 네오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로 우아하고 화려한 천장화가 압권이다.

1층에는 체코 최대 장서를 자랑하는 도서관이 있고, 2층에는 유사 이전부터 현대까지 고고학 유물과 광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유명한 보헤미안 글라스가 전시되어 있다. 3층 자연사 전시관에는 어류,조류,포유류 등의 관련 박제 및 표본이 5000여점 진열되어 있다.

 

바츨라프 광장에서 북쪽을 배경으로.

바츨라프 광장(Wenceslas Square)- 중세시대 말 곡물 시장이 섰던 곳으로 사방이 탁 트인 광장이라기 보다는 넓은 대로 이다.

지금은 차도와 인도로 나뉘어 있고, 중앙에 녹지가 조성돼 원래 광장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

대로변에 늘어선 상점, 카페, 은행 등은 대부분 20세기 들어 지은 것이다.

바츨라프 광장은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프라하 시민의 집회 장소로 쓰였다. 이곳에서 민주화를 부르짖던 학생들이 분신을 했고,

벨벳 혁명 때 시민이 모여 민주화를 쟁취했다. 지금 이 광장 주변은 프라하 시내 최고 번화가로, 시민과 여행자에게 만남의 장소 역할을 한다.

 

바츨라프 광장의 길이는 750m, 넓이는 60m 이다. '프라하의 봄'사건 당시 점령군과 시위대의 격돌로 100여명이 희생당한 장소이다.

지금은 프라하 최대 번화가이며 상업 교툥 문화의 중심을 이룬다.

메이데이 같은 축제의 회장으로 사용되며 역사상으로는 대 사건의 무대를 이루기도 했다.

 

광장이 시작되는 곳에 체코인들의 수호성인으로 여기는 성 바츨라프의 기마상이 있는데 여기서 명칭이 유래 되었다.

광장 이름은 체코의 최초 왕조인 프르셰미슬 왕가의 왕 바츨라프에서 유래한 것으로,

그는 사후에 성인으로 추대받은 체코 기독교의 상징적 인물이다. 바츨라프 동상이 광장 동남단에 성인 4명의 수호를 받으며 서 있다.

이 기마상 앞에는 공산주의 희생자 추모비가 있고, 광장 정면에는 세계10대 박물관으로 꼽히는 프라하 국립  박물관이 있다.

 

 

바츨라프 광장에서 국립 박물관을 배경으로.

 

조금 걷다 설명 듣고, 또 이동하여 설명 듣고.

 

 

바츨라프 광장 바닥엔 관광객들의 낙서가 보이는데 간혹 한글도 눈에 뜨인다. 

 

 

오래된 건물의 조각이 이채롭다.

 

 

바출라프 광장과 시가지를 둘러보고 저녁식사를 위해 가는 중.

 

식당 근처 거리.

 

식당 앞에서.

 

식사는 일정에 포함되었지만 맥주는 개인지출, 프라하의 여인이 우리와 자리를 함께 했다. 

 

일행인 박 ㅅㅇ씨에게 도움 주었다고 그의 친구인 프라하의 여인 오 ㅁㄱ씨가 저녁 식사 후 캔맥주를 사 주기도 했다. 

 

국수 수프, 갈비와 감자구이 저녁식사. 디저트로 아이스크림까지.

 

저녁식사 끝내고 또 구시가지와 야경을 둘러보기 위해 나선다.

 

1912년 11월 문을 연 화약탑 바로 옆 시민회관(오베츠니 둠 Obecni Dum; 영어-The Municipal House).

프라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르누보 양식 대표적 건물로  본래 궁궐이었던 건물을 헐고 세웠다.

안토니 발샤네크(Antonín Balšánek)와 오스발드 폴리브카(Osvald Polívka가 설계했다.

당시 체코에서 가장 뛰어난 예술가들이 꾸민 장식들과 우리돔 천정이 유, 연주회장과 전시장, 레스토랑 등 다양한 문화 시설을 갖추었다.

건물 중심에 1200석을 갖춘 공연장인 스메타나 홀은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이 선언된 장소 이기도 하다.

체코의 음악축제인 '프라하의 봄(Pražské jaro)'의 개막식과 폐막식이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정면에서 보이는 시민 회관 입구 위에 있는 "프라하에의 경의"(ZDAR TOBĚ PRAHO)!) 라는 모자이크화가 유명하다.

  1층에는 ‘프라하의 봄’ 음악 축제의 오프닝과 클로징 공연장인 스메타나 홀이 있는 독특한 문양들이 많은 예술성 짙은 복합문화공간이다.

스메타나 홀은 체코가 낳은 세계적인 음악가 스메타나를 기념하는 스메타나 필하모니의 활동무대가 되는 곳이다.

스메타나(Bedrich Smtana, 1824~1884)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륵 왕조의 억압아래 있던 체코인들의 민족운동을 격려하며

체코민족 특유의 근대 음악을 수립했다. 1846년 베를리오즈와 슈만을, 1848년 리스트를 만나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66년 국립극장을 위해 오페라 작곡, '팔려간 신부로 성공', 국립극장 수석 지휘자가 되고,

1873년 오페라 '두 사람의 미망인' 작곡 후 귀에 질환이 생겨 은퇴, 귀머거리 상태에서 1879년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Ma viast)' 완성,

현악 4중주곡 '나의 생애로 부터' 등을 작곡, 1893년 정신 착란증으로 지내다 1884년 프라하 정신병원에서 사망.

'프라하의 봄' 은 체코 음악가 스메타나의 서거 기념일인 5월 12일에 열리는 음악 축제이다.

 

 

프라하 화약탑(Prague Powder).

프라하 역에서 남쪽으로 500m 지점에 프라하 국립 박물관이 있고, 이곳에서 다시 바츨라프 광장과 무스테크 광장을 지나면 오른 쪽에 있다.

프라하 구시가지와 신시가지가 나뉘는 지점이며, 옆에 아르누보 양식으로 지어진 시민회관이 있다.

 

1475년 지금의 구시가지를 지키는 13개 성문 가운데 하나로 대포 요새로 건설 되었다.

이후 총기 제작공이나 종 주조공인 야로스(Tomas Jaros)의 거처겸 작업실로 개축되었다가

루돌프 2세 때인 17세기 초에 연금술사들의 화약창고 겸 연구실로 쓰이면서 화약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딕 양식 탑으로 높이는 65m이며, 총 186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프라하의 대부분 건축물들이 화려한 장식과 다양한 색상으로 구성 되어있는 것과 달리 건축물 자체가 어두운데다 저녁 시간이라 더 어둡다.

예전엔 왕과 여왕의 대관식을 거행하는 장소이자  외국 사신들이 프라하 성으로 들어올 때는 꼭 거쳐야하는 관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체코 국립은행(Czech National Bank)

구소련의 붕괴로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 공화국과 슬로바키아로 분리되자 1993년 중앙 은행이 설립 되었다.

중앙 현관 옥상에는 청동 기마상 조형물이 있다.

 

 

 

높이 65m의 고딕식 화약탑. 1475년에 고딕양식의 65m의 성문으로 건설되었다.

1757년 러시아와 전쟁 때 화약탑으로 사용되어 개축된 이후 화약탑으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현재는 갤러리로 사용되고 있으며 구시가로 들어가는 상징적인 문으로 남아 있다.

 

1960년대 부터는 종鐘 주조와 관련된 유뮬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화약탑과 나란히 있는 길이 신시가지, 탑을 지나 서쪽 길은 구시가지가 시작 되는 곳이다.

 

화약탑 벽면의 다양한 부조물.

 

시민회관과 화약탑을 둘러본 후 구청사 광장으로 향하는 시간은 저녁 8시가 넘은 어둠이 깔리는 시간이다.

 

화약탑에서 구청사 광장으로  가는 구시가지의 모습.

 

상점안에 진열된 물건들은 모두 화려하다.

 

 

오 ㅁㄱ씨가 이 건물에 대해 얘기해줬는데 잊었다.ㅋㅋ

 

저녁 8시 반이 되었건만 관광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구청사 광장. 정면에 성 미쿨라세(니콜라스) 성당이 보인다.

 

프라하 구시가 광장(Prague Old Town Square)은 불타바 강 우측 구시가 중심에 위치한다.

11세기에 형성된 이래 지금껏 광장으로 쓰고 있는 구시가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도시 이다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공화국 몰락, 1968년 프라하의 봄, 1989년 벨벳 혁명이 모두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엔 고딕,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건물 등 시대별로 예술사조으 변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틴성당, 구 시청사, 천문시계, 골즈킨스키 궁전, 얀 후스 동상(사진에 보이는 청동 조각상) 등 다양한 볼거리가 광장 주변에 있다.

 

프라하 구 시청사(Prague Old Town City Hall)- 구 시가지 상징적 건물이다.

1338년 고딕양식으로 지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화재로 상당부분 훼손 되었다. 그 후 복원과 층축공사로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구시청사구시청사는 특히 독특하고 화려한 천문시계가 설치된 탑으로 유명하다.

또한 구시청사 안에는 역사박물관, 예배당, 집무실 등이 있다. 예배당에서는 천문시계 내부를 볼 수 있다

 

날은 어두워져 잘 안보이지만 가까이 보면 오밀조밀 예쁜 모습이 많다. 사진으로 볼 때 이 건물 좌측(남쪽) 벽면에 천문 시계가 있다.

 

천문시계가 있는 구시청사(동쪽) 배경.

 

틴성당(Tnsky chram),  체코 프라하. 구시가지 동쪽에 위치하며, 금장식을 정점으로 하는 두개의 탑은 높이가 80m이다

프라하 구시가지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교회로, 1365년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계속 변형을 가해

17세기까지 다양한 건물 양식이 가미되었다. 외관은 고딕 양식으로 지어져 정교하면서도 화려하고, 특히 80m 높이까지 치솟은 2개의 첨탑은

 이 교회의 상징으로 멀리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내부는 바로크양식으로 되어 있어 비교적 어두운 느낌을 준다.

 

두 탑 사이의 금장식을 확대한 모습. 


프라하 구시가지의 시청사 동쪽 맞은편, 골즈 킨스키 궁전 바로 옆에 위치한다.

북쪽 벽에 있는 로코코 양식의 제단과 아름다운 동북쪽 출입문이 유명하며, 황금 성배(聖杯)를 녹여 부착한 첨탑의 성모마리아상(像),

고딕양식으로 조각된 실내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그리스도상, 백랍으로 만든 세례 받침 등도 성당의 명물로 꼽힌다.

성당 안에는 루돌프 2세를 위해 일했던 덴마크의 천문학자 브라헤(Tycho Brahe)가 묻혀 있다.

클래식 연주회가 열리기도 하며, 교회 바로 옆에는 '성(城)'의 작가 카프카(Franz Kafka)의 생가가 있다.

 

왼족탑은 이브탑, 우측탑은 아담탑인 틴성당을 배경으로. 틴성당 왼쪽에 골즈킨스키 궁전이 있다.

 

붉은색 지붕인 골즈킨스키 궁전(Palac Golz Kinskych)은 체코 공산화를 선언한 장소라고 한다.

 

구시가지 광장, 얀 후스 동상이 보인다. 동상을 배경으로 있는 건물들도 하나하나 다 이름있는 유명한 건물들이다.

얀 후스 동상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구시가지 광장에는 성 미쿨라셰 교회와 틴 교회, 각종 레스토랑과 상점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구시가 성 미쿨라셰 성당(Church of St.Nicholas, 영어- 성 니콜라스 교회)

구시가 광장에 위치한 성당으로 12세기에 건축되었지만 18세기(1732-1735년)에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된 성당이다. 

14세기 틴성당이 들어서기 전까지 구시가지를 대표하는 화합의  장소였다.

1735년 킬리안 이그나즈 디엔체호퍼의 설계로 현재의 모습이 됐으며 여러곳이 안토닌 브라운의 바로크양식의 조각 작품이 장식돼 있다.

1781년 요세프 2세가 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폐쇄 명령을 내려 성당이 점차 황폐화 되었다.

그후 1차대전 때 프라하 주둔군 부대가 사용했는데 주둔군이 성당을 정비하여 천장돔에 코스마스 다미안 아삼이

성 미쿨라세와 성 베네딕트의 생애를 찬양하는 프레스코화를 그려 넣었다. 성당 명칭이 여기서 유래하였다.  

 

또 이성당은 모차르트가  자주 찾아 오르간 연주를 한 곳으로도 유명한데, 1791년 12월 그가 죽었을 때 이곳에서 추모미사가 열렸다.

지금도 모차르트가 1787년 연주한 오르간이 남아 있다고 한다. 프라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 건축으로 꼽히며,

둥근 청동지붕과 웅장한 규모가 주위를 압도한다.

 

성 미쿨라셰의 생애를 그린 펀장의 프레스코 화와 보헤미안 글라스의 왕관 모양의 샹들리에가 유명하다

이곳은 1920년에 탄생한 후스파 교회로 현재 사용되고 있으며 고전 음악회도 열린다.

 

프라하 구시가 천문시계(Prague Astronomical Clock).  

천문시계는 1410년 시계공 미쿨라시(Mikulas of Kadan)와 뒷날 카를 대학의 수학교수가 된 얀 신델(Jan Sindel)이 공동으로 제작하였다.

1490년 달력이 추가로 제작되고, 외관이 조각으로 장식되었다. 1552년 시계 장인 얀 타보르스키(Jan Taborsky)가 시계를 수리하면서

원래의 제작자로 하누시(Hanus)를 언급하였다. 이후 더 이상 똑같은 시계를 제작하지 못하도록 하누시의 눈을 멀게 만들고,

그의 죽음과 함께 시계 또한 작동이 멈추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졌는데, 오늘날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천문시계가 달린 프라하 구시청사 시계 탑.  구시청사는 화려한 천문시계가 설치된 탑으로 유명하다.

천문시계가 달려 있는 탑은 1364년 세웠다. 높이 69.5m로 엘리베이터와 계단을 이용해 오를 수 있다.

탑에 오르면 프라하 시가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지만 우리는 시간이 부족하여 올라가 볼 수가 없었다. 

시계탑 위의 시계에서 알 수 있듯 현재 시간은 오후 8시 35분, 9시 정각 전까지 자유 시간이 주어진다.

 

1552년 이후 시계는 여러 번 작동을 멈추었고 그때마다 수리가 뒤따랐다.

17세기에 움직이는 조각상을 덧붙이고, 1865년과 1866년에는 복구작업 끝에 사도들의 형상을 추가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말, 전쟁의 영향으로 일부가 파손되면서 다시 작동을 멈추었으나 이후 보수를 거듭한 끝에

1948년에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날 프라하의 명물로 손꼽히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시계를 보기 위해 몰려든다

 

천동설에 기초해 만들었다는 이 천문시계는 시간, 일출, 일몰, 월출, 월몰까지 표시해준다.

만든 지 600년 되는 시계로 처음 형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1년에 한 바퀴씩 돌면서 연, 월, 일, 시간을 나타낸다.

칼렌다륨은 천동설의 원리에 따른 해와 달과 천체의 움직임을 묘사하였다.

시계는 상하 2개의 큰 원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쪽 시계를 칼렌다륨, 아래쪽을 플라네타륨이라고 부른다.

 

시계 아래쪽의 플라네타륨.

1410년 만들어진 천문시계 아래의 둥근 판에는 별자리가 그려 있고,

둘레에는 열 두달 동안의 농민들 생활모습을 묘사하여 제작 당시 보헤미아의 농경생활을 표현해놓았다.

 

 매

플라네타륨 주변의 조형물 왼쪽은 철학자, 천사, 천문학자, 연대기를 쓰는 사람을 나타낸다고 한다.

 

저녁 시간임에도 천문시계를 보기위해 모여드는 관광객들.

 

매시 정각이 되어야 시계 주변 모형들의 움직임을 볼 수 있어 밤 9시 정각이 될 때까지 부지런히 광장 주변을 둘러 보기로 한다.

 

얀 후스(Jan Hus)- 체코의 종교 개혁자. (얀 후스를 에워싼 이들은 후스파의 전사와 빌라호라의 전투 후에 국외로 추방된 신교도들).

체코 민족운동 지도자로서 보헤미아의 독일화 정책에 저항했다. 1414년 콘스탄츠 공의회에 소환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프라하대학교에서 신학과 문학을 배우고, 1398년 프라하 대학에서 교수로 신학을 강의, 1400년 사제가 되었다.

또한 교화을 비롯한 고위성직자들의 성직 매매등 세속화를 강력히 비판하였다.

1406년 체코어의 정자법을 확립, 성서와 위클리프이 저작을 체코어로 번역하였다.

 

논쟁적 인물인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는 룩셈부르크의 신성 로마 황제 지기스문트로부터

콘스탄츠 공의회에 모인 교회의 고위 성직자 앞에서 자신의 종교적인 견해를 펼쳐 보이라는 호출을 받았다.

지기스문트는 후스를 안전하게 호위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는 1414년 11월 호숫가 도시에 도착한 후 곧 체포되어

1415년 이단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그를 고발한 이들은 그에게 자신의 견해를 설명할 기회를 주지 않았고,

후스는 자신이 설교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말에 따르자면 거짓 증인들이 그가 했다고 주장하는 모든 믿음에 대해, 철회를 거부했다.

공의회의 표결은 그에게 불리하게 나왔고, 이단자를 처단하는 정해진 방식이란 사형이나 익사였으므로,

후스는 1415년 7월 6일 화형에 처해졌다. 후에 루터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후스의 죽음으로 보헤미아(당시의 체코)에서는 격분의 물결이 일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후스파라는 이름을 채택했고,

1419년 지기스문트가 형으로부터 보헤미아 왕관을 물려받자 길고 격렬한 전쟁이 발발했다.

후스파를 처단하려는 시도가 여러 차례 있었으나 그들은 저항했고, 결국 1436년에 맺은 협정으로 후스파는 보헤미아 교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복음서의 진실 안에서... 나는 오늘 기꺼이 죽을 것이오." (얀 후스가 주장을 철회하라는 마지막 권유를 거절하며 한 말)

 

 

이곳도 유명인의 건물이라고 오 ㅁㄱ씨가 얘기해주었는데 한꺼번에 많이 들으니 헷갈려 잊었다.

 

 

 

 

얀 후스 동상 뒤로 골즈킨스키 궁전과 틴성당.

골즈킨스키 궁전(Palac Golz Kinskyc)은 1765년에 로코코 양식의 붉은색 건물로 합스부르크 시절엔 한 때 독일어 학교였고,

카프카가 다니던 학교였다고 하며 카프카 아버지는 1층 오른쪽에서 상가를 운영했다고 한다.

 

틴성당.

 

골즈킨스키 궁전, 얀 후스 동상과 틴성당이 있는 구청사 광장엔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마차가 많이 있다.

 

 

구시가 성 미쿨라셰 성당(Church of St.Nicholas, 영어- 성 니콜라스 교회)

 

프라하 전통 빵.

 

전통빵 굽기.

 

"프라하의 전통 빵이 맛있으니 한 번 맛보라"며  프라하의 여인이 사서 나누어 주었다. "오 ㅁㄱ씨 Thank You~야요."

 

천문시계의 움직임을 보기위해 전통빵을 먹으며 천문시계가 있는 쪽으로. 뒤 배경으로 얀 후스 동상과 골즈킨스키 궁전 보인다.

전통빵 모양은 도우넛처럼 생겼으나 먹기위해 한 입 베어물면 사과껍질 깎듯 한 줄로 길게 이어져 있다. 맛은 달콤하고 구수한 빵맛.

 

마지막 쇼인 저녁 9시 정각이 다되어 천문시계 앞으로 다시 모였다.

이 시계는 09시부터  저녁 9시까지 매 시각마다 20초 정도 움직이므로 미리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밤 시간이라 어두운데다 비가 내려 건물이 젖어 더 어둡다. 

 

천문시계도 정확하지만 년 월 일과 하루 24시간을 기준으로 보게 되어있어 복잡하고, 탑 꼭대기 조명 아래 시계가 9시 거의 다됨을 나타낸다.

 

  비 맞으며 천문시계를 바라보기위해 길을 꽉메운 관광객들. 사람들이 많아 미리 약속 장소를 정해놓고 각자 관람하기로 했다.

 

드디어 밤 9시 정각, 

칼렌다륨 오른쪽의 해골 모형이 움직이면서 12사도들이 2개의 창을 통해 천천히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이어서 시계 위쪽의 황금색 닭이 나와 울면서 시간을 나타내는 벨이 울린다.  

그 후 나팔수가 전망대 꼭대기에서 나팔을 불고 손을 흔들면 천문시계쇼가 끝난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아 소리가 잘 안들린다.

 

위 사진과 아래 사진을 자세히 비교해 보면  칼렌다륨 오른쪽 해골의 모습이 달라진 것을 알 수가 있다.

정각이 되면 해골은 오른손으로  줄을 당기고 왼손의 모래시계를 거꾸로 놓는다.

칼렌다륨 왼쪽의 거울을 보는 조형물은 허영심 많은자를 표현하고, 금자루를 쥔 자는 탐욕을 의미,

오른쪽의 해골 모습은 죽음을 알리는 사신, 터번쓰고 연주하는 자는 번뇌를 상징한다고 하고, 투루크인으로 이교도를 상징한다고도 한다.

 

시계 위 작은 창을 통해 나타나는 12사도들의 모습.

 

사진의 왼쪽 건물은 구 시청사, 우측은 틴 성당이다.

 

천문시계쇼?를 본 후 카를교를 향하여 가는길엔 비가 내려 미끄럽다.

 

구청사에서 카를교 가는 길에 프라하대학 건물이 있다.

 

프라하의 택시와 전기차.

 

카를교 입구의 첨탑은 건설할 당시 통행료를 받기위해 세운탑이라고  한다.

 

불타바강에 놓여 600년 세월을 보헤미안의 애환을 함께한 다리로 위  좌측은 성 보이테호, 우측은 성 자크문트,

 아래에는 좌측부터 카를 4세, 성 비트, 바츨라프 4세의 모습이다.

 

관광객이 많이 다니는 다리 입구엔 걸인이 엎드려 있고 옆엔 개가 누워있다. 개가 천연덕 스럽게 연기하는 것 같아 우습다.

 

카를교 - 체코의 수도 프라하를 흐르는 불타바(몰다우)강에 놓여있는 돌다리.

강 서쪽 왕성과 동쪽 상인 거주지를 잇는 최초의 다리로 보헤미아(당시의 체코) 왕 카를 4세 때(1346~1378) 건설되어 이름이 생겼다.

길이 520m, 폭10m로 16개 아치가 떠받치고 있는 다리로 유럽 중세 건축의 걸작이다. 다리 양쪽의 탑은 원래 통행료를 받기위해 세운 것이다.

 

다리 입구 첨탑 맞은편 북쪽 끝에 있는 성 프란시스코 성당 앞에 1406년 카를교를 놓은 카를 4세의 동상이 있다.  

비까지 내린 날씨에 날은 어둡고...조그만 키메라로 감도를 높여 찍으니 사진 화질이 거칠다.

 

동쪽 구시가지와 서쪽 프라하성 사이를 흐르는 블타바강(江)에 놓여 있는 돌다리 카를교는 1357년에 시작해 1402년에 완공하였다.

17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제작된 성 요한 네포무크, 성 루이트가르트, 성 비투스 등 체코의 유명인이

한 쪽에 15개식 양 옆으로 30개 성상이 늘어서 있다.

 그 중 유일한 청동상이자 가장 오래된 조각상은 성 네코무크 조각상으로 만지면 행운이 온다하여 손때로 반질반질하다. 

관광명소로 알려진 보행자 전용 다리 카를교는 늦은 시간 인데도 사람들이 많이 붐빈다.

 

카를교에서 바라본 프라하성.

 

프라하 시내를 흐르는 불타바(독어- 몰다우)강 .

 

 

카를교 중간에 있는 聖 얀 네포무크 신부(Saint.John Nepoumuk-프라하에서 가장 존경받는 카톨릭 성인)청동상. 1683년 얀 브로코프 제작.

1380년 성하벨교회의 성직자와 성비투스성당의 제단 성직자를 지낸뒤 1383년부터 1387년 까지 이탈리아 파도바에서 교회법을 공부하였다.

프라하로 돌아와 1389년 프라하 대주교 대리를 거쳐 1390년 성하벨교회 본당 신부가 되었다.

벤체슬라우스 4세 때인 1393년 3월20일 죽었는데 왕이 왕비의 고해성사 내용을 말하라고 했으나 이를 거부해 죽였다고 하고, 또는

왕의 정책에 반대하다 고문으로 죽었다고도 한다. 죽은 뒤 시체는 불타바강에 던져졌다.

뒤에 시신을 찾아 프라하성에 있는 비투스대성당에 묻었다. 1729년 성인 반열에 올랐다. 

 

청동상 아래 부분에 그려진 조각상.

 

신부님의 수난당함을 그린 조각상. 우측사진 가운데 떨어지는 사람이 얀 네포무크 신부이다.

이 신부를 만지며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 하여 사람들이 많이 모여든다.

 

청동상 아랫부분 얀 네포무크 성인의 순교장면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전설로 많은 이들이만져 반질반질 하다.

 

 

 

 

 

프라하성 야경.

 

불타방강에 반영된 프라하성의 조명.

 

카르교 입구 첩탑.

 

박물관,

 

카를교까지 야경을 감상하고 호텔로

 

긴 긴 하루를 마치고 호텔로